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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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십자군 원정
사건 제2차 십자군 원정제3차 십자군 원정제4차 십자군 원정
벌어진 일처참한 실패,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공백 증대레반트 지역 확보, 십자군 국가들의 생명연장콘스탄티노플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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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 원정도

1 개요

희대의 찌질이 기 덕분에히틴의 뿔 전투(1187.7)로 예루살렘 왕국이 사실상 멸망하고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군주 살라딘(1138~1193)에게 점령당하자, 그에 따라 성지를 탈환하고자 해서 결성된 십자군이다.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사상 최고 수준의 전력을 가진 십자군으로 당시 참가했던 왕의 능력, 군대의 질, 수, 참가국의 권위로 따질 때 모든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하다.[1] 후세에 호사가들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가장 많기도 한데, 살라흐 앗 딘리처드 1세의 대인 배틀[2]이나, 이 십자군을 전후하여 벌어진 유럽의 권력 이동 등등.

2 배경

2.1 다마스커스의 함락

2차 십자군의 참혹한 실패 이후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 상황은 날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장기의 뒤를 이은 누레딘은 이슬람의 종교적 열정을 부채질하여 십자군들에 대한 성전을 주장하며 이슬람 세계를 규합해갔다. 2차 십자군의 실패 이후 유럽에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듯이 그 역시 십자군 국가의 존재는 이슬람 신앙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라 주장했고 신앙을 '정화'하기 위해 시아파를 박해하고 사원과 학교를 건립했다. 한편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3세가 어머니 멜리장드를 숙청하여 나불루스의 영주로 격하시킨 다음에 1153년 아스칼론을 점령함으로 전 팔레스타인을 예루살렘 왕국의 영역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2차 십자군 원정으로 훼손되어 버린 다마스커스와의 관계가 최악의 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왕국군이 아스칼론에 몰려 있는 동안 누레딘이 다마스커스를 점령한 것이다. 다마스커스 사람들은 십자군을 불신하고 있었고 별 저항도 없이 성문을 열어 누레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자신들이 통일된 이슬람 세계에 포위되었단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비옥한 이집트를 정벌할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1163년 보두앵 3세 사후 그의 동생 아말릭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본격적으로 이집트 원정에 착수했다.

2.2 예루살렘 왕국의 이집트 원정

당시 이집트는 누레딘이 파견한 장수 시르쿠와 누레딘에 의해 앉혀진 파티마 왕조의 권력자인 샤와르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샤와르는 아말릭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아말릭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164년 빌베이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누레딘이 안티오키아를 공격해 안티오키아의 십자군들을 궤멸시킴으로 전략의 추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아말릭은 시르쿠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키는 조건으로 이집트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3년 후에 누레딘은 다시 시르쿠를 이집트에 보내자 예루살렘 왕국은 샤와르의 원조 요청을 다시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 시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드디어 기독교도의 5대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모두 회복된 것이다.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곧 파티마에 반환되었으나 예루살렘 왕국의 깃발은 파로스의 등대 위에 휘날릴 자격을 얻었고 카이로엔 십자군들이 주둔했다. 이집트는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집트를 완전히 점령하고자 했고 구호기사단이 여기에 열렬히 호응했다. 성전기사단은 다마스커스를 공격해 중요한 우방을 잃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예루살렘 왕국은 이집트를 공격했다. 샤와르는 어제의 적인 누레딘과 동맹을 맺어 맞섰다. 1168년 십자군은 빌베이스를 장악하고 카이로를 공격했다. 하지만 시르쿠의 군대가 도착할 때 즈음에 십자군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아말릭은 이집트에서 철수하는 댓가로 전쟁배상금을 받고 철수하고자 했으나 샤와르와 누레딘은 십자군이 지친 걸 알고 협상을 질질 끌었다. 결국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십자군들은 맥없이 철수했고 예루살렘 왕국은 이집트 원정의 댓가를 자기 손으로 걷어차고 중요한 우방도 잃고 말았다.

2.3 살라딘의 부상

샤와르의 결말도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시르쿠에게 죽임을 당했고 시르쿠는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두달 후에 시르쿠가 급사하자 그의 조카 살라딘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다. 에루살렘 왕국은 이집트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다미에타를 쳤으나 서로간의 불신으로 인해 실패했다. 1174년에는 시칠리아의 왕 굴리엘모 2세의 도움으로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지만 아말릭 왕이 급사하면서 원정은 다시 흐지부지해졌다. 노르만은 패배했고 귀환했다. 보두앵 3세의 뒤를 이어 부두앵 4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문둥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판이었다. 이어 살라딘과 대립 관계이던 누레딘도 죽었고 시리아는 그의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살라딘은 즉각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일하여 자신의 기반을 닦았다. 아직까지 모술과 알레포에 장기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있었지만 살라딘은 사실상 전 이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1176년 동로마 제국군이 미리오케팔론에서 투르크 족에게 패배하면서 동로마의 소아시아 회복은 허사로 돌아갔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서유럽은 원조에 소극적이었다. 십자군들은 자력으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살라딘은 1180년 투르크와 동맹을 맺고 1183년에 알레포를 점령했다. 모술관 동맹을 맺은 다음에 십자군과 4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어 십자군들의 역습을 막고 세력 굳히기에 들어갔다. 그는 서유럽인들을 혐오하던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쿠스 1세와 협상하여 동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십자군이 도움을 받을 최후의 여지까지 없앴다.

2.4 예루살렘의 위기

문둥이 왕 보두앵 4세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했고 예루살렘의 권좌를 놓고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몬페라토 후작 굴레엘모, 왕의 여동생 시빌라, 티레 대주교 기욤, 기 드 뤼지냥, 르노 드 샤티용이 얽힌 예루살렘의 파벌 다툼은 고조화되었다. 시빌라와 결혼해서 야파와 아스칼론의 영주가 된 새로운 섭정 기 드 뤼지냥은 보두앵 4세와 극렬히 대립했다. 보두앵 4세는 기 드 뤼지냥을 섭정에서 해임했지만 몸 상태 때문에 새로운 섭정을 뽑아야 했고 트리폴리의 레몽을 10년 임기의 섭정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공동 지배자인 조카 보두앵 5세를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레몽은 자신의 정적 쿠르트네의 조슬랭 3세와 협상하여 만약 보두앵 4세가 죽을 시에 섭정 자리를 그에게 넘기겠다고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1185년 보두앵 4세가 승하했고 보두앵 5세가 즉위했다.

그런데 조슬랭이 반란을 일으켜 아크레와 베이루트를 장악하였고 격노한 레몽은 나불루스에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의 파벌을 제외한 귀족들은 소집을 무시했다. 결국 내전은 불가피했으며 살라딘은 즐겁게 기독교도들의 팀킬을 구경했다.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는 재빨리 시빌라를 예루살렘 여왕으로 즉위시켰다. 시빌라는 편법을 써서 자신의 남편 기 드 뤼지냥에게 왕위를 주었다. 레몽은 티베리아스로 퇴각해 살라딘과 동맹을 맺어 도움을 요청했고 살라딘은 기꺼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한편 르노 드 샤티용과 기 드 뤼지냥의 관계는 엉켜버렸고 르노는 순례자들을 약탈하면서 제멋대로 굴었다. 이미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호전성으로 곤욕을 치른 르노였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트랜스요르단이 자신의 독립왕국이라면서 행패를 부렸다. 결국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선전포고했다.

2.5 하틴의 뿔과 예루살렘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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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의 예루살렘 원정

상황의 심각성을 안 레몽은 살라딘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예루살렘에 충성을 맹세했다. 예루살렘은 2만명의 대군을 소집했지만 1187년 7월 3일 살라딘의 병사 3만명에게 처참하게 격파당했다. 이것이 바로 하틴 전투다. 자세한 정황은 해당 항목 참조. 포로로 잡힌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딘이 직접 목을 벴고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을 모조리 죽였다. 이것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방위능력은 공백이 되었고 차례로 아크레, 아스칼론이 줄줄이 항복했으며 이벨린의 발리앙의 협상을 끝으로 (기독교도들은 덕분에 몰살은 면할수 있었다.) 10월 2일 예루살렘은 항복을 했다. 결국 트리폴리, 티레, 안티오키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살라딘의 손에 떨어졌다. 티레도 함락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2.6 3차 십자군의 결성

어쨌거나 예루살렘이 이슬람 교도들의 손에 다시 떨어졌단 소식은 지금까지 지원에 소극적이던 전 유럽에 충격을 전해주었다.[3] 교황 우르바누스 3세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그레고리우스 8세가 즉위하여 아우디타 트레멘디란 교서를 발표해 전 유럽에 7년간의 휴전을 선포하는 동시에 에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참회와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촉구했다. 전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십자군에 참석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칠리아 국왕 기욤 2세가 트리폴리에 대함대를 보내주어 트리폴리를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냈고 필리프 2세헨리 2세와 1188년 1월 21일 휴전을 맺고 같이 십자군을 선포했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도 십자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살라딘 십일조로 알려진 보통세의 부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십자군을 돕기 위한 세금을 바쳤다.

1189년 4월 70이 다 되어 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십자가의 서약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오랜 전투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이 성지까지 지나갈 영토의 모든 지배자들에게서 통행권을 보장받았는데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들까지 그에게 통행권을 주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우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노르만 족과 동맹을 맺은 일 때문에 그를 불신했다. 그는 프리드리히가 트라키아와 그리스 지역을 약탈할 것이며 심지어 콘스탄티노플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가지고 있는 '서로마의 황제' 자리 역시 거슬렸다. 이사키우스 황제는 살라딘에게 십자군의 진격을 방해해주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 소식은 새어나갔고 서유럽 전체가 격노했다.

3 진행 과정

3.1 독일 십자군의 출정과 와해

1189년 5월 11일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황제가 레겐스부르크를 출발했다. 그의 아들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와 남독일의 귀족들 대부분이 그와 함께했고 역대 십자군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의 십자군이 그를 따랐다. 온 유럽은 그리스도의 치욕이 곧 갚아질 것이라고 흥분했다. 이사키우스는 십자군의 진군을 방해했는데 격노한 프리드리히는 방해를 멈추지 않으면 동로마를 먼저 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동로마는 그가 자신을 황제로 칭하는 것을 문제삼았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논의할 것이 없다고 못박았다. 이사키우스 황제가 그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자 결국 십자군이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해버렸고 기겁한 동로마는 아드리아노플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1190년 2월 식량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널 함대를 제공했다. 1190년 4월 25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아나톨리아에 상륙하자 위협을 느낀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5월 18일 조약을 깨고 그를 습격했지만 독일 십자군은 투르크족을 개발살내고 이코니움을 점령해버렸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허겁지겁 통행권을 다시 보장해주었다. 십자군은 곧 아르메니아로 접어들었는데 6월 10일 살레프 강을 건너던 노황제는 익사했다.(...) 기세 등등하던 독일 십자군은 황당하게 종말을 맞았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극히 일부만 프리드리히 공작과 함께 진군했다.

3.2 아크레 공략

프리드리히 황제의 사망 소식에 십자군들은 멘붕했지만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에서 강력한 십자군이 오고 있단 사실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188년 6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과 십자군 귀족들은 살라딘에 다시는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는데 석방되자마자 맹세를 준수할 의무를 면제받았다. 기 드 뤼지냥은 재빨리 티레로 향했는데 티레의 지배자인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지배권을 기 드 뤼지냥 따위에게 줄 생각이 없었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체 몇달이나 성밖에 방치하는 굴욕을 안겨다주었다.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국왕과 티레의 영주의 다툼에 크게 놀랐고 상황을 모르던 그들은 모두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들어주었다. 피사에서 온 십자군들이 기 드 뤼지냥을 따를 것을 맹세하자 기 드 뤼지냥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아크레를 공격했다. 아크레의 수비군은 십자군의 몇배에 달했고 공격은 무의미해보였다. 하지만 이는 전략적으로는 엉망이었지만 정치적으론 대성공이었는데 기 드 뤼지냥의 아크레 공격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기 드 뤼지냥은 부하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이교도에 맞서는 위대한 십자군의 기사의 이미지를 얻었고 이에 감동받은 십자군들이 앞을 다투어 기에게 합류하면서 코라도는 병신이 되었고 기는 대단한 위신을 얻었다. 결국 코라도도 1189년 9월 기의 공격에 합류했고 1190년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10월 7일 독일 십자군의 잔여세력까지 기에게 합류하면서 기의 보잘것없는 군대는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시빌라 여왕과 두 딸이 모두 사망하면서 기 드 뤼지냥은 왕위를 잃었다. 이제 남은 왕족은 토론의 험프리와 결혼한 이자벨 공주 뿐이었는데 코라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자벨을 억지로 이혼시킨 다음에 1190년 11월 24일 아내로 삼고 예루살렘의 왕위를 요구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브레멘과 뤼베크에서 온 독일 상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독일 성 마리아 병원을 세웠고 이것이 수도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클레멘스 3세의 승인을 얻어 1198년에 군사조직이 되는데 우리는 이들을 튜튼기사단이라 부른다.

3.3 영불 십자군의 출발

원래 영국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189년 부활절에 출병하고자 했으나 애로사항이 꽃피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헨리 2세의 아들인 리처드가 부왕이 후계자로 자신이 아닌 존을 앉히려는 걸 알고 반란을 일으켰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편을 들어 휴전 협정을 깨고 헨리를 공격했고 헨리 2세가 7월에 사망하고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로 즉위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다. 32세의 리처드는 위엄있는 풍채에 대담무쌍한 성격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휘어잡았다. 그의 무력과 전략은 대단했는데 토머스 매든 교수는 그를 중세 최고의 전략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참고로 이 사람은 리처드의 빠다. 그에 의하면 최고의 전략가(...) 리처드는 이교도 왕과의 싸울 기회를 당연히 수락하여 이미 왕자 시절에 헨리 2세의 명령을 어기고 십자가의 서약을 한 바가 있다. 국왕이 된 그의 앞길을 막을 것은 없었다.

한편 25세의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완 대조적으로 왜소한 체구에 신경질적인 남자로 매력이 없었고 리처드의 존재감에 밀리는 처지였다.[4] 형식상 그가 리처드의 주군이긴 했지만 그는 이때까지 영향력이 부족했고 자신의 봉신인 리처드보다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약했고 결국 3차 십자군 내내 리처드에 가려져 있게 된다. 1190년 7월 4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출병했다. 그들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했다. 필리프는 제노바에서 함대와 식량을 확보한 후에 출발했지만 리처드는 자신의 함대가 포르투갈에서 이슬람 교도들과 싸우는 것을 마르세이유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다 지쳐 직접 함대를 구해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이동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함대가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새 국왕 탕크레드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싸움이 붙었다. 시칠리아의 전 국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의 누이 조안이었는데 리처드는 그녀가 시칠리아로 가져간 지참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탕크레드는 리처드가 이 싸움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를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지체했고 분노한 리처드는 10월 4일에 메시나를 점령해버렸다. 그런데 필리프 2세가 출발 전에 모든 공로를 반으로 나누자고 한 서약을 들먹이며 메시나의 반을 요구했다. 그는 메시나 공격을 거부했는데도 말이다. 탕크레드는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지참금을 돌려주었는데 필리프는 지참금의 반이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귀찮아진 리처드는 지참금의 삼분의 일을 주었다. 이후에도 필리프는 자주 리처드에게 자신이 무시당했다면서 여러 트집을 잡았다. 리처드가 나바라 왕 산초 7세의 딸 베렝가리아와 약혼하자 필리프는 리처드가 과거 자신의 누이 알리스와 약혼한 사실을 들먹이며 다시 배상금을 뜯어냈다. 1191년 3월 20일 필리프는 아크레를 향해 떠났고 리처드는 자신의 함대가 도착하자 4월 10일에 출항했다.

3.4 키프로스 공략

4월 20일 아크레에 도착한 필리프 2세는 코라도와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필리프 2세는 대부분의 영주들의 지지를 받던 코라도의 편을 들었고 코라도와 함께 아크레 공략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한편 리처드는 폭풍우를 만나 배 몇척을 잃었는데 난파한 사람들을 키프로스의 지배자 이사키우스 콤니노스가 억류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사키우스는 용케 난파를 피한 조안과 베렝가리아도 포로로 잡으려 했지만 현명한 여인들은 이사키우스의 상륙 요구를 거부했다. 잠시 분기탱천한 리처드가 함대를 이끌고 자신의 재물과 사람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악마를 못 알아본 이사키우스는 즐쳐드셈으로 대응했지만 리처드는 그의 군세를 작살내고 키프로스를 삽시간에 점령했다. 이사키우스는 쇠고랑을 채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리처드는 약속을 지켜 그에게 은고랑을 채웠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후 키프로스는 4백년간 서유럽의 지배를 받게 된다.

3.5 아크레 점령

리처드는 키프로스가 중요한 전략 요충지라는 것을 깨닫고 3차 십자군 원정 내내 키프로스에서 물자를 공급받았다. 키프로스에서 리처드는 기 드 뤼지냥의 방문을 맞이했다. 기 드 뤼지냥은 과거 리처드와 악연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 전에 그를 푸아투에서 쫓아낸 사람이 바로 리처드였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와 필리프 2세가 이미 콘라도를 지지하는 상황에 그의 미래는 어두워보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기를 지원하기로 했다. 한편 아크레 공략이 순조롭지 못하자 필리프의 병사들은 리처드가 오길 학수고대했고 이를 안 필리프는 무척이나 불쾌해했다. 6월 7일 리처드는 이슬람 수송선을 침몰시켜 천명이나 되는 이슬람 지원군을 물귀신으로 만들며 등장했다. 리처드가 상륙한 직후 리처드와 필리프는 모두 병을 앓았는데 병이 낫자마자 필리프는 키프로스의 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이 요구는 리처드도 씹어버렸다. 7월 12일 잉글랜드와 피사 군대의 연합군이 아크레를 함락시켰다. 살라딘은 예수의 십자가와 1천명의 기독교도 포로를 반환하고 20만 디나르의 몸값을 내는 조건으로 리처드가 사로잡은 수비대 2700명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고 리처드는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예정된 날짜까지 돈을 주지 않았고 리처드는 살라딘이 보는 앞에서 포로들을 학살했다. 이에 살라딘도 노하여 8월 27일 케사리아에서 사로잡은 십자군 포로들을 여자를 제외하곤 모두 처형했다.

필리프는 아크레 함락 직후 돌아가겠다고 했다. 프랑스 귀족들과 십자군 영주들, 리처드까지 만류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필리프는 자신이 돌아가는 이유가 프랑스 내부의 리처드의 영지를 가로채려는 것이 아니라고 맹세하며 돌아갔지만 곧 거짓말로 드러났다. 어쨌거나 필리프는 돌아가기 전에 예루살렘의 왕위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리처드와 상의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대신에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부르고뉴의 위그가 프랑스 십자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십자군을 지휘할 자금이 부족했다. 결국 리처드가 모든 십자군을 다 통솔하게 되었다. 한편 코라도는 이 결정에 화가 나서 마음대로 하라면서 티레로 돌아갔다.

3.6 야파 공략

살라딘이 내륙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기에 리처드는 보급을 함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내륙 지방인 예루살렘을 공략하기엔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따라서 리처드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야파를 함락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리처드의 군대가 야파로 향하기 시작하자 살라딘의 군대가 그 배후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하지만 리처드는 추호의 빈틈도 내놓지 않았다. 가장 취약한 부대들을 해안 쪽으로 진군하게한 그는 보병과 기병을 내륙 쪽에 배치하여 내부를 보호했고 뜨거운 날씨를 고려해 조금씩만 행군했다. 살라딘은 화살을 쏘면서 십자군을 도발했지만 리처드의 강력한 통솔력에 십자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행군했다. 수십대의 화살공격에도 십자군 보병대들이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행군하는 것을 본 살라딘의 전기 작가인 바하 앗 딘조차도 십자군의 규율에 감탄했다.

따라서 살라딘은 계속 초조해졌다. 그가 소집한 에미르들은 십자군을 강타할 것을 요구했고 살라딘은 요구를 받아들여 9월 7일에 아르수프 북쪽에서 리처드의 군대를 공격했다. 구호 기사단이 리처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바람에 잠시 위기가 있었으나 리처드는 제때 지휘력을 발휘하여 살라딘의 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살라딘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달아났고 하틴에서의 손쉬운 승리에 방심하던 이슬람 영주들은 모두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살라딘은 이후 다신 리처드와 직접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살라딘은 야파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파의 성벽을 허문 다음에 병사들을 아스칼론으로 철수시켰다. 리처드는 야파를 점거하고 다시 성벽을 쌓았다.

3.7 예루살렘 왕위의 안정

이제 리처드에겐 세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가 예루살렘 공격, 둘째가 아스칼론 공격, 셋째가 외교적 협상이었다. 리처드는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아스칼론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지만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이 눈앞에 있는데 왜 다른 도시를 먼저 쳐야 하냐고 반발했다. 이에 리처드는 예루살렘과 아스칼론을 동시에 공격하는 한편 살라딘에게 외교관을 파견했다. 살라딘은 아스칼론도 포기하고 역시 성벽을 허물고 병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물렸다. 1191년 10월 리처드의 사절이 살라딘에게 평화 협상을 제시했다. 살라딘의 동생 사이프 알 아딜과 리처드의 누이 조안을 혼인시키고 두 사람이 공동으로 요르단강 서안을 지배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해였다. 살라딘은 이 주장에 솔깃했지만 사이프 알 아딜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단 사실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살라딘은 코라도에게 자신과 동맹을 맺고 리처드를 공격하자고 요청했으나 코라도는 리처드를 엿먹이는 일은 기꺼이 환영하겠지만 리처드를 전장에서 만나긴 싫다고 했다. 살라딘도 고개를 끄덕했을 대답...

리처드는 아스칼론을 점거하고 수비대를 배치하려 했지만 부하들의 반발로 아스칼론을 방치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야 했다. 그는 야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새를 점령하면서 그것들을 모두 수리하여 전략기지로 삼았는데 덕분에 진군이 매우 둔화되었다. 하지만 십자군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었다. 1192년 1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베이트 누바에 닿았다. 십자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략을 앞두고 귀족 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더라도 내륙에 있어서 십자군이 귀국하면 방어할 수 없다고 도시를 공격하지 말자고 했다. 이에 십자군 지휘관들도 동의하여 그들은 다시 회군하여 아스칼론을 먼저 점령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회군한 것에 대해 길길이 날뛰었고 부르고뉴의 위그 등은 분노하여 십자군을 이탈하여 야파와 아크레 등으로 떠났다.

1월 20일 리처드는 조카인 상파뉴의 앙리와 함께 아스칼론에 도착하고 아스칼론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살라딘과 코라도와 동시에 협상을 진행했지만 어느 쪽도 진전이 없었다. 코라도는 기와 관계된 군대는 돕지 않겠다고 요지부동이었고 리처드의 동생 존이 필리프와 결탁하여 앙주의 리처드의 영토를 노린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면 살라딘이 이길 것이다. 결국 리처드는 귀족회의를 다시 소집하여 예루살렘의 왕위를 코라도에게 주었고 대신 기에겐 키프로스를 주었다. 코라도는 이 결정에 매우 흡족해했지만 1192년 4월 28일 아사신들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십자군 귀족들은 상파뉴의 앙리에게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주길 청했다. 앙리는 이자벨과 결혼하여 남은 십자군 영토를 다스렸지만 스스로를 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 칭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예루살렘의 내분이 안정되면서 리처드는 레반트 지역의 모든 기독교도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리처드에게 예루살렘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생 존의 뒤통수에 리처드는 갈등했다. 고심하던 리처드는 자신이 1193년 부활절까지 성지에 남아있을 것이며 예루살렘 공략이 가능하면 실행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7일 십자군 아스칼론을 떠나 예루살렘을 쳤다. 하지만 예루살렘엔 이슬람 대병력이 주둔하여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살라딘이 해안을 차단하면 예루살렘을 지킬 수도 없었다. 결국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려면 살라딘의 세력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이집트를 치기로 했지만 부르고뉴의 위그 등이 자꾸 딴지를 걸었다. 리처드는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실패할 것이 뻔한 계획에 부하들을 개죽음시키진 않겠다고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은 또 다시 회군해야 했다. 회군한 후에도 십자군 내부의 반발이 심해서 결국 이집트 원정은 백지화되었다.

3.8 평화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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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종결 이후 레반트 지역의 지도

이집트 원정이 백지화된 이상 더 이상 십자군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살라딘이 이집트를 가진 이상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없으며 탈환해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십자군들은 팔레스타인 해안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휴전을 요청했다. 살라딘도 지쳐서 있었고 리처드의 가공할만한 무력에 질린 에미르들도 협상을 촉구하고 있었다. 살라딘도 협상에 응했다. 하지만 중요 요충지인 아스칼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리처드는 당연히 거절했다. 1192년 8월 리처드가 병에 걸려 쓰러졌는데 필리프와 존이 그의 프랑스 내부 영토를 회치고 있단 소식이 전해졌다. 리처드는 더 이상 레반트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으니 돌아가야만 했다.

9월 2일 3년간 휴전한다는 협정이 맺어졌다. 살라딘은 야파에서 티레까지 이어진 십자군 영토를 존중하기로 했고 기독교도들의 순례를 보장했다. 트리폴리와 안티오키아의 영주들도 이에 참여할 수 있었고 대신 리처드는 아스칼론을 살라딘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그냥 주지는 않고 성벽을 허물고 주었다. 십자군 기사들이 예루살렘의 성묘를 참배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에게 돌려드리기로 한 서약을 완수하기 전엔 예루살렘을 밟지 않겠다고 참배를 거부했다. 1192년 10월 9일 리처드는 자신의 왕국으로 귀환했다. 언젠가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4 여담

리처드 1세는 귀국 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포로로 잡혀서 신성로마제국에 이송된 후,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1194년 봄에야 풀려났다.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내에 막대한 세금이 부과된 것은 덤. 이 시기를 다룬 소설 혹은 전설이 바로 로빈 후드이다. 존 왕은 형 몸값 벌려다가 덤터기나 썼다 이후 그는 존과 필리프 2세의 언플로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기겁한 존은 형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안습한 그의 경력은 왕이 되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내의 문제가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도 자기가 한 말대로 중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필리프 2세와 다른 프랑스 제후들과의 거듭되는 분쟁 도중 갑주도 걸치지 않고 진영을 순시하다 저격당해 죽었다.

한편 1193년 3월 4일 살라딘도 부활절을 3주 남겨놓고 사망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동생 알 아딜 등에 유지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이슬람 세계도 균열을 맞이한다. 만약 존과 필리프의 방해 공작만 아니었으면 리처드는 성지에서 살라딘의 죽음을 맞았을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5 평가

리처드 1세의 활약으로 제3차 십자군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틴의 뿔' 전투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이 대패하면서 제3차 십자군이 모집되었는데, 그 하틴의 뿔에서 살라딘이 대승한 이래 잃거나 위험해진 땅들 중 지중해 연안 도시들은 리처드 1세의 활약으로 대체로 되찾거나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장악한 것 외에는 팔레스타인 해안 장악과 십자군의 완전 축출이란 다 잡은 성공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내륙의 도시들은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린 전국(戰局) 자체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는 제1차 십자군 때와는 반대로, 통일된 이슬람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도교 세력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6 미디어에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이 3차 십자군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1편 배경이기도 하다.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의 십자군 캠페인을 하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 등 3차 십자군의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외에 미디블2 토탈워의 모드인 브로큰 크레센트가 3차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특히, 유럽에서도 최고의 세력을 자랑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1152~1190)와, '사자심왕'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했던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1188~1199), 중세 프랑스 왕권을 확립한 업적으로 '존엄왕'(오귀스트)으로 불리었던 필리프 2세(1180~1223) 등, 당대 유럽의 내로라하던 군주들은 모두 참가했기에 일명 '왕(들)의 십자군'이라 불릴 정도의 위세를 자랑하였다.
  2. 리처드 1세가 열병에 걸리자 살라흐 앗 딘이 장미 샤베트(그러니깐 적장을 위해 사막에서 얼음을 구해왔단 이야기다!)를 구해다 주며 빨리 나으라고 한 대인배 사례나, 그런 살라딘이 호의로 준 을 타고서는 이슬람 군의 목을 베고 다녔던 리처드 1세의 용력 등등.
  3. 여담으로 살라딘은 비록 적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크리스천들에게도 상당히 신사적으로 대우했다고 한다. 1차 원정 당시 십자군이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무슬림과 유대인의 피를 흘린 것(상당수는 추방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많은 이들을 살해했다.)과는 매우 대조적.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선 농담삼아 우르바누스 3세가 죽은 원인 중 하나로 이걸 언급하며 당시 십자군의 야만스러웠던 행태를 깠다.
  4. '리처드빠(...)'인 토머스 매든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매력'에 관해서라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존재감'이라면 섭정정치의 그늘에 가려있던 필리프 2세보다는, 자그만치 아버지를 내쫒아 죽게 만들고 막 왕이 된 리처드 1세가 분명 크긴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