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甲骨文/Oracle bone script
BC1200년경에 처음 등장한 중국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중 하나이자, 현대 한자의 원형문자.
2 발견사
거북이의 배딱지나 짐승의 갑골에 새겨진 상형문자로, 주로 중국의 은허(殷墟) 지역에서 파편 형태로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사실 명나라 말기에 은허 지역은 농촌이었다. 종종 밭을 개간하던 농민들의 의해 상나라의 유물인 청동 기물이나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거북이 껍질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는 시장에 매물로 팔렸으나 갑골문은 뼈로서 귀해 보이지 않아 매물 신세를 면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군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청나라 광서(光緖) 말년에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발을 갈다가 갑골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갑골문을 고대 문자라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문양이 새겨진 뼈라고 인식하였다. 뼈는 농사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골칫덩어리로 판단한 농민들은 갑골문을 한약방에 팔아버렸다. 이렇게 갑골문은 용골이라는 귀한 약재로 취급받았다.
문화재 수난사였다. 의도적인 파괴도 아닌, 식용 약재로서 파괴된 것이다. 그러다가 금석 학자였던 왕의영(王懿榮)이 이 용골에 새겨진 문양이 고대 문자였음을 알아내어 1890년대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당시 거북이 껍질에 새겨진 갑골문이 층층이 겹쳐져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상나라 궁실에서 점복 결과 기록물을 보관하던 건물터라는 결론을 짓게되었다. 갑골문이 어느정도 해독이 되자 학자들의 관심사는 사마천의 사기의 내용이 주목되었다. 청나라에 고증학이 대두되어 오제본기-은본기의 상당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학설이 있었는데, 갑골문에서는 오히려 사기의 내용을 지지해주었다. 갑골문에서 등장하는 상나라 왕의 묘호와 사기의 왕의 묘호의 순서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상나라는 학계에서 고대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한 프랑스 학자가 갑골문으로 은나라 역사를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갑골문이 발굴된지 얼마 되지않아 이 생소한 학문은 해외는 몰론 중국 본토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그후 청나라가 민국으로 교체된 뒤 각지에서 군벌들간의 전쟁으로 치안이 혼란했을 시기에도 은허에서는 갑골문 발굴과 해독은 계속되었다. 민국 말기에는 동주어빈(董作賓) 학자가 갑골문 연구를 주도했고, 현재 중국 초반에는 궈뭐뤄(郭沫若) 학자의 의해 주도되었다. 참고로 동주어빈이 갑골문으로 재구성한 상나라의 달력, 은역보(殷歷譜)를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학계에서 문제점과 난해함이 지적되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갑골문 학계에 위상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을 기반으로 상나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렇기에 은역보를 통해 갑골문을 접했었던 한국의 김경일 교수는 은역보의 단점을 나열하면서도 긍정적이었던 학계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3 해석
현재까지 대략 1만편 이상의 갑골문을 출토 발굴했다. 그러나 학계에서 대다수가 동의하는 해독된 갑골문은 겨우 1천여자 에 불과하다. 갑골문은 한자의 원형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 한자의 자형은 남북조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갑골문과의 자형이나 모양적으로 괴리감이 심하다. 새벽 조(朝)나 아침 단(旦), 비 우(雨), 어조사 우(于)와 같이 무척 단순한 형태의 자형은 현대 한자의 자형과 거의 일치하여 학계에 이견이 없지만, 그외에 갑골문의 자형은 사람이나 동물, 어떤 손짓, 어떤 형상을 그대로 그려낸 영락없는 상형문자로 해독에 있어 큰 이견을 낳게 만든다.
갑골문은 한자의 원형이지만, 당대에만 그친 자형이 존재한다. 또 현대 한자와 자형이 얼추 일치한다고 한들 갑골문의 배경은 기록이 아닌 제례적인 목적 강하기 때문에 또다른 고고학적 해석 문제를 낳게된다. 문장 해석에 있어 갑골문은 즉흥적으로 제 순서가 없이 그것도 문법은 엉망으로, 배열이 흐트러진 채로 기록되어있다. 또 기록자가 이전까지 통용되던 자형을 조합하여 단 1회용 문자를 창조하는 경우도 있어 학계를 당황하게 한다.
몰론 갑골문 학계에는 해독에 있어 단비와 같은 문자가 존재한다. 금문(金文)이다. 금문은 주나라의 상형문자다. 고고학적으로 주나라의 유적지에서 갑골문 파편이 출토되었고, 금문의 형태가 갑골문과 거의 일치하여 한자적 연관성과 뜻을 유추하는데 있어서 상호관계의 역할이다. 그러나 금문 자체에서 현재 한자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한자, 예를 들면 사랑 애(愛), 지식 지(知), 땅 지(地)와 같이 갑골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주나라만의 독창적인 문자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금문은 갑골문과 한자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중간 다리의 역할을 하지만, 또다른 난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갑골문의 자형은 주로 손 우(又), 나무 목(木), 눈 목(目), 발 지(之), 여자 녀(女), 집 면(宀) 등으로 일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제례와 관련되는 문자는 무당으로 추정되는 여자 녀(女)가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어려울 간(艱)에는 갑골문 자형으로는 여성이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으나 나중에는 여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갑골문은 점술 결과를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다. 일반적인 사건 기록도 존재하지만 흔하지 않다. 사기 귀책 열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거북이 껍질을 태워 그 징조를 살폈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 이는 고고학적 결과와 일치한다. 고고학적으로는 거북이 배딱지(복갑)나 등껍데기(배갑)[1]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은 모습과 균열이 보이고 있다.
갑골문 기사에는 왕이 직접 그 결과를 판단하는 형태의 제사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갑자일에 점을 쳤다. 왕이 그 결과를 보고 말했다. 삼일 뒤에 비가 내릴 것이다. 삼일 뒤에 비가 내렸다." 이런 형태로 왕의 점복 관여 흔적이 발견된다. 갑골문은 주로 무정(武丁)시기의 기사가 많다.
갑골문 해독 결과에 따르면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무려 70여명이나 되었다. 상나라 사람은 제(帝)라는 신에게 하늘과 자연의 뜻을 물었다. 제는 다섯 명의 신하를 거느린 상나라의 수호 신이었으나, 무정 사후 조갑(祖甲)이 즉위할 때부터 제는 그저 왕의 묘호로 전략해버렸다. 당연히 제에게 뜻을 묻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갑골문은 제례 목적으로서 기록된 문자로, 주로 군사적인 정벌과 같은 대업이며, 자연 재해의 문제를 아뢰고 기록하여 상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군사적 문제로는 강(羌)족과, 인방(人方), 주방(周方) 정벌 문제를 많이 제에게 뜻을 묻는다. 특히 갑골문 기록상 주방과 갈등이 심각한데 주방은 훗날 무력 혁명으로 상나라를 전복시킨 주나라로 갑골문에서는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를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상나라 사람이 주나라에 대해 품고있던 악감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주나라 또한 갑골문자를 사용했는데 역시 점을 칠때 상(商)자를 두고 옷 의(衣)자로 기록하여 비하 목적으로 추정된다. 옷 의의 발음은 "은"으로 추정된다. 또는 상나라의 수도 은(殷)을 비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4 기타
상나라의 마지막 국호는 사실 은(殷)이 아닌, 천읍상(天邑商)으로 은(殷)은 도시 이름이다.
상나라는 수도를 중심으로 같은 성의 제후를 봉하였다. 같은 성의 제후에게 읍(邑)을 하사하여 군사적으로는 수도를 보호하고, 주변 이민족을 감시하였다. 받을 수(受)와 받들 봉(奉)자의 갑골문 자형으로 추정해보면 제후에게 기념수나 정교한 배를 하사했을 것이다.
왕의 이름을 단 한 글자로 겹쳐서 기록하는게 유행했었다. 동주어빈은 갑골문의 서체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었다.
사기 귀책열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나무 가지나 거북이 껍질을 사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고 나면 이를 모두 버렸다. 한번 점을 친 것은 보관해봐야 영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점치는 직책인 복관(卜官)이 이를 소중히 여겨 보관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은 층층이 아래서부터 겹친 상태로 발견이 되는데, 이는 상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보관을 했다는 말이 된다. 갑골문을 소홀히 여겼다면 따로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귀책열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 가상국가 하나라가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귀책열전은 사마천의 원본이 사라져 저소손이 보충했으나, 내용이 난잡하고 가독성이 떨어지기로 유명하다.사실 저소손 땜빵이 다 그렇다
- ↑ 등껍데기는 단단해서 쓰기 어려워 배딱지가 많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