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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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로시
(Paolo Rossi)
생년월일1956년 9월 23일
국적이탈리아
출신지프라토
포지션스트라이커
신장178cm
프로 입단1973년, 유벤투스
소속 팀유벤투스(1973-1975)
코모(1975-1976)
비첸차(1976-1979)
AC 페루자(1979-1980)
비첸차(1980-1981)
유벤투스(1981-1985)
AC 밀란(1985-1986)
헬라스 베로나(1986-1987)
국가대표48경기 20골
1982 Ballond'or
수상
파올로 로시
2위
알랭 지레스
3위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1 소개

아주리 군단을 44년 만에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풍운아.

장구한 월드컵의 역사에서도 대회 최고의 선수와 최다 득점자에 동시에 오르면서 팀까지 우승으로 이끈 인물은 매우 드물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이전까지 그러한 기록을 남긴 이들은 1962년의 가린샤와 1978년의 마리오 켐페스가 있었다.물론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조작, 매수, 협박의 대회로 최악의 월드컵이긴 하다 그리고 1982년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가 그 위업을 달성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선수도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다.[1]

2 킬러 본능

게르트 뮐러는 타고난 골잡이라 불러 마땅할 선수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할 뿐 아니라 어떻게든 볼을 골문 안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본능적인 솜씨를 지닌 사나이였는데, 이 뮐러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쯤, 이탈리아 축구에도 그에 비견될 만한 천부적인 골잡이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파올로 로시다.

로시는 어린 시절 유벤투스 유스 팀과 함께했지만 유벤투스는 무릎이 좋지 않았던 그를 코모로 임대 보냈고 결국 그는 1976년 세리에 B 클럽 비첸차에 둥지를 틀게 된다. 비첸차는 로시에겐 행운의 장소였다. 그 곳에서 로시는 윙어에서 중앙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또다른 기막힌 골잡이를 탄생시킨 출발점이 됐다.

1976-77 시즌 로시는 곧바로 21골을 터뜨려 비첸자의 승격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지만, 이는 그 다음 시즌 그가 세리에 A에서 24골을 잡아내며 비첸차를 2위까지 끌어올린 놀라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로시는 세리에 B와 세리에 A에서 연거푸 득점왕에 오른 최초의 선수가 되었고, 이는 훗날 유벤투스의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가 2007년과 2008년 세리에 B와 A에서 연속 득점왕이 되기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거액을 들여 로시를 완전 영입한 당시의 비첸차는 ‘레알 비첸차(Real Vicenza)’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3 인상적인 데뷔

그 후 로시는 엔초 베아르조트가 이끄는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 팀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로시의 활약은 관점에 따라선 4년 후보다 낫다고 여겨질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사실 82년 월드컵의 로시는 여러 모로 부침이 있었기에).[2]

이탈리아 대표 팀에서 로시는 유벤투스 선수들인 로베르토 베테가, 프랑코 카우지오와 매우 훌륭한 호흡을 과시했으며 특히 자신의 옛 포지션인 측면 위치로 돌아 나아갈 경우에도 좋은 플레이를 펼쳐보였다. 로시는 1차 조별 리그에서 첫 경기 선제골, 두 번째 경기 선제골, 세 번째 경기에서 이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에게 맞서 1:0 승리를 일궈내는 어시스트를 연결하며 3전 전승을 이끈다.

그러나 2차 조별 예선에서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배정되어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선 그 경기 유일한 득점을 뽑아내지만 당대 최강팀들인 독일과 네덜란드를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이 대회의 로시는 활발한 움직임과 정확한 패스에 의한 어시스트들을 비롯, 이탈리아의 공격을 화끈한 것으로 만드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상술했듯 로시가 전체적으로 골의 거장 게르트 뮐러 계열의 선수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1978년의 로시는 조금 더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첫 월드컵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4 불명예스런 징계

1979년 비첸차가 강등을 당하자 로시는 페루자 임대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시의 축구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1980년 AC 밀란, 라치오, 볼로냐, 팔레르모, 페루자 등이 연루된 축구 도박 스캔들, '토토네로 스캔들'이 이탈리아를 뒤흔들었고 이 사건에서 로시는 뇌물 수수 혐의로 3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에 처해진다(후에 이것은 2년으로 경감됐다). 이탈리아 축구의 새로운 희망은 이렇게 그라운드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됐다.

5 역적에서 영웅으로

1981년 유벤투스로 소속을 옮긴 로시는 월드컵 직전인 1982년 4월 29일 징계로부터 돌아온다. 2년이라는 기나긴 공백이 있었으나 대표 팀 감독 베아르조트는 로시를 신뢰했다. 그와 동시에 베아르조트는 80 유로에서 공격수 가뭄을 실감했기에 로시가 아니고서는 이탈리아가 우승할 수 없다는 확신하에 로시를 발탁하고, 그가 주전이 될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이탈리아 전역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대표 팀이 1차 조별 리그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이라는, 요즘 말로 하자면 꿀 조에 배정되었음에도 3경기에서 단 두 골만을 터뜨리며 3무로허정무 똥줄을 태우며 진출하자 베아르조트에 대한 언론의 비난은 점점 더 거세졌다. 특히 실전 감각이 부족한 로시가 세 경기 동안 한 골도 터뜨리지 못한 것도 모자라 경기장 안에서 행방불명되며박주영 부담을 가중시켰다.

언론의 공격에 맞서 베아르조트는 언론 접촉을 아예 차단하고서 2차 조별 리그를 준비했다. 간신히 1차 리그를 통과한 이탈리아는 최강으로 평가받는 브라질,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를 이뤘다. 언론은 형편없는 용병술 끝에 꿀 조에서 1위를 차지 못하고 죽음의 조에 배정되었다며 베아르조트에게 십자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 십자 포화 속에 디노 조프를 위시한 이탈리아 선수단은 오히려 단단하게 결속되며 이러한 정신적 무장은 실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브루노 콘티,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등이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와 4년 전 우승 멤버들이 포진한 아르헨티나를 압살하며 2-1 승리를 거둔 것. 하지만 2:1은커녕 3:1, 4:1도 나왔을 법한 이 경기에서도 그렇게 4:1을 만들어줬어야 할 로시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그대로였다.

이제 득실에서 이탈리아를 압도해서 비기기만 해도 진출하는 브라질과의 경기가 남았다. 이 경기에서도 로시가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경기한다면 향후 이탈리아 선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었다.

82년 브라질이 얼마나 대단한 팀이었는가. 지쿠, 소크라테스, 파울로 로베르토 팔카오, 토닝요 세레조의 황금 4중주로 대표되는 브라질은 우승 전력을 넘어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나 펠레의 브라질, 지단의 프랑스 같은 최강의 전력을 갖춘 팀 중 하나로 회자될 만한 전설적인 팀으로, 이탈리아와 경기 이전에 밥 먹듯 독일, 프랑스, 영국,스페인을 포함 24경기 무패 행진을 하며 패배를 모르던 무패의 팀이었다. 이미 이전 조별 리그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훨씬 아름답고 완벽하게 분쇄하는 경기를 선보였으며 이탈리아가 4경기에서 4골을 넣을 동안 그들은 13골을 퍼부었다. 간신히 승리해온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황금 4중주 브라질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나, 그 모든 예상이 부질없게도 경기를 쥐고 흔든 건 다름 아닌 파올로 로시였다.

안토뇨니의 절묘한 패스가 오버래핑하던 카브리니에게 연결, 그리고 크로스가 로시의 머리에 닿으며 5분 만에 선제골이 터졌다. 브라질은 소크라테스와 지쿠의 2:1 공격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로시가 브라질 수비진에게서 공을 낚아채며 재차 골을 성공시켜 2:1로 전반을 마친다. 후반전 브라질의 집중 공세 속에 팔카오가 2:2를 만들어낸다. 그러자 경기 분위기는 다시 뒤바뀌어 브라질은 걸어잠그고 이탈리아가 두드리는 형국으로 변한다. 결국 승부는 세트피스에서 갈리는데, 코너킥 찬스에서 로시가 득점, 해트트릭으로 3-2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의 이탈리아는 파죽지세였다. 로시는 준결승 폴란드전에서도 두 골을 터뜨렸으며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후반전 0-0의 균형을 깨뜨리는 선제골을 기록, 이탈리아는 1934년, 1938년의 2연패 이래 거의 50년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거쳐 월드컵 대관식을 치른다. 결국 1982년 월드컵 최후의 승자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지쿠도, 마라도나도, 미셸 플라티니도, 칼 하인츠 루메니게도 아닌 2년 징계로부터 돌아온 불후의 명성을 남긴 로시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축구계의 지명도나 후세의 선수 평가로 따지면 결국 저 4명이 파올로 로시보다 앞서 있긴 하다 로시는 이 활약을 바탕으로 82년 발롱도르까지 거머쥐기에 이른다.

6 짧은 경력, 큰 업적

1982년 월드컵 이후 로시는 유벤투스에서 젠틸레, 타르델리, 안토니오 카브리니, 가에타노 시레아 등의 대표 팀 동료들, 그리고 플라티니, 즈비그에프 보니에크 같은 월드컵 스타들과 더불어 활약하면서 크고 작은 트로피들을 계속 들어올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헤이젤 참사’가 발생했던 1985년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꺾고 차지한 유러피언 컵은 로시의 클럽 축구 인생 최대의 트로피로 기록된다. 이후 그는 밀란으로 이적해 1985-86 시즌 ‘밀란 더비’에서 두 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로시는 86년 월드컵 한국전을 대비한 소림축구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입게 되고 월드컵에 참가하지만 경기에 뛰지 못하게된다. 황선홍, 시세보다 먼저 소림축구의 희생자라니

잦은 부상 덕에 결국 로시는 31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택하게 됐다. 그러나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파올로 로시는 결코 잊지 못할 위대한 골잡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브라질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1. 그나마 가장 비슷한 활약을 한 선수는 2002년 월드컵 때의 호나우두로 자국을 우승시킴과 동시에 골든 슈를 받았다. 하지만 대회 MVP는 올리버 칸에게 아쉽게 밀려 실버 볼에 그치고 만다.
  2. 이는 어쩌면 로시의 비첸차 후배 로베르토 바조(바조의 경력이 시작된 곳이 3부 리그 비첸차)의 경우와도 다소간 유사성이 있다. 절묘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터져 나왔던 바조의 골들이 1994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결승으로 이끈 원동력이기는 하더라도, 그 이전 1990년 월드컵에서 더 젊은 바조가 펼쳐 보인 활약 또한 실로 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