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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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16대17대18대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99 - 국경 없는 의사회김대중2001 - 국제연합, 코피 아난
대통령 기록관 존영[1]
이름김대중(金大中)
출생지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現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본관김해 김씨
출신정당한국민주당민주당민중당신민당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2002년 탈당)
종교로마 가톨릭(세례명 토마스 모어)
부모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
형제자매2남 2녀 중 장남
자녀슬하 3남
영부인이희호
생몰년도1924년 1월 6일[2] ~ 2009년 8월 18일 (85세)
재임기간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이니셜DJ
서명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자 기업인 출신 정치가, 민주화 운동가이다. 신문사 사장(언론인)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동시기 민주화운동에 함께 힘쓴 정치인인 김영삼, 반대편에 있었으나 정권창출의 동반자가 된 김종필과 묶여 3김으로 유명했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당선되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임기중인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전부터 김대중은 이미 군사독재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가로 국제적인 인지도가 있는 상태였다.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손상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사망하였다.

재임 기간 및 정부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을 참조.

호는 후광(後廣)이며,대중들에게는 이름 영문자 이니셜을 딴 약칭인 'DJ'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원래 한자 중은 仲이었으나[3]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中으로 [개명하였다.]


2 생애

2.1 유년

일제강점기인 1924년 1월 6일에 전라남도 신안군(1969년 무안군에서 분리되기 전)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김운식과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4] 창씨개명을 한 뒤의 성명은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이다.[5] 1939년 4월 5일, 일본인들을 제치고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입학하였다.[6]

전시 특별 조치로 인하여 1943년 12월 일찍 졸업을 하게 되었고 전문학교를 다녀 대학에 진학하는 길,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일 두가지 진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일찍이 김대중은 한국인들에게 문호를 연 대학 중 장학제도가 제일 나은 만주의 건국대학[7] 응시해 합격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던 시기라, 일제가 조선인 징병령을 내려 당장 1년 뒤에 징집되어 전선에 나가야 할 판국이었다. 건국대학에 진학을 한다고 해서 면제나 징병 연기가 되는 것도 아니었던 고로 일제의 징집을 피해 해운회사에 취업하여 경리 담당 사원으로 일했던 것. 당시 일제는 전시체제였고, 해운회사들도 군의 물자수송에 동참했기 때문에 관련직종자들을 징집하지는 않았다.[8]

8.15 광복 이후에는 목포 상선 합동 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1945년 8월 19일 선 정부구성론[9] 주장한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원으로 참여, 목포 신민당 지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선 정부수립 >> 노선문제였던 당초 의도와 다르게 좌경화 움직임을 보이자 이듬해 2월 탈퇴하였다.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져, 공산주의계열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정황이 있으나, 소련을 추종하는[10] 무리들과 갈등이 생겨 얼마안가 탈당한다.목포파출소 습격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한국민주당원이었던 장인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소련에 대한 충성으로 기울어진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조국 소비에트 만세, 붉은 깃발만이 우리의 진정한 깃발이란 말을 하곤 해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나의 반발심은 그들의 미움을 샀고 나는 그들로부터 떨어져나오게됐다.
-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으로

2.2 청년사업가

1946년 여름 좌익과 결별한 뒤에는 1947년 배 한척을 가지고 목포해운공사[11]로서 사업, 50~70톤의 선박 여러척을 보유, 운영하게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철수해 처형은 면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한테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집에 은둔한다. 탈출길도 굉장히 험난했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이 인생에서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민족 간 전쟁으로 학살을 하는 모습, 이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 학살하고 증오를 뿜어대는 모습이 이후 그의 모토가 된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강력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50년 10월부터는 선박 두 척을 수리하여 사업을 재개하게 되었고 목포일보를 인수해 1952년 3월까지 사장으로 재임하였다. 사장직책으로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적, 물적 여건이 부족했던 만큼, 김대중도 직접 취재를 나가 중요한 내용을 적어 오곤 했으며, 사설을 직접 작성해 내보내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버릇들인 받아적는 습관이나,[12] 취재기술, 신문의 변두리칸 소식까지 꼼꼼히 살피는 습관 등은 측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만큼[13] DJ의 정치인생을 형성하고 대변하는 바탕이[14]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사업가 출신"이라기 보단, "언론인 출신"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상방위대 전남 지구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대한민국군의 군수 물자를 해상 수송을 수행하기도 했다. 전남지구 해상방위대(목포해상방위대)[15]는 한국 전쟁 당시 송인명 목포 경비부 사령관의 지시로 창설되었다고 하며 전쟁 중에 약 1년(1950~1951) 동안만 유지된 보조 기관이다. 해상 방위대는 목포 경비부 기구표상에는 없으나 해군목포경비부 연혁사 제39쪽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회의에서는 송인명의 증언과 당시 국방부 자료를 제시한 바 있다.
[DJ가 공비소탕지원 및 해상보급 지원에 나섰음을 알리는 공보자료.]
[당시 제기된 의혹과 이에 대한 반박]
당시 김대중 후보는 이 해상방위대 활동을 근거로 [일선에서 싸웠다]고 말하며 본인의 사상 의혹을 지우고자 노력했다. 이를 두고, 목포해상방위대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상선들을 이용해 후방 보급을 하는 보급부대라는 비판뒷북이 일었으며, DJ가 타계한 후에는, 모 사이트 이용자들이 [한 술 더떠 이런 합성 짤을 제작해 유포하는] 등 선을 넘어가는 인신공격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 김대중 자서전(나의 삶 나의 길, 2000)에 나온 [정치입문기 사진](책은 65쪽)과, 연설하는 사진, 그리고 시중에 떠도는 군함기동 사진 일부를 가져다 합성해, 최소 2010년 무렵 인터넷에 최초 업로드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환한 김대중은 훗날 이 동족 상잔의 비극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6.25 동란 때, 저는 서울에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공산당이 그렇게까지 잔인한 줄을 몰랐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공산당 얘기를 하면 자기들이 쫒겨 내려와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을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 25 동란때문입니다. 6 25때에 공산당이 인민재판을 하고 숙청을 하고 또 농촌에 가서는 감 한 개까지 옥수수 한 개까지 세고 벼이삭까지 세서 세금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고, 게다가 길거리 좌판에 담배 몇 갑 놓고 파는 사람들한테까지 매일 세금을 걷어가는 짓을 했습니다. 나중에 쫓겨서 북으로 올라갈 땐 대량학살까지 했습니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이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그 정도가 북쪽이 훨씬 더 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남한사람 모두가 진짜 반공으로 돌아섰습니다. 오늘날까지 반공체제를 지탱해온 것도 안기부나 경찰의 노력보다는 그때의 산체험이 강력한 반공의식을 심어준 덕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한길사, 1994

2.3 계속되는 국회의원 낙선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40년 동안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는 누구든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그후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당시 김대중은 해운 회사를 설립하고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사장을 지내면서 사설을 즐겨 쓰곤 했는데, 그 내용은 특히 농민이나 근로자, 혹은 실업자의 구제문제에 있어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 시기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에 <한국 노동 운동자의 진로>를 기고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선거구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지만 민주국민당 정중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자 이듬해 상경하였고, 1955년에 야당 정치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1956년 9월 25일 민주당 신파에 입당한다.

3년 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국회 의원에 출마하려 했다가, 자유당이 중복추천을 해 등록 무효를 시킴으로써 출마조차 하지 못한다.[16] 이에 김대중은 대법원에 제소하고 1959년 승소, 인제 국회의원인 나상근이 당선무효되어 1년후 재보선에 다시 출마했지만 또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하고, 같은해 7월에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인제군 후보로 출마하지만 또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이 와중에 부인이(차용애 여사)[17]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지켜본 장면 전 국무총리가 60년에 DJ를 대변인으로 발탁해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2.4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

자유당 소속 인제군 전형산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로 인한 이유로 자격이 박탈당함에 따라 1961년 인제군 선거구에서 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김대중은 여기서 드디어 민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이틀 뒤 5.16 군사정변이 발생해 국회가 해산된다(...)

1962년 이희호 여사와 결혼하였다.[18] 참고로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이 아깝다고 통탄했다고(...).[19]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처음으로 의정 활동을 하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일기본조약 당시 온 야당이 가두 투쟁과 반대 운동을 준비할 때 실익을 따져 할 협상은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당대에는 부친으로부터 걱정 어린 편지를 받을만큼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재평가할 여지가 있는 대목.

1964년 당시 야당인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공화당 정권이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 1억3000만달러를 들여와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상정했고, 이 때 김대중이 필리버스터 의사 진행 발언에 나섰다. 그는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한일 협정의 잘못된 점,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결국 구속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20]. 이 일로 초선임에도 정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분과 활동에서도 명문대학 출신의 동료 의원들에 뒤쳐지지 않고자 연구활동에 진력하며, 당의 중진인 유진오 박사[21]에게 인정 받아, 당내에서도 입지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악재[22]에도 불구하고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23]

마침내,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에 동참해, 1970년에 치뤄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여기에서도 만인이 후보가 되리라 예상하던 김영삼을 꺾고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2.5 최초의 대선과 진산 파동

7대 대선 후보 시절 연설하는 모습.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습니다. 5·16은 군대가 저질렀습니다. 이제 오는 4월 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 전 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우리가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7월 1일은 청와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입니다. 서울 시민 여러분, 7월 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71년 '장충단공원 연설'중에서)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했는데 결국 둘 다 현실이 된다. 총통제는 10월 유신으로, 그리고 이렇게 되면 당사자가 권좌에서 내려오기 전까진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겨우 2~3개 시군 차이까지(95만표) 추격하는 저력을 보여준 DJ는, 비록 낙선했지만 부유세 부과, 한반도 4대국 안전보장론(후일의 6자회담), 예비군 폐지 등의 공약과 미국의 대선 캠페인을 차용한 선거 운동을 전개해, 사람들이 잊기 힘든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역시 젊고 경쟁력있는 후보 김영삼과 함께 군사 정권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고생길이 열리게 되었다. 약 95만 표(8% 차이)였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패배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조선일보에서 선거 다음날 게재한 기사에, "관심은 높았지만 투표율은 낮았다."(=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자기 의견을 정직하게 나타내지 않는 습관은 지양해야 한다."는 표현을 내보냈을 만큼, 관권의 조직적인 개입이 (노골적으로) 있었는데도 이 정도였던 것.[24].[25]

얼마 뒤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며[26] 선전한 것도 전국구로 옮긴 대신 전국을 누비며 지역구 선거를 도운 김대중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이 기간 광주-목포 간 1번 국도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보좌관이 세상을 떠나고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1971년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자신의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는 이른바 진산 파동이 터진다. 당내 소장층은 유진산에게 당수 사퇴를 요청하고, 당수 사퇴 불가를 주장한 민주당 구파 계열들과 충돌을 맺었고 유진산은 사퇴한다. 여기서 '당수 권한 대행직'을 놓고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와 김영삼,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주류가 충돌하게 되었는데, 김대중은 자신이 당수 권한 대행직을 맡겠다고 주장했다. 중재안으로 김홍일이 당수 권한 대행직을 맡으며 진산 파동은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선거를 앞두고 많은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신민당은 김대중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공천하였다. 결국 김대중도 당선되고, 신민당은 제1야당이 되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다. 더 이상 선거로 집권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박 정권은 최후의 방법 '[[10월 유신|]]' 을 쓴다

2.6 유신 시대

“캄캄한 밤이라도 내일 아침이면 태양이 반드시 다시 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이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나에게 유일한 영웅은 국민이다. 국민은 최후의 승리자이며, 양심의 근원이다. 나는 이런 신념하에 살고 있다.”
1972년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도쿄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유신 소식을 듣고 미국 망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 1년간 일본과 미국 각지에서 기자 회견과 연설을 통해 반유신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1년도 안되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한다.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 납치사건 문서 참조.

박 정권은 김대중을 납치에서 풀려난 그 다음 날부터 집에 가두었다. 기약 없는 가택 연금의 시작이었다. 서울 동교동 집을 빙 둘러 경찰 병력이 에워쌌다. 골목 어귀에는 여러 개의 감시 초소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는 외부인의 동교동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가족들의 전화 사용도 금지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셋째 아들이 등교할 때도 감시 요원들이 따라붙어 미행했다.

가택 연금 속에서도 반유신 투쟁은 계속되었다. 1976년 명동 성당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1978년 12월 가석방되었다. 1979년 3월 4일, 윤보선의 자택에서 재야 세력의 연대 투쟁 기구 연합체인 국민 연합을 구성하고 윤보선·함석헌과 함께 3인 공동 의장에 취임한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총재 후보로 지지하였다. 얼마 안가 10.26 사건이 터지고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다.


2.7 투옥 시기

내란 음모 사건으로 투옥된 김대중

1979년 12월 9일 최규하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밝힘에 따라 김대중 역시 가택 연금 상태에서 벗어났다. 김대중은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김종필, 신민당을 지키고 있던 김영삼과 더불어 유력한 대권 주자로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각 세력은 규합하지 못했고,[27] 12.12 군사반란을 통해 박정희의 친위 군부 세력이었던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김대중을 내란 음모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28]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참조. 다음날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그 결과는...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김옥두, 김상현 등 김대중의 측근들은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벙커로 연행되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으며, DJ 자택에 방명록을 남겼던 전남대학교 복학생 정동년까지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도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며, 심신의 고통(부친이 자칫 역적이 될 수 있으니)을 견디지 못하고, 책상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29]

이러한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군사 재판의 결과,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미국의 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30] 김대중에 대한 사형이 집행될 경우 양국 관계에 파국이 올 것이라고 거세게 압박했고,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서한을 보내어 선처를 호소했다.[31]

또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미국의 레이건 신정부를 통해] 신군부를 압박[32], 여기에 정당성을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자 했던 정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1981년 1월 DJ는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82년 12월, 무릎이 좋지 않은 김대중의 신병치료를 명분으로 5공 측에서 다시 미국 출국을 권유(?), 정권의 요구에 따라 전두환에게 편지를 쓰고[33] 2년 간의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85년 2월, 대한민국 국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직전에 정치 규제에서 풀린 수많은 야당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한다고 하자, 김대중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2년 전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 후 귀국하다가 공항에서 암살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가에서는 김대중의 암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강했다. 따라서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김대중의 안전 귀환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를 무산시키겠다고 재차 압박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없었던 미국의 몇몇 의원들과[34] 저명 인사들이 김대중의 귀국길에 자진 동행하였다.

김대중이 김포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곧바로 나타나 김대중을 연행했다. 그리고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에 연금해버렸다. 김대중의 귀국 덕분에 며칠 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제1 야당으로 올라섰다.

이러한 민의에 힘입어 신한민주당의 총재였던 이민우가 김대중에 대한 사면 복권을 요구하자, 김대중에 대한 가택 연금은 곧 해제되었다. 다만 사면, 복권은 5공측에서 격렬히 반대하면서 무산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정당 복귀는 늦어졌고, 그 대신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추진 협의회 공동 의장에 취임하여,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식으로 정치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화 추진 협의회에 참여하고 신한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대중이 김영삼과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사사건건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김상현과 갈등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거나, 1985년 11월 민주정의당정동성 의원이, 김대중이 미국 망명 당시 올린 글을 폭로하면서 문제 삼는 등 이미지 타격을 노린 집요한 반대 공작이 이어졌다. 김대중 직선제 반대발언 모함사건 참조.


2.8 거듭되는 대선 도전과 낙선

김대중의 역대 대통령 선거별 포스터. 좌측부터 7대 - 13대 - 14대- 15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35] 제5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민주화 가능성이 열리자, 김대중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또 다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다. 사실 이때 양김에 대해서는 단일화의 요구가 강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무산되었다. 지난 7~8년의 세월 동안 제명, 투옥, 가택연금, 언플 등으로 정치활동 제약을 받다가, 선거 국면에 해금된 양 김이 모두 대권출마 의사를 밝혔던 것."출마=당선"을 확신하고 있었던 두 사람은 후보단일화 협상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결국 온 국민의 열망을 저버리고 양 김은 결별, 단독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36] 김대중을 평생 아프게 꼬집었던 단어 중 하나인 대통령병 환자가 이 무렵에 나온 말..[37]

이렇게 지지층이 겹쳤던 양 김이 모두 출마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점점 군사독재를 심판, 평가하는 자리가 아닌, 지역 간의 이권과 예산[38]의 "기득권 싸움" 성격이 가미되어 갔으며,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지역대결 구도[39]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DJ는 4자 필승론을 내세워 호남을 결집시킨 뒤 격전지 수도권에서 이기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고 수도권에 공을 들였으나, 경기지역 민심은 여권의 노태우에게 가장 많은 표를믿음을 주었으며, 결국 김대중은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두 동지의 대립으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역대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는 이변(?) 이 일어난 것.

하지만, 그 해 4월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은 서울과 호남을 석권해, 제1 야당이 되었으며, 정대철, 조세형, 박상천, 신기하, 이해찬, 이상수, 조윤형, 한광옥 등 평민당 국회의원들은 당시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민주화 정국을 주도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 갈등 대신 여-야 간 협력의 온건노선을 선택함에 따라, DJ는 제1야당 당수로서,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정부에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었다.[40]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로 여소야대 → 여대야소 국면로 판도가 달라지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합당제의를 거절한[41] 김대중에게, 강해진 여당이 손을 내밀만한 여지는 이제 거의 없었던 것. 물론 4.19의 상징적인 인물인 6선의 이기택 의원이나, 유능한 법률가이자 영남권의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노무현[42] 등 8명의 통민당 의원이 3당 합당에 반발해 김대중 지지를 선언하고 합류하는 인적 소득도 있었지만,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라이벌 YS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이미 예순아홉의 고령이었던 DJ는 아내 이희호 여사와 함께 쓴 정계 은퇴선언문을 읽었으며, 이듬해 1월 영국으로 출국하였다.


2.9 4수 끝의 당선

1993년, 90%를 넘을만큼 강력한 국민지지를 받는 문민정부였지만, DJ에게도 새로 출간한 책[43]이 65만부가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되고, 1994년 5월 긴장 일로에 있었던 대북 문제에 대해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국제적으로 알려져 이북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지미 카터)의 중재 필요성"을 역설하여 6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및 7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44] 가게 되어 국내 여론과 클린턴 정부의 주목을 받았으며, 11월 중국 방문에서 권력 서열 4위 리루이환(李瑞環)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을 만나 국빈에 준한 예우를 받는[45] 등 의미있는 사건이 연이었다. 이렇게 오히려 은퇴 전보다 더 호의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은 DJ는 정계복귀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임동원을 실무 책임자로 하는 아태재단을 설립해, 젊었을 적부터 관심을 둔 통일 연구에 매진하는 한 편, 모친상을 당한 박태준 포항제철 전 회장에게 아태재단 명함을 지닌 이동원 의원을 보내 조문하도록 하였다. 또한 최양락, 이원승, 손숙, 정한용 등 문화계 인사들과 만남을 자주 갖으며 얘기를 들었으며, 이들의 작품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DJ에게 호감을 갖는 문화계 인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46]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공부나, 은퇴한 "서태지의 복귀에 힘써달라."며 편지를 보낸 팬클럽 회원들에게 [정성들인 편지로 답했던 것도](CD 아래부터) 이 시기의 일.

1995년은 제1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1995.06.27)가 실시되는 뜻깊은 해였으며[47], 이미 지방선거전에 돌입한 민주당 지지선언을 하며 정계복귀를 타진하던 김대중에게는 중요한 시험대가 된 해였다. 이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해 제1 야당의 지위를 다진 한 편, 같은 시기, 대선승리에 기여하고도 자의반 타의반 민주자유당에서 나오게 된, JP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승리하며 재기해, 정국의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1995년 7월 18일, 마침내 은퇴를 번복하고[48] 정계복귀를 선언했며, 동년 9월에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49][50]해 본격적인 대선행보를 시작하였다.

신당에는 천용택, 이동원, 임동원보수 진영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였으며[51], 미국 클린턴과 영국 블레어 등 정권교체 성공 사례 연구가 반영된 'New DJ Plan'으로 보수-진보 양 표심을 공략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97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 때, 경제문제가 부각될 것임을 포착해 말단 당원부터 간부들까지 경제얘기를 자연스레 꺼낼 수 있을만큼 경제지식을 늘리고, DJ 본인도 경제관련 책을 다시 쓰면서 관련공부에 매진하였다.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예상보다 부진하였으나,[52] DJ는 "큰 싸움(대선)에서 이기면 된다"는 요지의 발언으로 분위기를 다잡았으며, 1995년 말부터 분위기가 있었던 김종필과의 연대가, 1997년 7월에 최종 성사, DJP연합이 탄생하였다.

당시의 여당인 신한국당은 97년에 연이은 악재(정초 노동법 날치기 통과, 한보그룹 부도, 7월 기아자동차 사태, 11월 IMF 사태)로 인하여 지리멸렬한 상태였던 반면, 김대중의 지지율은 고공 행진하며 대선 후보들 가운데 1위 자리를 2년 연속 고수하고 있었다. 여당 후보로 뽑힌 이회창이 한 때 조순 등을 영입하고 새롭게 한나라당을 창당하며 무섭게 추격하였으나, 이인제가 경선에 불복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팀킬 단독 출마로 여권의 표를 분산시켜 준 덕에, 결국 김대중은 한나라당이회창 후보를 이기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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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대중 후보는 보수층의 표를 얻기 위하여, 내각제 시행을 조건으로[54] 정적 김종필과 연대하였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55] [관련 기사]을 공략으로 내세우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상당수가 영남 출신인 와중에[56] 유일한 호남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당선되었다는 점, 그리고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취임식에는 마이클 잭슨[57] 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2.10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시절

2.10.1 외환 위기 극복 및 경제 성장

김대중이 취임했던 1998년 2차 3월 초반 대한민국1997년 겨울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그야말로 충공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고강도의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58] 14만 명의 공공부문 인력을 감원하는 등[59] 공공 부문을 개혁하였으며, 외환 보유고를 확충하고 물가를 관리하는 등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차근차근 시행하였다.

특히 IT 산업과 문화 산업 등을 장려하여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상당 부분 전환하고 한류를 일으킨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기업 재무 구조를 개선하고, 금융에 보다 더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60] 그리고 재임 초기 IMF 측이 권고한 고이자율 정책[61][62]을 시행하는 한 편, 적극적인 외자 유치 정책을 병행하여 저축과 투자를 늘렸고, 생산과 고용이 다시 늘어나게 하였다. 그 결과 1998년 - 6.9%이었던 경제성장률이 그 이듬해이던 1999년에 9.5%, 2000년에는 8.5%까지 급격히 상승하였고, 8년 연속 적자이던 무역 수지는 1998년 390억 달러, 1999년 239억 달러, 2000년 118억 달러, 2001년 93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다.

그에 힘입어 2001년 8월에는 IMF 구제 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였다. 외환 위기가 발생한지 겨우 3년 8개월, 그러니까 취임 후 겨우 2년 6개월 만에 외환 위기를 극복한 셈이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악의 외환 위기였다.[63] 그리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은 이러한 외환 위기를 거의 극복하지 못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는 외환 위기로 인해 급격히 후진국으로 추락해왔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외환 위기를 세계 최단 기간에, 그것도 가장 모범적으로 극복하였다.[64]

2001년2002년에는 이자율을 낮추고 물가를 잘 관리하면서[65] 안정적인 경제 정책을 유지하였다. 2001년에는 경기가 좀 침체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경제성장률은 4.0%를 찍었으며, 2002년에는 경제 성장률이 무려 7.2%를 기록했다.

김대중 재임 기간에는 특히 수출이 많이 늘어났다. 그 결과, 1998~2002년에 경상 수지 흑자는 무려 906억 달러나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 1천 400만 달러로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많았다.[66]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관해 경제적 관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해당사항은 김대중/평가 문서에서 '외환위기 극복과정의 극약처방들' 항목 참조.


2.10.2 외교 & 대북 관계

외교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북 외교에 있어서 운신의 폭을 넓혔고, 결국 현대 그룹 회장 정주영을 앞세워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성공했다. 특히 1998년 6월, 83살의 정주영 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육로로 강원도의 고향까지 간 일은 당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드디어 남북 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후로 남북 경제 협력은 확대되었고 2000년 6월 15일에는 남북 정상 회담이 실시되었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 간에 회담이 열린 것이었다. 그 회담에서 결의된 6.15 공동선언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한 것이었는데, 이는 여태껏 남한을 미국의 괴뢰 정도로 보아 동등한 대화상대로 여기는 것조차도 거부하던 북한이 드디어 남한을 동등한 대화상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고, 남한 역시 북한을 흡수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협력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북한은 적화통일을 포기하고, 남한은 흡수통일을 포기하며, 남북한이 앞으로 공존과 화해, 그리고 협력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67]

2000년 10월에는 북한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뒤 이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으로 북한과 미국이 북핵의 완전한 제거 및 북미 수교를 논의하는 성과를 도출했다.[68] 이러한 평화 외교에 대한 노력,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아, 2000년말 김대중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재임 중 측근이 불법적으로 북한에 세금을 송금한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하여 비판이 있다.

물론 김대중 정권 집권기간 동안에도 수차례에 걸쳐 북측의 무력도발이 감행되었다. 그러나 1999년 이후에는 제1차 연평해전과 제2차 연평해전 외에 이렇다 할 도발이 없었고, 그 연평해전조차도 연평도 해역의 군사지리적 특수성때문에 일어난 측면이 컸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어쨌든 북한으로부터 입사과라도 받아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말부터 출범한 조지 워커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의 여파로, 다음의 노무현 정권기에는 북한이 기존의 약속을 뒤집고 핵실험을 강행하기에 이른다.[69] 또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햇볕정책이 후퇴하자,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중 박왕자 씨 피격 사망 사건, 2009년 11월10일 서해교전(대청해전), 2010년 3월 26일 백령도해상에서 천안함 피격침몰사건, 2010년 11월 23일 북한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햇볕정책과 대북관계에 대한 논란에 관해서는 햇볕정책 항목 참조.)


2.10.3 임기 후반기의 외교적 악재

2000년 11월에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2001년 1월에 백악관으로 들어간 이후, 클린턴 행정부와 김정일 정권 간의 모든 합의는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부시 정권의 강력한 대북 압박으로 인해 김대중의 대북 정책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제네바 북핵 동결 합의를 일종의 항복으로 보고, 북핵 문제에 대해 ABC[70] 정책을 취했다.

미국의 북한 경제 봉쇄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군사적 위협도 점점 더 날카로워지자, 북한의 대외 정책도 강경한 쇄국, 대미 군사 항전 분위기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런 상횡변화의 여파로, 2001년 3월 김대중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조지 부시와 공화당 정부는 유화책(햇볕정책)을 고수하고자 하는 DJ 및 수행한 국무위원단(임동원, 정세현 등)과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여기에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각종 간담회에서 김대중을 공격적으로 몰아세웠고, 이념 공세를 퍼붓기까지 하였지만, DJ 본인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부시 대통령을 설득시켰다."고 말할만큼 진력한 결과, 이듬해인 2002년 2월 한국 도라산을 방문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발언하기에 이르렀다. [71]

또한 2000년에 착공된 개성공단의 설립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2002년 11월 23일에 금강산 지역이 금강산 관광 지구라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명명되는 등 임기말까지 꾸준히 성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클린턴-김정일 간의 합의가 네오콘의 개입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화 됨에 따라, 한반도 평화정착 및 북미수교라는 측면에서 햇볕정책은 표류하고 있는 상태. 게다가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가 터져나오면서 김대중의 햇볕 정책 목표 중 하나인 "한반도 비핵화"는 원점[72]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73] 하지만, 유사시 군수물자 수송, 전쟁을 감당할만한 경제력, 그리고 무기 수준까지 이미 남한의 군사적인 우위가 확고해진 현실인만큼, 우리 정부에 의한 대북 정책의 성패 관건은 첫째가 북-미관계 증진이고, 둘째가 북한의 핵무장 포기 셋째가 (南이 열쇠를 쥔) 남-북 경제협력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위 및 역할을 특히 대북정책의 주도권과 관련지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서 햇볕 정책을 지속해나가고자 하였으나 2007년, 북한이 기어이 "미국(네오콘)의 위협에 대한 자위수단"이란 명분 하에 핵실험을 성사시킴으로써, 안보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정권말인 2007년에야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는 악수[74]를 둠으로써 적절한 시기를 놓쳤고,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고, 남북교류의 유일한 보루였던 개성공단까지 문을 닫으면서 햇볕 정책은 점점 사장되고 있다...

심지어는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북한 정권을 기어이 무너뜨려 한다는 흡수통일 관련 발언이 힘을 얻을만큼 강경론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


2.10.4 내각제 논란

[내각제 약속은 내 인격을 걸고 약속하는 것이며 대통령에 당선된 뒤 2~3년 더 대통령 하기 위해 약속을 안 지키는 일은 없을 것]. 김종필과의 정치적 연합 조건 중 상징적인 조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고, 정치적인 조건은 의원 내각제 시행이었다.

내각제 시행에 대한 요지는 임기의 반이 지난 후에는 정부 구성을 의원내각제 체제로 바꾸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DJ는 대선 후보 시절 내각제 공부를 통해, "시행한다면 정부와 의회 모두 일정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식 내각제[75]가 바람직하다."는 결론까지 내려둔 상태였다.

하지만, 김대중은 결과적으로 내각제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내각제 시행의 현실성 문제를 떠나, 대통령이 되기 전에 본인의 인격을 걸고 약속한 일이었던만큼.. 당시 JP의 지지층으로부터 약속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았다.[76] [77]

하지만 내각제 개헌을 위해선 개헌에 필요한 반수 이상의 의석 수를 확보해 놓아야 했지만 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미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으로 공동 여당은 129석 밖에 확보가 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2000년 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천년 민주당 111석, 자민련 17석으로 또 할 수가 없었다. 여건부터 되어야 하든가 말든가 하지...즉 내각제 개헌 불이행은 김대중의 의도적인 번복이라기 보다 여건 불충족으로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2.10.5 정권 말기의 곤욕

정권 말기에는 ‘홍삼 트리오’로 불린 세 아들이 모두 권력형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먼저 그의 장남인 김홍일이 로비로 1억 5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측근(?) 최규선[78]이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 게이트'가 발생했다. 3남 김홍걸도 2002년 ‘최규선 게이트’ 수사 당시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36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차남 김홍업은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하던 검찰이 그의 이권 개입 의혹으로 수사를 확대하면서, 청와대 비서관들을 통해 인사에 개입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고 댓가를 받은(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문제가 될만한 자금은 철저하게 피하는 기민한 처신 덕분에, 검찰에서 차남의 주변인물 수백명을 샅샅히 뒤졌지만[79] 제대로된 금전적 물증은 찾지 못했다.[80] 이 스캔들의 여파로 2002년 5월 6일 DJ는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야 했다.[81]

2002년 6월, 2002년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의 4강 진출 성공에 온 국민이 기뻐하였지만, 그 날은 대통령의 아들 3형제가 교도소로 이송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날 광주 경기장을 찾은 DJ에게 고락을 함께한 광주 시민들의 축하와 격려가 쏟아졌지만, 카메라에 잡힌 건 "대통령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 DJ"였다...

2.11 퇴임 후

퇴임 당시 30%를 넘는, 이명박 대통령 이전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82]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평화센터를 설립하고 김대중도서관을 개장하는 등 대내외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과거의 애환을 풀어나가는 활동도 진행하였는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으며, 선술한 대로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에게서 아버지의 탄압에 대한 사과를 받기도 했다. 이때 김대중은 박근혜를 가리켜 "동서 화합의 적임자"라고 하는 등 덕담을 해주기도 했다.[83]

원로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탄핵 사태와 북한 핵실험[84]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당적으로는 임기 막판인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으나, 갈라져 나온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고[85]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기도 했다.

고령에다가 과거 고초를 겪었던 후유증으로 다소 잔병치레를 하긴 했지만, 강골인데다 이희호 여사가 헌신적으로 도운 덕분에 퇴임 후에도 건강하게 잘 지낸 편이었다. 그러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게 결코 헛말이 아닌 게,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노무현의 소식을 접하자 한 말이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다."였을 정도.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ㅡ2009년 5월 29일 동교동 사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는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참석했다. 그리고 비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헌화를 스스로 하는 등, 다소 무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불과 3개월도 채 안되어 폐렴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 때 전직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86] 및 한때 경쟁 상대였던 이회창박근혜, 반기문 등 수많은 거물급 정치인이 문병을 오기도 했다. 2009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어 만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었으며 본인 생전 요청과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비교적 간소하게 치뤄졌다. 각계 주요 인사들이 조문을 왔으며, 북한에서도 애도의 뜻을 밝히며 조의 방문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시신은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었다.


3 평가

2016년 1월 9일 김대중/평가로 분리하였다[87].
햇볕정책에 관련된 평가는 당 정책의 문서에 분리 서술되어 있다.


4 여담

  • 별명은 겨울을 버티고 피어난다는 인동초. 민주화 투쟁에서의 수많은 시련, 대선에서의 수많은 고배를 겪으면서도 기어이 대권을 쟁취한 그에게 붙여진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그래서 장례식 때도 장례 미사 방식으로 치렀고, 김수환 추기경과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다. 둘 다 민주 투사이기도 하고.
  • DJ가 신문을 10여개씩 챙겨보면서 뉴스, 정보를 갈구했던 연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 측근들은 늘 머릿 속에 뭔가 소식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나운서 출신인 정동영 의원 같은 경우는 한발 더 나아가, 막 정치입문한 초년병 시절이었는데도, 새벽 6시에 김대중 총재에게 박지원과 함께[88] 일일 브리핑 하는 생활을 6개월 동안 했던 일화가 있다.(자신의 후임자가 정해진 후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소회를 밝힌 적도 있음)
  • 노무현 전 대통령과 더불어 모 사이트의 주된 고인드립 타깃이기도 하다. 소스가 될만한 튀는(?) 언행은 별로 없어서 덜한 감이 있으나, 도를 넘은 건 마찬가지.
  • 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 진학을 계획했지만, 재정 문제로 장학제도가 매우 잘 갖춰진 만주 건국대로 방향을 바꾸어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징병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진학을 포기했다. 건국대학에 진학해도 병역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만주 건국대는 오히려 평소에도 학업과 무술 연마, 군사 훈련을 병행했던 터라, 재학생들의 징병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차 대전 말기 무렵, 미국은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군을 끌어들였으며, 이때까지 만주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남아서 부역한 일본인, 한국인 생존자는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한이 남았다고 밝힌바가 있다. 대선 공보 및 네이버 프로필에는 경희대학교 석사 학력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명예 석사 학위이다. 대통령 선거 공보에서도 학력이 자주 바뀌는 []때문에 학력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초선 의원 시절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표결 직전 의사 진행 방해 발언 필리버스터로 5시간 19분 연설했는데, 이는 '세계 최장 시간 국회 연설'로 기록되었다. 반대로 의회 연설 쪽으론 스트롬 서먼드24시간 18분동안이나 연설을 해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내용만 연설한 것은 아니고, 중간에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영화 스타워즈의 명대사를 따라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 다음이나 네이버 등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짓이다. 실은 히로히토 천황 사망 때 일본 대사관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적이 있어 당시에 다소 논란이 된 바 있었는데, 이를 침소봉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자신을 가르쳤던(당시 일제시대) 고등 학교 교사에게 찾아가[89] "센세. 와따시데쓰. 아노 다이쥬데쓰요."(선생님 저입니다. 그 다이쥬[90]입니다)라고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증거나 증언들이 없다.
  • 일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위안부 브로커 일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증거나 증언들이 전혀 없다.
  • 2001년 방미 도중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this man' 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했다.[91]
  • 고향 음식인 홍어를 무척 좋아했다는데,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야당 총재 시절 당직자가 김대중의 심부름으로 목포의 수산물 시장에서 홍어를 샀는데, 그 당직자가 계산을 한 다음 혼잣말로 "선생님께서 이거 보시면 참 실하다고 좋아하시겠네."라고 말하자 돈을 세던 주인이 깜짝 놀라 혹시 김대중 총재를 얘기한 거냐고 되물었다. 이에 당직자가 맞다고 얘기하자 주인이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더 큰 홍어를 가져왔다고.][92]
  • 바닷가에서 자라, 어류로 하는 요리는 웬만한 미식가 수준으로 잘 알고,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홍어의 경우는 맛만 보고 신선도를 알 수 있을 정도 였다고.[#]
  • 정계 은퇴 번복[93]을 통해 항간에서는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라는 비난까지도 있었다.
  •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영결식 때 추도사를 직접 써서 읽기로 했지만 당시 정부가 난색을 표해 무산되었다. 김영삼, 전두환 등의 다른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데 김대중 한 사람만 추도사를 읽으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김대중이 읽으려던 추도사는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관련 기사]
  • 뉴욕한인회장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박지원 의원은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이후 인생이 변하게 되었다.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감명을 받고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저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하나라도 놓는 그런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 여러차례 외국으로 망명을 떠난 경력 덕분인지 외교에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투쟁의 결과 세계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역대 최고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외순방을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중에 김대중만큼 미국, 중국, 일본의 행정수반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주도적인 포지션을 가졌던 자는 없었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했다.
  • 대통령이었던 시절 김대중의 손녀가 청와대에서 뮤지컬 '알리바바와 도적들' 를 공연하러 왔던 젝스키스의 매니저에 맞은 적이 있다. 김대중은 못 봤다고 한다.[94]

4.1 아시아의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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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만델라'로 유명하다. 70~80년대 민주 투사로 활동하며 극심한 탄압으로 투옥 및 망명을 거친 행적을 시작으로 대통령 재임, 자신을 투옥하게 만든 전 대통령을 용서한 전적, 노벨 평화상 수상한 이력 까에게 빨갱이라고 불리는 모습 까지 둘의 생애가 빼닮아서 외신에서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전부 비슷한 시기에 달성하기도 했고... 더욱이 김대중은 망명 등으로 세계 여기저기를 돌면서 해외에서도 이름 있는 편이었다.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는지 둘의 직접적인 접촉도 있었다. 김대중이 대선에 출마하자 만델라 측에서 딸을 통해 수감생활 27년을 함께한 낡은 시계를 선물했고, 김대중도 답례로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써온 낡은 가방을 선물했다고 한다. 2001년 만델라의 두번째 방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과 공동 기자 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위 사진도 당시 사진.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에 대해 애도했고, 만델라도 세상을 떠나자[95] 영부인 이희호도 애도를 나누었다.

그 밖에 김대중과 자주 비견되는 정치인으론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아웅 산 수 치가 있다.


4.2 친북반미? 친북친미?

  • 친북친미설 주장: 일본과도, 타 국가들과도 별 마찰이 없었다. 좋은 일본 문화 받아들이자는 덕담으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부터,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북한과의 관계, 김대중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구명을 요청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과의 관계가 모두 좋았다. 카터나 레이건 등이 김대중 구명을 전두환에게 요구하기도 했었다. 미국에 잠깐 피신하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계속 받아왔기에 지금 일부 운동권이나 진보 단체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김대중은 미국과 크게 별 마찰도 없었고, 오히려 클린턴과도 밀월 관계였다. 미국 덕에 목숨도 보전했는데 반미일 리가...
  • 친북반미설 주장: 지금도 반미 성향이 강하며, NL과 같은 일부 극렬 운동권에선 김대중에게 미제에 맞선 자주적인 대통령 중 한 분이라며 칭송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보수 세력에서는 김대중 정부 시기의 대북 정책과 결부시켜 그가 종북주의자였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상술했듯이 김대중은 공산주의자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까지 겪은 사람으로 반공친미주의자였다.[96] 즉 정치인으로의 행보(외교술)가 곧 그 사람의 사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셈. 후임이자 같은 진보 진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대미 관계에 있어서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인 건 맞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정치인이었다.

4.3 김영삼과 김대중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
김영삼[97]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양대 거목.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3당 합당을 거치며 그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직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병문안을 가며 화해의 움직임을 전달했다. 혼수상태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화해하자고 말을 보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문서 참조.

2015년 11월 22일자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사망함에 따라 시대를 풍미하던 양김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4.4 말이 무슨 죄여?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도전과정 중, DJ에게 의미가 있었던 문화계 사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당시 인기가도를 달리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것.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이경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DJ의 자택을 [기습] 방문하였고, 김대중은 그동안 자신에게 심어졌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언론에 줄곧 과격, 투쟁,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가 비춰졌던 DJ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쌀집 아저씨의 웃는 모습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이경규를 들었다 놨다 했다. 몰래카메라를 의심하는 부분이 백미 DJ는 이게 고마웠는지 나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98]

둘째,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되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인장이 지워지지 않은채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진짜 방송사고가 맞았지만[99], 언론들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파장이 갈수록 커졌다. 배추머리 김병조 같은 거물도 말 한 마디(망한나라당)에 방송인 생활이 끝나는 등 오독고(= 오기)가 아직 과한 시대였던터라, 언론에서 주목할수록 호주 목장에서 말을 수입한 드라마 관계자의 속은 바싹 타들었다고 한다.

4.5 김대중의 이름을 따온 것

4.6 어록

DJ는 자타가 공인하는 달변가이며 연설가였다. 아래의 글을 보듯이 수많은 숱한 어록들을 남겼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ㅡ 2009년 ['6.15 남북 공동성명' 9주년] 기념 행사 연설 中[100]
: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릅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ㅡ2009년 1월 7일 김대중 마지막 일기장에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에 처해있다."
ㅡ 2009년 1월1일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
ㅡ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중시했던 사조로, 본래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 생전의 DJ"서생적(=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문장과 더불어 이 어구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했다고 한다.[101]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
ㅡ 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ㅡ 199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 연설 中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ㅡ 1998년 대통령 취임사 연설 中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중략)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ㅡ 1998년 대통령 취임사 연설 中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
ㅡ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용기 입니다."
ㅡ1987년 9월 8일 광주 그랜드 호텔 간담회에서.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ㅡ1984년 옥중서신중에서.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는 동시에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
ㅡ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장충단 공원 연설 中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온갖 정성과, 온갖 결심으로써 박정희 씨에게 마지막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 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천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 할 지각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와 6.25때 죽은 우리 영령들 주검의 값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만은 하지 마라!
ㅡ1969년 효창운동장 연설 中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는 악마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ㅡ"사악한 구세주" 조지 소로스와의 면담을 앞둔 어느 날
"박복한 민족이고, 천추의 한이다."
ㅡ대통령 퇴임 후 예방한 정청래 등 민주당 의원들에게 했던 말. 미국-북한, 일본-북한 수교 지원을 시작으로, [종래에는 북한의 핵 불능화, 남북불가침선언,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남북철도를 연결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던 김대중-클린턴 구상이,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무산되었던 일에 대한 아쉬운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북한이 요구한 110억 달러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수교의 핵심이었다고.
통합을 하려면 상대에게 내 것을 다 준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70%를 주고 30%를 갖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가능하다.[102]
망원경으로도 현미경으로도 (해당 사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틀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해석했습니다. (...중략...) 살다 보면 역경도 만나고 순경도 만나는 게 인생입니다. 늘 고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경이라도 잘 대처하면 득이 되고, 순경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는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벅찬 삶이라 하더라도 극복하지 못할 역경은 없는 법입니다. (...중략...) 나는 주역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만물은 음(陰)과 양(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陰)이 있고 양(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음(陰)이 있으며 그것이 음양설의 핵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어 보이는 역경도, 지나고 나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것이 큰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행운이 굴러 들어온 것으로 알고 기뻐했던 일이 오히려 불행의 씨를 잉태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대응을 잘못해 복이 화근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 결국 우리의 대응 여하에 따라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찾아오는 순경과 역경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어떠한 경우라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또 순경을 잘 활용하여 성공의 길로 나가며 좋은 환경의 유혹에 끌려 자기 자신이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세는 항상 이러한 마음의 자세와 최선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내용 중[103][104]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2선거구)[105]
무소속3,391 (10.0%)낙선 (5위)
19591959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강원 15선거구)[106]
민주당8,483 (27.4%)낙선 (2위)
1960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강원 15선거구)
민주당6,538 (31.4%)낙선 (2위)
1961196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5대 국회 민의원, 강원 15선거구)[107]
민주당7,698 (36.5%)당선 (1위)1961.5.14 재보궐 당선
5.16 군사정변으로 자격정지
당선통보 후 실제임기
약 12시간(...)
1963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3선거구)[108]
민주당22,513 (50.9%)당선 (1위)1965년 민중당으로 흡수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3선거구)
신민당29,279 (52.3%)당선 (1위)
1971제7대 대통령 선거신민당5,395,900 (45.2%)낙선 (2위)
1971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
신민당-당선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
1987제13대 대통령 선거평화민주당6,113,375 (27.0%)낙선 (3위)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1번)평화민주당-당선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번)민주당-당선1992.12.19 사퇴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
1992제14대 대통령 선거민주당8,041,284 (33.8%)낙선 (2위)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4번)
새정치국민회의-낙선
1997제15대 대통령 선거새정치국민회의10,326,275 (40.3%)당선 (1위)자민련과 선거연대
(DJP연합)


6 관련 문서

  1. 공식초상화
  2. 생년월일이 명확하진 않지만 김대중측에서 공식적으로 양력 1924년 1월 6일이라고 밝혔다.[기사]
  3. '둘째'라는 뜻이다. 대통령을 꿈꾸던 김대중에게는 맞지 않던 글자.
  4. 그런데 아버지 김운식은 본처가 있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첩의 자식이 되는셈이다. 나중에 아버지가 본처와 이혼하면서 적자인 차남이 되었다.
  5. 창씨개명 당시 만16세였다.
  6. 5년제였으며, 현 목상고등학교의 전신이다.
  7. 일본 NHK 취재반이 펴낸 자서전에 등록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을 탐문했다는 인터뷰가 실려있다.
  8. 어찌보면 이 역시 일제의 전쟁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과도한 비난을 할만한 행보는 아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이 당시 자동차 정비 사업을 하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광산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다른 업자들의 견제를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은 적 있다.
  9. 좌우대립은 차제로 미루고, 일단 정부부터 구성해 산적한 현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 이상주의자라는 비판과 "어쩌면 오늘의 남북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혜안"이라는 상반된 평이 있다.
  10.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다른 사람의 똥은 더럽다 하고, 레닌의 방귀는 향기롭다고 한다."고 비판한 적도 있었을만큼, 과거 조선의 악습을 비판한 무리들이 정작 조선의 신앙적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던 것. 이들 소련추종세력들은 훗날 독자세력을 구축하고자 한 김일성이 자신의 세력기반 "갑산파"를 밀어줌에 따라 숙청되거나, 파벌을 바꾸었다고 한다.
  11. 1948년 동양해운, 1951년 목포상선주식회사, 1952년 흥국해운주식회사로 각각 상호변경되었다.
  12. 일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젊은시절 DJ의 받아적는 습관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13. 총재인 DJ가 늘 뉴스를 면밀히 검토했기 때문에, 뭔가 소식거리를 가져오거나 이에 대해 제대로 연구해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중용되었다는 후문이다. 어떻게 보면 신문사 사장이 취재 잘해오는 기자들을 아끼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
  14. 재택근무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DJ는 "정치는 50%가 돈이고, 50%는 '정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며, 이 정보를 얻기 위해 매일 일본신문 포함해 10여 가지의 신문을 꼼꼼히 살피고, 토막소식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15.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간조선 87년 8월호 대담에서 자신은 전남 해상방위대 부사령관이었다고 밝혔고, 월간조선 80년 6월호에는 대한청년 목포해상단 부단장이라고 밝히고 있고, 주간조선 97년 5월 8일자에서는 전남지구 부단장이라고 했으며, 97년 8월13일자 일요시사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장이였다고 말했다. 이런식으로 명칭이 바뀌는 것은 30년도 더 전의 사건이라 기억으로만 말하다 보니 헷갈리거나 여러 직위가 존재 혹은 여러 직위로 불렸을 싶다.
  16. 이 때 김대중은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그 당시 인제지역 군부대 사령관까지 찾아가본다. 그러나 마침 사령관이 출타 중이었고,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만다. 만약 그 사령관과 만나서 의기 투합 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사령관은 5년 뒤에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였다. 어찌보면 참 질기기 그지없는 인연이다.
  17. 연이은 낙선으로 궁핍해진 살림을 보태고자,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미용도구들을 집에 가져다 놓고 미용실을 운영하였다.
  18. 전처가 따로 있었지만, 일찍이 사별하여 재혼한 셈이었다. 이희호도 여성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19. 용모와 지적인 면을 모두 갖춘 DJ에게 반했다는 후문이다. 사실 삼김시대의 주역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 모두 시각적인 경쟁력도 겸비한 미남들이긴 했다.
  20. 이 기록은 2016년 2월 23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된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김광진 의원이 5시간 34분으로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참조
  21. 정치인이기 전에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제일가는 수재라 일컬어진 인물이다.
  22. 일국의 대통령은 그 악수 횟수, 같이 사진 찍는 사람 및 위치(대통령 주변에 있는지 여부), 등장하는 장소 하나하나에 의미가 실려있는 경우가 많다. 즉, "여권 후보를 지지해주시면, 여기서 확인한 민원들을 돕는데 더 힘을 실어드리겠다."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그게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이라면 더더욱.
  23. 사실 참모였던 선거의 귀재 엄창록이 없었다면 당선되기 힘들었다. 나중에 엄창록을 잃은것을 자서전에도 아깝다고 썼다.
  24. 게다가 군인들은 여권을 지지 않을 경우 뒷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25. 후일 김종필은 선거가 공정했다면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거라고 인정했다.
  26. 공화당과 신민당의 득표율 차이는 고작 4.4%였다.
  27. 김대중이 신민당에 자신이 이끄는 재야 세력과 함께 입당하려 했으나, 김영삼은 입당 심사를 거론했고 김대중 역시 군부가 협조적이지 않을 테니 대선 출마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듣지 않는다. 김종필은 김종필대로 여당 총재인 자신이 미래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28. 5월17일 밤 10시, 계엄군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으로 이동하여 장총 개머리판으로 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들은 '김대중과 경호원이 저항하면 총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29. 2004년 국회의원 임기를 마쳤을 때 즈음 파킨슨병 징후가 있었으며, 2009년 선친의 장례식장에 [휠체어에 앉은 채로] 참석하였다.
  30. 카터 행정부가 정권을 인계하면서 레이건 측에 김대중 구명을 요청했고, 레이건 측 역시 동의했다.
  31. 가장 대표적인 구명 운동만 적었을 뿐, 이외에도 많은 구명 활동이 있었다.
  32. 이 무렵, 미국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공수여단이 투입되는 사태를 방관했다는 도덕적인 부담을 안고 있었다.
  33.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일베 등 각지 극우 사이트에서 소위 '앙망문'이라 하며 김대중이 정치 생활을 은퇴했다 비열하게(?) 복귀 했다고 까이는 요소이긴 하나 ,그땐 말 한 번 잘못하면 온가족이 끌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대였다.
  34. 으르렁거리던 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이 함께했다. 그 유명한 에드워드 케네디도 이때 김대중을 호위하면서 내한했다.
  35.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
  36.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노태우가 과거 DJ의 선거참모를 지낸 선거의 귀재 엄창록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지만, 엄창록은 "양 김이 모두 나온다는데 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며 거절했다는 후문.
  37. DJ가 과거 웅변교습실을 운영했을 시절부터 함께한 동지 김상현이 이 때 실망감을 표하며 김영삼에게 갔다가, 3년 후 3당 합당에 또다시 실망하여에 반대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38. 이기기만 하면 이름 모르는 예산도 내려보낼 수 있었으니...
  39. PK 지역은 김영삼을, 호남 지역은 김대중을 지지.
  40. 총선 후 YS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정권 중간평가에 DJ가 제동을 걸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41. 노태우 대통령과 인척이자 6공화국의 실세였던 박철언 의원(법조인 출신)의 주장으로 DJ에게 먼저 제안이 들어왔었다.
  42. 김영삼이 노무현을 공천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사적으로도 김영삼이 노무현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43. 회고록인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이때까지 낸 책들 중 정치적 메시지가 없는 유일한 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 DJ의 책 중 제일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44.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
  45. 신화통신을 위시한 중국 언론들은 DJ에게 차기 대선 출마 여부를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46. 이들 중에는 나중에 인기그룹 DJ DOC의 노래('DOC와 춤을')를 개사해 만든 선거광고(DJ와 춤을)에 출연한 사람도 있었다.
  47. 이전까지는 중앙에서 시장, 군수를 내정해 내려보냈다.
  48. DJ의 달변도 이때만큼은 기자들 앞에서 맥을 못췄다.
  49. 민주당 의원 53명이 신당에 합류했으며, 이기택이부영, 제정구, 박계동(노태우 전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을 폭로한 사람), 김부겸 의원은 합류를 거부하였다. 영남 출신으로 강직함과 인망,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춘 노무현 의원이 박계동 등과의 갈등을 감수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했던 점도 특기할만한 부분.
  50. 단, 노무현 의원은 국민회의 창당 후 바로 합류하지는 않았으며, 96년 총선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종로에서 출마했다. 그러다 대선이 있는 97년에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명분 하에 DJ의 국민회의에 합류, 부총재 겸 지원유세단장이 되어 김대중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섰다. 민주당의 다른 세력은 이회창과 단일화를 한 조순을 따라 신한국당과의 통합 정당인 한나라당 창당 멤버가 된다. 이 중 이부영, 김부겸 의원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 즈음에 다시 조우.
  51. 임동원은 본래 군인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대북외교 실무를 맡았던 사람이다
  52. 겨우 79석을 얻는 데 그쳤다. 특히 서울에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야당이 패하는 일이 일어나 관계자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종로에서는 이명박이종찬노무현을 꺾고 당선되었고, 중구에서는 박성범정대철을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성동을에서는 김학원조세형을 이기고 당선되었다.
  53. 외환 위기, DJP 연합, 그리고 이인제의 출마 중 하나만 없었어도 대통령에 오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제15대 대선은 여당이 IMF 사태라는 전대 미문의 사고를 쳤고, 이인제가 표를 깎아먹는 등 호재가 겹쳤으며, 야권의 영입대상으로 포항제철 설립자이자 원리원칙에 입각한 운영으로 명망이 높은 박태준 선생 외에, 과거 정적관계였던 5.16 주동세력의 맥을 잇는 JP에게까지 연대의 손을 뻗는 등, 40년 가까운 민주화 투쟁 세월동안 쌓은 덕망과 명예까지 송두리째 날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이회창에게 39만표(시군市郡 1곳 차이)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신승을 거두었던 선거였다. 이 때문에 제15대 대통령 선거우리나라 보수 지지층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54. 집권 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 확보 실패 의 이유가 있겠지만, 김대중은 당선 후에 이를 지키지 않았고, 이로 인해 김종필과 다시 결별하게 된다.
  55. DJ의 취임 후 예산 200억원이 책정됐지만, 참여정부 출범 후, 추가 모금 문제로 인해 기념관 건립은 무산, [JP가 서운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단, DJ가 대통령이 되고 기념관 건립 비용으로 배정한 예산(200억)은 그대로 집행돼, 2002년 1월 건축공사가 착공됐으며, 2012년 서울 상암동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으로 개관됐다.
  56. 대통령으로서 제대로 권력을 휘둘러보지도 못 한 윤보선(충남 아산 출신)과 최규하(강원 원주 출신), 그리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황해 평산 출신)을 제외하면 유일무이한 비영남 출신 대통령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나머지 대통령은 모두 영남 출신이다. 박정희는 경북 구미, 전두환은 경남 합천, 노태우는 대구, 김영삼은 경남 거제, 노무현은 경남 김해, 이명박은 경북 포항, 박근혜는 대구 출신이다.
  57. 여담으로, 김대중은 마이클 잭슨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관계였다. 취임식 소식을 듣고 직접 전세기를 타고 한국까지 날아왔다고 한다.
  58. 1차로 공기업 108개를 민영화했다. 이 중 포항제철과 한국중공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후 KT와 담배인삼공사,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을 민영화했다.
  59. 1997년 말 70만 명이던 공공부문 인력을 55만 9천명으로 줄였다. 총 14만 1천 명, 전체 인력의 20%를 감축한 것이다.
  60. 총 8천 1백 개의 행정규제를 폐지하였다.
  61. "시중의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명분이었지만, 현실은 최고 연 29.5%까지 치솟은 시중 금리로 인해, 실직 후 창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퇴직자들 및 기존 기업인들을 크게 압박하는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났다. 결국, 정책 시행 5개월도 안 되어,"국내 금융회사들을 인수가능"하게끔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겨우 이자율을 낮출 수 있었다. DJ가 당선자 신분으로 자택에서 면담을 가졌던 사악한 구세주 조지 소로스도 이 금융시장 개방 6개월 뒤인 99년 1월 15일에 본격적으로 한국투자 의사를 밝히고 이득을 보았지만, 우리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 여파로 국제 금값이 하락함에 따라 전체적으로는 예상을 많이 밑도는 이익을 건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62. 예상을 밑도는 수준이었다고는 하지만, 유태인 상인들의 셈법은, 우리가 "2배 이익을 보았다.(100% 이익)"고 여기는 걸, "50%밖에 못건졌다."고 볼 만큼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날강도, 저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63. 물론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9년, 1974년, 1979년에도 외환 위기가 있었으나, 1997년만큼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79년 외환 위기의 경우,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이 밑바닥부터 붕괴될 정도로 경제가 뒤흔들렸지만, 국제수지 적자 폭은 겨우 40억 달러에 불과했다.
  64. 1990년대 말의 대한민국 외에도 외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나라로는 1970년대말의 영국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은 1975년 외환 위기가 발생한 후, 7년이 지난 1982년에야 IMF 구제 금융을 겨우 상환할 수 있었다.
  65.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우리 역사상 두 번째로 낮았다. 물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부 때 7.4%로 가장 높았고, 전두환 정부 6.1%, 김영삼 정부 5.0% 등이었다.
  66. 참고로 노태우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각각 10억 6천500만 달러와 5억 7천100만 달러였다. 김영삼 정부는 5년간 432억 7천600만 달러 줄어들면서 연평균 감소액이 86억 5천500만 달러였다.
  67. 그러나 6.15 공동선언은 노무현 정권 말부터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근래에 들어서는 남측의 강경대응 기조에 대한 북한의 대응 카드로 사용되고 있다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
  68. 만약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아닌 앨 고어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면, 북한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김정일 정권의 존립이 보장된다는 조건 하에 북미 수교는 결국 이루어지고, 북한의 전쟁도발, 핵개발위협 등도 중단되며, 남북경협이 대폭 확대되고, 남북간 자유왕래까지 조기에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69. 집권 7년 차에야 Anithing But Clinton 정책을 폐기하고 클린턴 시절의 유화정책을 일부 취했지만, 이미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가동 후 핵실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이전까지는 자국민의 시선에 잘 들어오는 강경책을, 김대중-노무현 두 우방국 대통령에게 외교결례를 범하면서까지 우악스러울만큼 밀어붙였다.
  70. Anything But Clinton의 약자. '클린턴 식으로만 안 하면 된다'
  71. 2001년 방미 때 미국의 네오콘들에게 얼마나 십자 포화를 맞으며 고생했는지, 김대중은 이후 측근들에게 "내가 혼자서 그들과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아는가? 그동안 그대들은 뭐하고 있었는가?"라는 말로 당시의 심적 고통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72. 단, 이 원점의 시간대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수립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대결국면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인 부담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검토되어야 한다. 김대중(화해협력), 노무현(화해협력), 이명박(강경) 정부까지 모두 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다. DJ의 남북정상회담 성과인 6.15 공동선언문남북기본합의서 + 추가항목 약간 + 국가정상의 서명이라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73. 북한은 1차 핵 위기 이후 플루토늄 핵 개발이 동결되자, 늦어도 1996년부터 파키스탄의 '칸 네트워크'를 통해 별도의 우라늄 농축 핵 개발을 추진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햇볕 정책 진행 중에도 김정일은 핵무장이 가능한 옵션을 갖고 있었던 것.
  74. 나이 80에 애를 낳은 격이란 비판이 있었다.
  75. 이 독일식 내각제가 총리 = 대통령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독일 연방의 대통령이 존재한다. 다만, 한국처럼 경제, 행정, 군사, 외교, 인사 전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는 총리도 마찬가지지만 총리는 장관급 및 실무자들을 정무상 직접 대면하며 국정을 조율할 수 있다.
  76. JP 본인은 이와 관련해 지극히 말을 아끼며 좀처럼 심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77. 이후의 민주당-자민련 결별에 대해서는 2000년 총선에서의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의 과반 실패에 따른 결과로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78. 이 사람은 기발한 이벤트 연출과 박학다식, 그리고 남의 말을 잘 경청해주는 사교술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제인 전경환부터, 팝가수 마이클 잭슨, 김홍걸, 이명박 캠프의 일부 인사까지 인맥을 넓혀 영달을 누려온 처세의 신이라 할만한 사람이다. 특정 정권 인사의 측근이라고만 부르기에는 그 네임밸류가 아까운(?) 인물!!
  79. 걔중에는 검사가 회사를 운영하는 김 씨 동창생을 협박해 김 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한 의혹도 있다. 이 동창생은 2007년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겪은 일을 녹음해두었다고 한다.
  80. 2005년 사면 조치를 받은 김홍업이 2007년 국회 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돼 재기하고 당내활동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다.
  81. 참고로 1999년 옷 로비 사건 역시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한 것이었으나, 파괴력 측면에서는 정권말에 검사들이 "의욕적으로" 덤벼든 3형제 스캔들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82. 훗날 이명박이 소수점 아래의 수치 차이로 이 기록을 깼다.
  83. 친 DJ성향 한겨레에서 동서 분열과 양김에 관해 쓴 사설.[사설]
  84. 이명박을 박정희와 전두환에 비유하며 대차게 까기도 했다(...)
  85. 새천년민주당이 본당과 열린우리당으로 갈라질 당시 새천년민주당 측에서는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으나, 본인은 노무현을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였고 이는 김대중을 따르던 세력들이 열린우리당으로 옮기는 계기이기도 했다.
  86. 사면 덕분이었는지 크게 틀어진 관계는 아니었던 듯. 참고로 전두환은 노무현 영결식 때는 불참하면서도 김대중 영결식 때에는 직접 조문을 왔다.
  87. r803
  88. 정동영이 일산의 총재 자택으로 출근하면, 전날까지 이런저런 사람들과 술을 마셨던 박지원이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있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고.
  89. 바로 앞의 히로히토 조문 시에 했다는 설도 있다.
  90.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다.
  91. 부시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을 'easy man'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92. 자료에 따라선 먼저 흑산도 산이 아닌 수입산을 내놓았고, 김대중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서야 [흑산도 산이] [아님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93. "정치 안해요. 내가 안 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하는 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키는 거요."라고 했으나 곧 복귀.
  94. 젝키의 당시 매니저는 소녀팬들을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
  95. 2013년 12월 5일 2014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 하루전에 세상을 떠났다.
  96. 한국논단이 주관한 대선 후보 토론회를 빙자한 사상 검증회에서도 "나(김대중)는 지난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태 때 북한 공산당 규탄 대회라도 열어야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대중이 친북(혹은 종북)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이다. 북한은 체제와 무관한 발언도 사상적으로 의심을 하여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인데, 진짜 종북주의자라면, 비록 남한에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북한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자는 말을 할수 있을까? 남한에 살기에 신변의 위협이 없었다고 했는데, 김정일의 처조카로써 남한으로 탈출한 이한영도 북한에서 보낸 조직원에 의해 습격 당해 죽었다. 그리고 황장엽 전 비서도 북한에서 보냈다고 추정되는 조직원에 의해 살해 위협을 받은 바 있다. 또 대통령이라서 신변의 위협을 피했다고 할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북한이 직파한 특수부대원에 의해 살해미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남한에 있든, 대통령이었든 북한이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단 이야기다.
  97. 이는 김영삼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였다. [#] 썰전에서 일화에 대해 분석했는데, 김영삼과는 달리 궁핍했던 인생 때문에 신중한 자세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98.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쌀집아저씨 김영희 PD가 사고를 친 것을, 이경규가 일산의 DJ 자택까지 동행해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박지원 '대변인'이(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DJ의 정치인생 40년 가운데 웃는 모습이 TV로 나간 것은 처음”이라며 고마워 했다는 후문.
  99. 호주 말 목장주를 취재한 기자가 이를 확인.
  100. 4분 15초~~. 본인이 추진했던 일에 대한 기념행사였지만, 발언 서두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덕담으로 시작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였다. 위의 발언도 "양심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로운 사람들이 계속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101. 2000년 6월에는 국정 공동운영자인 JP도 이 사자성어를 휘호로 발표해 [언론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보기도 하였다.
  102. 설령 이쪽의 세가 더 강할지라도 마음가짐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말. 1990년, 여권의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이 DJ의 옛 평화민주당과 동등한 비중으로 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던 것도 이기택 의원의 완고한 "지분" 요구를 DJ가 양보하고 수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103. 역시 토인비를 접해본 다른 정치인의 [수사]와(맨 밑에서 2번째 문단) 비교해보도록 하자(단, 원 발언이 경어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여 볼 필요가 있다)
  104. ※ 발언자인 박명재 의원이 언급한 제2의 건국이라는 구호가, 박 의원이 과거 국민의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에서(정무수석실) 재직한 1998 ~ 1999년에 고안되어 한동안 세간에 널리 퍼졌던 일을 감안한다면, 기자의 해석과 다르게 [중의성(重意性)을 띤 의미로 해석될 여지]도 있는 부분이다. 명망있는 지역 정치인으로써 발언대에 올랐지만, 한 때 달빛동맹(구벌 + 고을) 의원모임에 적극 참여하며 온건 노선을 걸었던 박 의원이 나름 고심하여 선택한 단어일 수도 있기 때문.
  105. 현재의 목포시
  106. 현재의 인제군
  107. 전임자 전형산 반민주행위자 공민법 제한법(즉 자유당 독재 부역)으로 자격 상실)
  108. 현재의 목포시왜 같은 지역인데 선거구 부여 번호가 왔다갔다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