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38년 6월 중순경 민간 사회교화단체 대표자들이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로, 일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선도적 역할을 했던 친일 단체이다. 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기구를 개편했다.
2 성립
1938년 6월 22일 부민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7월 7일 민간 사회 단체 대표자들이 조선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결성한 친일 전시동원 선전 조직이다. 같은 해 6월 22일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며 한일 양국의 59개 단체, 56명의 발기인이 참석했는데, 한국 측에서는 윤치호(尹致昊), 최린(崔麟), 김활란(金活蘭), 김성수, 박흥식(朴興植), 방응모(方應模) 등 27명, 25개 단체가 참여했다. 발기인 대회에서는 한상용 등 6명의 이사, 박영철 등 13명의 창립총회 준비위원을 뽑았다.
여기에는 59개 단체 및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총회에 참가한 발기인들은 취지와 규약을 정하고 한상용 외 6명의 이사 전형위원, 박영철 등 13명의 창립총회 준비위원을 선정하였다. 이어서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을 택해 경성운동장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성대한 발회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미나미 지로(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오노 로쿠이치로(정무총감) 등 군관민 유력자들과 7백여 단체, 개인 3만 명이 식장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었던 시오하라 도키사부로 이사장의 식사와 미나미의 고사(告辭), 대회선언문과 황군위문문 및 관계 요로에 보낼 전보문 채택, 고이소 조선군사령관 등의 축사 외 윤치호가 선창한 천황폐하 만세 3창으로 식순을 마쳤다. 그리고 두 패로 나누어 부청 앞과 총독부 앞으로 향하는 애국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날 채택된 대회 선언문은 “동양 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세계에 앙양함은 제국 부동의 국시이다. 우리는 이에 일치단결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양하여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 궁극의 목적을 관철”한다는 취지였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언을 철저히 보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3도 방방곡곡에 지역연맹이 조직되었다.
3 활동
지원병 독려는 물론 창씨개명 독려, 공출과 현금 독려, 폐품 수집, 일본어 강습회 등 활동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 단체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천강령을 보면, ① 황국정신 현양 ② 내선 일체 완성 ③ 비상시 국민생활 혁신 ④ 전시 경제정책 혐력 ⑤ 근로 보국 ⑥ 생업 보국 ⑦ 총후 후원, 즉 군인원호 강화 ⑧ 방공(防空) 방첩 ⑨ 실천망의 조직과 지도의 철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41년 12월 미·영 타도 대강연회(연사는 이광수·주요한·김동환 등)와 결전 부인대회(연사는 김활란·모윤숙·박순천 등)를 개최하여 황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2년 2월부터 근로보국운동의 일환으로 부녀층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군복 수리작업을 전개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인 7월 7일 창립 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통해 “동양 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의 대정신을 세계에 앙양함은 제국 부동의 국시이다. 우리는 이에 일치 단결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양하며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 궁극의 목적을 관철한다”고 연맹의 취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