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수

틀:12.12의 주역들


許三守
1936년 09월 18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정치인이다.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요셉이다.

1936년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육사 동기이기도 한 김진영과 김진영의 소개로 알게 된 허문도와 고교 동창이다.[1] 이후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수료하였다.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김진영, 허화평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허화평과 단짝이었다.

1979년 10.26 사건12.12 군사반란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대령)이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가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하였다. 1980년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1980년 9월 대통령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허화평,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렸다. 그러나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허화평 등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이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것이 허화평과 허삼수의 권력이 지나치게 세다는 지적이 있어서 1982년 12월 사정수석비서관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체류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설욕하였다..[2]

그러나 1996년 김영삼 정부의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관련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으로 기소되었다. 같은 해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고등학교 후배인 신한국당 정의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5.18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 특사로 전두환 등과 함께 석방됐다.

출소 이후 내란 전과로 인해 중지된 연금을 지급해달라고 장세동, 정호용 등과 함께 국가에 소송을 제기한 바 있으며, 같은 이유로 서훈이 취소된 훈장 역시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있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민주정의당43,986 (42.3%)낙선 (2위)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민주자유당59,894 (63.6%)당선 (1위)1996년 신한국당 탈당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중/동)무소속26,827 (27.1%)낙선 (2위)
  1. 고교동창이라고 무조건 옛날부터 안면식이 있던 사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수정예 학교가 아닌 이상 3년동안 전교생 얼굴을 다 알고 졸업하는 것도 아닐 테고. 제5공화국에서는 절친으로 묘사되었다.
  2. 이때 김영삼은 "반란군 총잡이"라며 허삼수를 몰아붙이던 13대 총선에서와 달리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는 그를 "충직한 군인"이라고 치켜세우며 허삼수의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YS, 그의 미친듯한 깜짝쇼가 그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