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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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t Donald Cobain
1967년 2월 20일 ~ 1994년 4월 5일

최후의 록 아이콘이라 불리는 남자[1]

90년대 대중음악계를 상징하는 슈퍼스타[2]

1 개요

너바나(미국 밴드)기타리스트이자 보컬. 오른손잡이[3].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열풍을 주도했다.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사운드가든 등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의 하위 장르라고 볼 수 있는 그런지 록의 시대를 열었다.

아내는 록 가수이자 배우인 코트니 러브로 커트 코베인과 결혼하기 전부터 막장 오브 막장이었는데 그가 죽은 지금도 마약과 각종 사고로 뉴스에 오른다. 코트니 러브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펑크 록 그룹 홀의 리더였고 가슴을 드러낸 채 라이브를 하기도 하는 등 성욕을 도발하는 이미지의 악동이다. 딸은 프랜시스 빈 코베인.[4]

2 생애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커트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전기후기에서 커트의 워싱턴 주 애버딘 생가를 취재한뒤 '비교적 가난하다고 알려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집도 커트코베인의 집에 비하니 대궐같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 커트의 가정 뿐만 아니라 태어난 애버딘 자체가 우리나라로 치면 아주 조그만 시골 규모이다. [5] 커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웬디는 19살, 아버지는 21살에 불과했고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아버지의 불륜으로 이혼하고 만다. 부모님의 이혼 후, 커트는 아버지를 증오하였고 이로 인해 평생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6] 그의 우울증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 둘 다에 기인한다고 보는게 맞다. 우울증과 마약중독을 포함한 정신적인 건강 문제는 그의 양가에 두루 존재하였으며 그의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하였다. 그의 외증조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서 죽었으며 다른 두 명의 삼촌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처럼 커트 코베인에게 자살과 우울증은 그리 먼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커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어렸을 때 동네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현장에 올때까지 몇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커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부모의 이혼후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하기도 했으며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Something In The way"의 노랫말은 내가 만약 가출해서 다리 밑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살았을거라고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7] 청소년 시절부터는 마리화나, ,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8] 생전 커트는 의도였는지 혹은 특별히 의도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일부 있다고한다. 무대에서 보이는 분노와 폭발적 매너와는 달리, 실제 성격은 말이 없으며 극심한 우울증이 있는 것을 빼고는 주위사람에게 친절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는 동성애 옹호주의자로 유명하며 그로인해 양성애자라는 오인을 받기도 하였다. 낙태 찬성주의자인 그의 면모는 Pennyroyal Tea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커트 코베인이 추구했던 간단한 음악 스타일때문에 그의 기타 실력은 과소평가된 경향이 있는데 커트는 이펙터는 별로 쓰지 않으면서도[9] 그런지 특유의 어둡고 노이지한 톤을 이끌어냈고 파워 코드를 기반으로 한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기타리프들을 만들어냈다. 비록 너바나의 음악에는 기타 솔로가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수준급의 기타 솔로를 연주할 수 있는 테크닉 또한 가지고 있었다. 커트 코베인은 Nevermind로 뜨기 전부터는 동료 뮤지션들에게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음악적 성향은 두말할 것도 없는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이지만, 의외로 커트는 메탈리카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메탈리카의 공연에 찾아가서 그 떡진(...) 금발을 휘날리며 헤드뱅잉을 하면서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본 커크 해밋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커트가 가장 좋아하는 메탈리카의 곡인 'Whiplash'를 연주해 주었다고 한다.(커크 해밋 인터뷰 중.)[10]

커트 코베인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 50선"을 보면 커트가 좋아했던 뮤지션들을 알 수 있다.

Nevermind 앨범 발매 초반에 커트 코베인은 매니저 앞에서 왜 MTV에 앨범의 첫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가 자주 나오지 않냐고 불평했을 정도로 밴드와 앨범의 성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소망대로 앨범은 엄청나게 성공했다. 커트가 밴드의 성공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자 커트의 지인들은 "무명 시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는 장사꾼이다." 라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던 사람이 성공하니 엘비스처럼 행동하는 이중적인 사람으로 비난했고 언론에서는 커트의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커트를 양성애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적인 위험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인디 시절의 인터뷰를 들먹이며 뜨고 나서 여자친구인 토비 베일을 만나자 페미니즘을 옹호한다며 줏대없는 사람이라고 까댔다. 그리고 코트니가 프렌시스를 임신했을때 부부가 심각한 마약 중독자여서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은데도 낙태를 하지 않고 프렌시스 빈 코베인을 낳았다는 이유로 또 까댔다. 게다가 커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바나의 음악은 본질적으로는 펑크 록인데 평론가들은 마치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시했다며 설레발을 떨면서 다음 앨범에 대한 기대감에 관한 기사를 계속 내보냈고 "너바나가 <Smells...>만이 히트한 원 히트 넘버 밴드로만 기억되면 어떡하지" 하며 불안해했다고 한다.

결국, 새로 나온 음반이 생각보다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 해체의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1994년 4월, 약물중독 요양소에서 탈출한 후, 샷건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하는 충격적 최후를 맞았다.[11] 인기와 명예의 정점에서 27살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은 전세계의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비통함을 불러 일으켰다. 음모론자들이 물어뜯기 좋아하는 사건이지만 자살로 판명되었다. 조지프 히스의 '혁명을 위하여'는 이러한 커트의 자기모순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음모론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게 '코트니 러브가 죽였다'랑 '살해설'이라고 한다.). 자살 직전의 미공개 인터뷰에선 너바나를 해체하고 너바나와 정반대인 포크장르를 하거나 아내 코트니의 밴드 홀에 가입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단순히 커트 코베인이 아픈 상처를 입어 자살을 선택한 위대한 록 가수로 정도로 생각 될 수도 있겠으나 자살까지 번진 문제는 그 보다 더 복잡하다. 인터뷰 중 기자가 커트 코베인에게 스스로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은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뿐이다."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나왔다. 더불어 데이브 그롤은 노숙자 출신이며 크리스 노보셀릭 역시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사실 그 바닥에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생전 그는 선천적이라 할수 있는 조울증과 더불어 위통과 같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고 불우한 주변 환경은 그로 하여금 약물에 대한 탐닉을 일으켰다. 록씬에서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 가운데 하나였던 커트 코베인은 자신이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굉장히 꺼려하였고 자신을 약물중독자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몹시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인터뷰에서는 매번 중독자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의 자살은 헤로인 중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2] 또한 커트가 죽기 직전 코트니가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여러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고 지금은 전남친인 빌리 코건과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자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커트 코베인이 MTV UNPLUGGED 라이브에서 부른 마지막곡,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이 자신이 빌리 코건의 약혼녀였던 코트니를 가로 채서 결혼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과 코트니가 빌리 코건과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의 분노가 담긴 코베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의 죽음 이후 반응이 다양한데, 록 스타들은 대부분 슬퍼하는 분위기였고, 유서에 자신의 곡의 구절이 인용된 닐 영과 데이브 그롤이 몸담고 있는 푸 파이터즈는 각각 Sleeps With Angels곡과 Friend of a Friend라는 추모하는 곡을 쓰기도 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코베인 사망 이듬해 발표된 6번째 앨범 One Hot Minute 9번째 트랙 Tearjerker란 곡으로 커트를 추모했다. [13]힙합씬에서는 노래에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문장을 집어넣기도 했다.(에미넴의 Cum On Everybody, 퍼블릭 에너미의 Are You Gonna Go Our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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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자살 당시의 신문기사의 사진. 경찰의 경비에 의해 기자가 근처 나무에서 올라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들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사진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경찰에서 현장 기록을 위해 찍은 걸로 추정되는 샷건으로 머리를 쏜 직후의 안면 사진이 있다. 어떻게 유출된건지 이전에 사실인지도 불명. 당시 사건 담당형사가 사건파일을 잠시 집에 가져 갔는데 너바나 팬이었던 아들이 몰래 빼서 스캔해가지고 사설 BBS에 올렸다는 설도 있고 조각가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3 기타

공연중에 드럼셋 등에 몸을 던지는 퍼포먼스로 유명한데, 이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지병인 만성 위염과 장염탓[14]이고 두번째는 BLEACH 시절의 드러머와의 불화때문이다. 당시 드러머였던 Chad Channing은 자신이 너무 작곡에 기여를 못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커트와 크리스는 그의 드러밍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브 공연중에 실수를 왕창 하거나 아예 곡을 연주를 못하는 상황이 나오자 둘이서 빡쳐서 무대를 개박살내는 것이다. 그가 쓴 기타 대부분은 온전하지 못하다고 볼수 있다. 라이브중 박살내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니(물론 드러머가 데이브로 바뀐 이후에도 이 관행은 계속되는데 이는 장염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순 있다.)...

너바나의 다른 멤버들은 너바나 시절에는 커트가 절대적인 카리스마였다보니 커트만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다른 그룹차려서 다 잘먹고 잘살고 있다. 푸 파이터즈 등. 사실 이러한 이미지는 커트 코베인이 어느정도 의도한 면도 있다. 밴드 초창기에는 수익을 공정하게 나눴으나 코트니가 '곡은 당신 혼자 쓰는데 왜 수익은 공평하게 나눠?" 라고 항의하자 최종 계약을 하기 일주일 전 밴드의 인세 중 자신이 50%로 차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바꿨고 이로 인해 커트와 크리스 노브셀릭과의 사이가 나빠졌다.(커트 사후 코트니가 너바나의 곡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아예 노브셀릭은 "난 코트니와 항상 잘 지낼려고 노력해보지만 그녀는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위에 언급된 것 처럼 죽기 직전 커트는 커트 본인이 차라리 잔잔한 포크로 장르를 바꿔 솔로를 하거나 부인 코트니의 밴드 홀에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실제로 94년 커트가 자살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밴드는 해체 직전의 상황이며 혼자 곡을 만드는 것에 지쳐서 밴드들과 합주를 해서 곡을 만들려고 해도 합주를 하면 소음만 나오고 음악은 안 나온다며 멤버들을 까기도 했으니 커트가 자살을 안 했어도 밴드는 곧 해체됐었을 가능성이 높다. 데이브 그롤도 "곡은 많이 만들어 놓았지만 자신의 곡은 너바나의 색깔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앨범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말도 했고...[15] 다만, 그는 커트를 매우 그리워 하는 사람이다.

단, 그가 밴드 내에서 독선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관철하려 했던 독재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특히 데이브 그롤의 경우 수많은 자작곡을 이미 너바나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커트에게 이를 크게 피력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롤이 스스로 자신의 곡들이 '너바나스럽지 않다' 고 여겼고, 이를 자발적으로 양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커트는 데이브가 곡 작업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엿들은 적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겨 너바나의 차기 앨범부터 데이브의 곡들을 적극적으로 수록하고자 하였으나 커트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하루를 담은 영화 "라스트 데이즈" (거스 반 산트 감독)가 있지만 불친절한 거스 반 산트 영화에 속하니 유념하고 볼 것.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그는 커트 코베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에 가깝다.

"Smells Like Teen Spirit" 곡이 최대 히트곡인 반면, 본인은 이 노래를 무척 부르기 싫어했다고 한다.[16] Top Of The Pops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연주했을 때 핸드싱크에 반발해서 개판친 전설적인 동영상이 존재한다. 코베인 본인은 스미스모리세이의 모창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마이크 시식과 손바닥 주법, 베이스의 아크로바틱과 드럼 에어로빅 근데 또 그렇게 부르는데도 코러스부분은 잘 부른다

눈뜨고코베인과는 관계가 전혀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도한 듯.

2015년 1월 24일,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Kurt Cobain: Montage of Heck이며 감독은 브렛 모르겐이다. 코트니 러브가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하며, 커트의 딸인 프란시스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커트 코베인을 소재로한 영상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족이 제작에 참여한 사례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몇몇 장면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다고 한다. 5월 4일에는 HBO를 통해서 TV로도 방영되었다.
  1. 너바나 이후로 미국이나 전세계 음악시장에서 락장르의 뮤지션이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경우는 없다. 잭 화이트데이브 그롤도 대단한 록 아이콘이지만 한 세대를 풍미했거나 시대를 바꾼 록 아이콘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2. 대중음악계 통틀어서 커트코베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이콘도 드물다. 롤링스톤지등 권위있는 평론가들이 꼽는 세기의 명곡에서 상위권에 항상 과거 50년대-70년대 명곡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는 80년대이후 곡들이 20위권안에 전멸할때 조차 항상 10위권 안에있고 비틀즈의 'yesterday'와 자웅을 겨룰정도이다.
  3. 기타는 왼손잡이용을 쓰지만 일상생활은 오른손으로 했다.
  4. 딸이 아빠의 눈과 엄마의 코를 닮았는데 그다지 미인은 아닌 코트니 러브를 더 많이 닮았다. 다만 록 스피릿은 둘다 닮았다는 평. 참고로 딸 이름은 코베인이 죽어라 좋아했던 스코틀랜드 인디 팝 밴드 더 바셀린즈(한국의 바세린하고는 상관 없다.)의 여성 보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5. 후에 너바나 다큐영화 '몽타쥬 오브 헥'의 어머니 웬디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당시 어렸던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고, 결혼후에도 가능한 빨리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6. 부모의 이혼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코트니 러브의 바람을 눈치채고 그녀와 이혼을 하려고 마음먹은 후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처럼 '마약중독자에다 이혼을 해서 자녀를 버린 아버지'로 여겨지고 그의 어린시절 모습처럼 딸이 자신을 미워할까봐 차마 이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코트니가 다른 남자들과(특히 빌리 코건) 어울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봤다고 한다.
  7.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8. 하지만 평전에 따르면 사실 커트 코베인은 그리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게 아니었고 너바나가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헤로인이나 코카인을 그리 쉽게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9. 생전에 쓰던 이펙터는 앰프 드라이브는 아예 사용하지 않고, 고작 보스 DS-1 디스토션과 Small Clone 코러스 이펙터 페달이 전부였다.
  10. 사실 너바나가 갑자기 팍 뜬 이유가 팝 메탈의 야들야들한 미들이 강한 기타톤에 질린 락키드들이 커트의 하이게인 디스토션 기타 톤에 열광함에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스래시메탈 밴드인 메탈리카가 너바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11.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버드 드와이어라는 정치인이 자살하는 비디오를 구해서 자주 돌려봤다고 한다.
  12. 실제로 마약문제는 그를 죽음까지 몰아갔던 적이 여러번 있었으며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너바나의 투어 중 로마에서 헤로인의 과도한 복용으로 뇌사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간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커트 코베인 사망설이 수도 없이 나왔었다.).
  13. 또한 Californication에서 코베인을 언급하는 가사도 있다.
  14. 위장병에 괴로워하는 커트에게 진통제로 헤로인을 사용해보라고 권유한 것이 코트니였고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위장 수술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었고 주위 사람들도 커트가 그렇게 행복해보이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코트니 타살설의 증거 중 하나로도 거론된다.
  15. 이 사람도 무시하면 안되는게 푸 파이터스1집은 거의 그가 원맨밴드 식으로 만든 앨범이다.
  16. 코베인 평전에 따르면 Nevermind 발매 전에 라이브로 공연했을 당시에는 관객들의 호응이 높아서 사실은 그도 이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히트곡으로 떠오르고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어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그러한 원인이 <Smells Like Teen Spirit>의 지나친 히트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점차 이 곡을 부르기 싫어했다. 심지어 어떤 공연에서는 커트가 <Smells Like Teen Spirit>를 부르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해 버린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공연에서 Teen Spirit만 듣고 공연장을 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다고. 다만 공연장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이었기 때문에 말년에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종종 부르기는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수록 자기모순이 심해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