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궁

豊慶宮

1 개요

평양에 있던 대한제국의 이궁(離宮). 광무 6년(1902)에 평양을 제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던 고종 황제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정전인 태극전(太極殿), 편전인 지덕전(至德殿), 동궁전인 중화전(重華殿)과 정문인 황건문(皇建門)이 있었고, 고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그 후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평양에 들어와 평양궁을 점거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풍경궁의 주변은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결국 정작 고종은 단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비운의 궁궐이기도 하다.

이후 1907년에 풍경궁은 일본에 의해 근대식 병원인 평양 동인의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철도 부설 중에 상처입은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에는 풍경궁의 관제(官制)가 폐지되었고, 봉안되어 있던 어진은 덕수궁 정관헌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인 1913년에는 평양 자혜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3년에는 풍경궁의 서쪽에 근대식 병원 건물을 새로 짓게 된다. 1933년에는 자혜의원이 평양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고, 지금은 북한의 평양의학대학이 이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물론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같이, 풍경궁도 훼손을 피할 수 없었다. 1925년에 경성 대화정 조계사(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식 절. 지금의 조계사와는 다르다.)의 요청으로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을 경성으로 가져가 조계사의 산문으로 삼았다. 그래도 사진과 평양의 지도 등을 보면 풍경궁의 주요 건물과 행각 등은 1935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아있었지만, 이후 한국전쟁 때 송두리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2 황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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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의 황건문. 훼손이 심하다.

황건문(皇建門)은 원래 풍경궁의 정문이었다. 크고 시원하게 뻗은 기둥들의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았다. 1925년에 일본사찰이었던 경성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니 주의)에서 이 문을 사들여 산문으로 쓰게 된다. 이 은 지금의 동국대학교 서울 필동 캠퍼스 자리에 있었다. 1926년 8월에는 폭우로 인해 황건문 지붕이 반이 붕괴되어 당시 돈으로 2천만원의 피해가 났다.

해방 이후 이 대화정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건립되고 황건문은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71년 학생회관이 옆에 신축되면서 현대식 건물과의 부조화와 유지보수부실로 인해 학교당국에서 해체/철거하였다. 이후 주춧돌마저 도서관 근처로 치워지고, 현판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게 유일한 풍경궁의 건축은 우리 손으로 폐기물이 되어 사라졌다. 동국대학교의 흑역사 중 하나.

도쿄대학이 에도막부시절의 아카몬을 잘 유지해서 대학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안일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