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로이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해롤드 로이드
HAROLD LLOYD
분야영화
입성날짜1960년 2월 8일
위치1503 Hollywood Blvd.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로렐과 하디와 무성영화를 이끌던 전설

1 개요

본명은 해럴드 클레이턴 로이드(Harold Clayton Lloyd). 별명은 스피디(Speedy).

1893년 4월 20일 ~ 1971년 3월 8일. 미국영화배우, 영화감독, 프로듀서.

2 상세

1893년 4월 20일 네브라스키주 부차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웨일즈계였다고 한다. 로이드의 아버지는 사업을 연이어 실패했고 고압적인 성격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계속해서 충돌한 끝에 결국에는 1910년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이혼을 하게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집에서 독립하여 각종 허드랫일을 하면서 먹고 살던 해럴드 로이드는 1912년 토마스 에디슨의 영화특허회사(MPPC)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였고 곧, 헐리우드가 세워지자 헐리우드 최초의 코미디 전문 제작소인 멧 세넷((Mack Sennett)의 키스턴 프로덕션으로 옮기게 된다.

1914년, 해럴드 로이드는 키스턴 프로덕션을 나와서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알게 된 동료 배우 할 로치와 함께 영화 스튜디오를 만들고 할 로치 각본, 감독, 해럴드 로이드 주연이라는 협업 체계를 구축하여 본격적으로 주연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 시기 로이드는 '항상 남들에게 당하는 불운한 사나이'라는 컨셉을 가진 Lonesome Luke라는 캐릭터로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Lonesome Luke의 외모가 찰리 채플린의 방랑자(The Tramp) 캐릭터의 외모와 지나치게 유사하였기 때문에 채플린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게 되자 1918년부터는 동그란 안경과 모자를 쓴 도시청년이라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그가 즐겨 썼던 동그란 뿔테안경은 '로이드 안경'이라고 불리며 해럴드 로이드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슈퍼맨클라크 켄트로 변장하는 설정이 만들어졌다.

해럴드 로이드의 코미디 스타일은 버스터 키튼과 비슷하게 몸개그로 웃기는 스타일이다. 단 두 사람의 스타일은 좀 다른데 버스터 키튼은 계단에서 넘어져서 구르거나 무언가에 발이 걸려서 엉덩방아를 찧는 등 박진감 넘치는 스턴트를 주로 선보였고 해럴드 로이드는 자동차 뒷편에 매달려있거나 높은 건물의 벽을 기어오르는 등 긴장감 넘치는 스턴트를 주로 선보였다. 로이드는 자신의 스턴트를 '스릴 시퀀스'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해럴드 로이드가 선보인 스턴트 중 가장 대표적인 <Safety Last! 1923>에서 등장한 해롤드 로이드의 시계탑 시퀀스. 해당 장면은 성룡프로젝트A백 투 더 퓨쳐에서 오마쥬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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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해럴드 로이드는 <Hauted Spocks>라는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수류탄 오발 사고로[2]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고 손가락을 잃은 이후부터는 오른손 모양을 한 특수장갑을 끼고 생활하였다. 사고 이후, 해럴드 로이드는 영화를 촬영할 때면 안전 장치를 꼼꼼히 준비한 것은 물론, 당시 개발되어 있는 각종 특수 효과를 총동원했다. 또한, 극장에 개봉하기 전 미리 영화를 공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서 평가가 안 좋은 부분의 촬영과 편집을 다시하는 프리뷰(시사회) 시스템을 영화계에 정립시켰다.

일례로 위의 시계탑 시퀀스는 이렇게 찍었다.

파일:Attachment/해럴드 로이드/4f0fb5c3d7ac2acdc9683099bd127ed0.jpg

이처럼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영리한 배우로 유명했고 실제로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 배우들 중에서 저작권의 중요성을 최초로 인식한 인물이었던 로이드는 1923년부터 할 로치와 결별하여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해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당시 인기리에 상영되던 영화들 중 판권이 명확하지 않던 작품들의 소유권을 사들여서 원저작자의 저작권을 지켜주면서 돈을 벌었다. 할 로치는 이미 <The Liitle Rascals> 시리즈[3]를 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로이드의 독립에 대해 그다지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1920년대까지 최고의 코미디 스타로 활약하던 해럴드 로이드는 1930년대에 들어서도 활동을 지속했으나 이미 30년대는 1927년 10월 개봉한 재즈 싱어로 유성 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1929년경제 대공황까지 발생한 뒤였기 때문에 해롤드 로이드의 안경을 쓴 도시 청년 캐릭터는 더 이상 관객에게 공감이 가는 캐릭터가 아니었고 그의 영화들은 계속해서 흥행에 실패하였다. 처음에 해럴드 로이드는 <The Cat's-Paw(1934)>, <The Milky Way(1936)> 등의 영화를 통해 나름대로 30년대의 시대상에 맞게 자신의 캐릭터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조짐까지 보이자 1938년 자신의 영화 스튜디오를 팔고 영화계에서 은퇴를 선언, 라디오 사회자로 복귀하기까지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자신의 대저택 Greenacres에서 자선 활동으로 소일하면서 지낸다.

1940년대 초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성기를 이륙한 라디오 방송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느낀 해럴드 로이드는 영화 배우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라디오 방송 진행자로 나서서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1951년 TV 방송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자 로이드는 라디오에서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인기있던 라디오 방송의 TV판 제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동시에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무성 영화들에 소리를 입혀서 TV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직접 해설자로 출연하면서 무성 영화들의 재발굴에도 기여하였다. 다만 헤롤드 로이드 본인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로이드가 방송국에 너무 많은 로열티를 요구하면서 TV에서 방영되지 못했다.[4] 또한 로이드는 현역시절의 라이벌이었던 버스터 키튼을 비롯하여 무성영화 시절의 동료 배우들에게 방송 출연을 강력하게 권유하였지만 영화계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버스터 키튼을 제외하고 '방송매체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 것'이라면서 출연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해럴드 로이드는 무성영화의 시대를 지배했던 3인조 중 가장 말년을 평온하게 보냈다. 한창 코미디 스타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헐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 배우들 중 하나였던데다가 영화계를 은퇴한 이후 사업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그야말로 역대급 부자가 된 덕분. 사생활도 평온해서 그의 영화에서 항상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 밀드레드 데이비스와 결혼해서 잉꼬부부로 잘 살았다. 밀드레드는 결혼 후 배우업에서 은퇴하고 1969년에 사망했고 해롤드도 아내의 죽음 후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채플린은 그놈의 매카시즘에 걸려서 말년 대부분을 피곤하게 보내야 했고 키튼은 경제적으로 제대로 몰락했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

현역시절 채플린이나 키튼에 비해 돈을 많이 번 데는 다작도 한 몫 한다. 실제로 로이드와 채플린이 1920년대 발표한 장편 영화들의 흥행을 비교하면

Feature film grosses (silents only) during the twenties for Lloyd were as follows:

A Sailor-Made Man (1921) 5,285

Grandma's Boy (1922) 5,623
Doctor Jack (1922) ,275,423
Safety Last (1923) ,588,545
Why Worry (1923) ,476,254
Girl Shy (1924) ,550,000
Hot Water (1924) ,350,000
The Freshman (1925) ,651,167
For Heaven's Sake (1926) ,591,460
The Kid Brother (1927) ,403,130
Speedy (1928) ,287,798

Chaplin's feature film grosses for the decade are:

The Kid (1921) ,500,000

A Woman of Paris (1923) 4,000
Gold Rush (1925) ,250,000
Circus (1928) ,800,000

해럴드 로이드가 영화를 꾸준히 뽑아내며 계속 안타를 쳐냈다면 채플린은 큰 홈런 한 방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키튼도 채플린도 본인 작품 수가 백 편을 못 넘는데 이 분은 혼자 200편을 찍으셨으니.

3 후세의 평가

현역시절에는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과 동등한 인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두 사람보다 묻혔다. 월간 키노나 스크린, 로드쇼같은 90년대를 풍미한 국내 영화지에선 채플린이나 키튼은 종종 상세하게 소개하는 반면, 로이드에 대하여 소개한 게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해외 평론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현재 평론가들의 해럴드 로이드에 대한 평가는 대략 신(찰리 채플린)과 우주(버스터 키튼)의 싸움에 낀 인간류 최강(해럴드 로이드) 정도. 그나마 해럴드 로이드는 인간류 최강 소리나 듣고 있지 전성기엔 저 셋에 버금간 유성 영화 시기의 막스 형제는 훨씬 심하게 묻혔다.

해롤드 로이드가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 이유로 제시되는 것들은

  • 첫째, 채플린과 키튼에 비해 로이드의 캐릭터는 단순했다.
  • 둘째, 해럴드 로이드는 '감독'이 아닌 '프로듀서'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시했기에 영화의 예술성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평론가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로이드의 영화 크레딧을 보면 당대 헐리우드의 스타들처럼 직접 각본이나 감독을 맡아서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각 분야의 전문인들을 고용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해럴드 로이드는 MGM의 프로듀서 어빙 탈버그(Irving Thalberg)와 함께 오늘날의 헐리우드 시스템을 확립한 사람이다.
  • 셋째, 해럴드 로이드는 독립 스튜디오를 세운 뒤부터 자신의 출연작들을 전부 직접 관리했으며 1938년 영화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때 원본 필름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저택 창고에 보관했다.[5] 다시 말해서, 대다수 영화팬이나 영화학도들은 그의 영화를 볼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심지어 그 유명한 로저 이버트조차 해럴드 로이드의 영화들이 DVD로 발매된 후에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6]

등이 있다.

그래도 DVD 시대부터 해럴드 로이드의 영화들이 DVD로 재발매되기 시작하면서 그럭저럭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해럴드 로이드의 대표작인 Safety Last!(1923) 같은 경우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나오기도 했고 The Freshman (1925)은 American Film Institute recognition이 2000년도에 뽑은 100년 동안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 중 가장 웃긴 영화 100편 중 7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 에미트 브라운 박사의 연구실에 진열된 시계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대놓고 시계에 매달린 해롤드 로이드 선생이 나온다.
  2. 담당자의 착오로 영화 촬영장에 영화용 가짜 수류탄이 아니라 진짜 수류탄이 배달되었는데 영화 스테프들이 소품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영화 촬영을 감행했다.
  3. 세계 최초로 아이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코미디 시리즈로 우리나라에서는 악동클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있다.
  4. 일부 영화는 1962년 로이드 자신이 직접 재편집하여 극장에서 재개봉하였다.
  5. 로이드는 이렇게 수거한 필름들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에게 가끔 보여주는 걸 낙으로 삼았다.
  6. 다행인 점은 덕분에 필름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제작 년도가 오래된 영화로 갈수록 필름 관리를 제대로 하지않아, 재수가 없으면 아예 필름이 사라져서 볼 수 없는 영화들도 많다.(한국만 해도 90년대 영화 중 필름 상태가 엉망인 영화들이 많다.) 로이드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의 필름을 엄격히 관리했기 때문에 리마스터링에 필요한 자금이 충분하다면 개봉 당시보다 더 좋은 화질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판권 문제로 필름이 사방팔방 흩어져 복원하기 힘들기로 악명높은 버스터 키튼과 대조되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