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리그의 심판
후보: 갈리오
날짜: CLE 20년 8월 10일
관찰
갈리오의 얼굴은 뭔가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특유의 이런 표정 때문에 이 육중한 가고일이 멍청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이목구비, 특히 부정교합이 심하고 유난히 발달한 턱은 꼭 얼간이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이건 갈리오가 생각이 굼뜨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적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법으로 새겨 넣은 표정이다. 사실, 갈리오는 이런 표정으로 위장한 채 눈 앞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이 곳에서 중요한 건 두 짝으로 된 문,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문구뿐이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갈리오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은 움직이질 않는다. 문자 그대로 석상 같이 굳어있는 것이다.
한참을 멈춰 있던 갈리오가 갑자기 몸을 움직여, 육중하게 문 쪽으로 다가간다. 넓고 튼튼한 날개를 쭉 펼쳐 고요히 정지해 있는 공기를 가르며 천천히 퍼덕이자, 그리 부드럽진 않은 쉬익 소리와 함께 가고일의 몸뚱이가 앞으로 튀어나간다. 바위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는 최대한 우아한 동작이라고나 할까.
문이 활짝 열리며 실내에 깔린 칠흑 같은 어둠이 드러난다. 입구 양쪽 측면에 새겨진 흑요석 표범들이 마치 안쪽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갈리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돌로 만들어진 형제의 지시에 기꺼이 따른다.
회고
갑자기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갈리오는 바로 여기가 어딘지 알아챘다. 이 곳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과실수들로 빽빽이 둘러싸인 공터, 그 중앙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리며 하얗게 바래버린 듀란드의 유골이 놓여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복숭아와 버찌의 농익은 향이 진동했다.
갈리오는 이 냄새가 진저리나게 싫었다. 끝도 없이 자라나 익고 썩기를 반복하는 과일의 지독한 단내가 자신을 창조해냈던 듀란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비통함을 자꾸 일깨웠기 때문이다. 그는 매복 중이던 녹서스 암살자들의 마수에서 주인을 보호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곳에서 수년 간 속죄하는 마음으로 보초를 서 왔다.
대신 날 죽였다면 좋았을 것을. 갈리오의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지만, 지금만큼은 뭔가 달랐다. 반갑지 않은 생각이 마치 자기 생각인 양 가면을 쓰고 그의 의식을 파고든 것이다.
아니, 그렇진 않지.
갈리오가 제 자리에서 자세를 바꾸며 머리 속에 파고드는 이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자신이 실제론 이 곳에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 모든 게 너무나 생생했다. 끈적끈적한 과일의 단내 때문에 마음마저 초조해졌다. 이건 아직 심판을 받고 있는 건가?
“맞아, 데마시아의 갈리오.”
여성의 것으로 들리는 새되지만 힘 있는 요들의 음성이 그의 의문에 응답했다.
근처 그루터기에 낯익은 얼굴이 앉아있었다. 갈리오가 아는 여자 요들이었지만, 처음 바로 여기에서 만났을 때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땐 데마시아의 전사가 입는 갑옷 차림이었다. 지금은 이름이 뽀삐라는 걸 알지만, 이 요들을 처음 만난 날은 이름조차 몰랐었다. 그 땐 뽀삐에게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티도 내지 않았다. 뽀삐 역시 공터에 서 있는 갈리오를 봤지만, 단순한 석상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존재로 여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넌 뽀삐지.”
갈리오가 신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 골라 말했다.
“난 널 안다. 리그에 합류하기 전이었지. 널 봤다. 여기서.”
요들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약간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그래, 넌 여기서 뽀삐를 만났지. 그런데 안타깝지만 난 뽀삐가 아니야.”
요들 소녀가 몸을 일으켜 갈리오 쪽으로 다가오면서 한 손을 내밀었다.
“너도 그건 알고 있지.”
소녀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원한다면 날 계속 뽀삐라고 불러도 좋아.”
몇 년 동안이나 이 곳을 감시해 왔던 그였지만, 이번 단 한 번만큼은 매복 지점이나 방어 상의 취약점을 분석하지 않고 그저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자 갑자기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무에서 풍기는 냄새를 싣고 가 버렸다. 잎사귀들이 부드럽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바람의 리듬을 타고 빙글빙글 춤추듯 떨어지는 꽃송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갈리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을 내밀어 요들 소녀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바위로 조각된 가죽 위로 피부의 온기가 느껴졌다.
“고맙구나, 뽀삐야.”
뽀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리그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갈리오?”
톡 쏘는 듯한 과일향이 다시 공터로 밀려들어오자 갈리오는 조금 초조해졌다.
“난 데마시아를 위해 싸워야 해. 내 창조자의 고향이니까.”
뽀삐가 가고일의 다른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갈리오를 똑바로 마주보며 서서, 상냥하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갈리오?”
갈리오는 뽀삐의 질문을 곰곰 생각해 봤다. 이 요들은 진짜 뽀삐가 아니었지만, 뽀삐의 형상을 빈 데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됐다. 그리고 자신을 유배에서 풀어준 것이 이 단호한 요들 소녀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소녀 역시 엄청나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능했었다. 갈리오 역시 어떻게든 극복하려 몸부림쳤던 똑 같은 마음의 짐, 바로 실패했다는 부담감이었다. 갈리오는 나중에 알아낸 바로는 뽀삐 역시 녹서스 암살자들이 자행한 매복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똑같이 겪었지만, 둘이 대처한 방식은 사뭇 달랐다. 뽀삐는 아버지가 데마시아 장군을 위해 주조한 왕관을 전달해야 한다는 임무를 완수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하지만 갈리오가 택한 것은… 정반대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선택이 그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그가 지키고 있던 것은 창조자의 유해가 아니라, 오로지 상처 입은 그의 자만심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갈리오는 잠시 부끄러움에 뽀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답을 알 수 있었다.
“내 스스로 선택했기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이건 내 자유 의지다. 내 창조자와… 내 고향을 위해 싸우고 싶다.”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다시금 코를 찌르는 향내가 가셨다. 갈리오는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 미소를 지으며 뽀삐를 내려다봤다.
“그건… 내겐 익숙한 일이야. 창조자와 마음을 나눴었으니까. 이젠 너와 마음을 나누고 있고. 앞으론 어떤 소환사와도 마음을 나누겠다.”
또 한 번 빛이 갈리오에게 쏟아져 내려왔다. 홀로 서 있는 그의 앞엔 이제 다른 문이 한 쌍 보였다. 이번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갈리오는 문을 활짝 열고 리그 오브 레전드에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