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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지로 | 고이소 구니아키 | 아베 노부유키 | ||
小磯國昭 1880.03.22 ~ 1950.11.03
1 개요
일본판 하인리히 힘러
조선 소년소녀들을 전쟁터와 일본군 위안부라는 생지옥으로 몰아넣은 저승사자.
일본 상층부에서 고이소를 부르는 별칭은 조선의 호랑이. 성질이 더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웃기게도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한다.
일본의 군인 장성이자 8대 조선총독.
전임 7대 총독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1942년 8대 조선총독이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고 전임 총독이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를 학도병 제도로 강화개편하고 강제 징병제를 더하였으며 여기에 정신대나 위안부를 설치하여 무고한 조선 청년과 처녀 및 부녀자들까지 모조리 전쟁터로 내몰거나 일본군 노리개감으로 삼는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1944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일본 내각수상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고 종전 후 일본이 참패함에 따라 수상직을 사임하였다가 1950년 종신금고로 복역 중 죽었다.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 출신.
2 생애
2.1 조선 총독 고이소
1900년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04년 전임총독인 미나미 지로와 함께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였고 1916년 육군 참모부 부원, 1932년 육군차관을 거쳐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이후 조선 파견 일본군 사령관을 지내다가 1942년 전임 총독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8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조선총독이 되었을 때는 전임자의 조선 민족말살정책을 그대로 전수받아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및 한국사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이를 통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서 한글학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전임자가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를 학도병 제도 및 강제 징병제로 강화개편하여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소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고 여기에 위안부(정신대)를 설치하여 조선의 처녀 및 부녀자들을 일본군 막사 등으로 몰아넣어 일본군의 성 노리개감으로 삼는 만행도 저질렀다.
내외지행정일원화 조치를 통해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법역으로 취급하려고 했으며 내선평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일제강점기 항목에도 있지만 장기적으론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를 시키고 단기적으론 조선인들을 일본의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동원하려는 술책이었다.
이 자에 의해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소년들이 원하지도 않는 전쟁터에 내몰려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당해야 했으며 처녀 및 부녀자들도 위안부로 인해 일본군의 성 노리개감이 되어 수치를 당하는 등 현재는 노인이 되어서 살아남은 산 증인들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생지옥과도 같은 치욕과 고통을 떠올리기 쉬울 정도이다.[1]
후에 신민당 총재가 되는 이철승[2]이 학병거부운동을 벌이자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보려고 했지만 모욕만 당했다. 대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 '일본은 대동아 성전(聖戰)이라고 하면서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조선(朝鮮)만 독립시키지 않는가?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고이소 :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어야 해, 제군들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 (이철승 등을 보며) 어느 학교 누구인가?'
이철승 : '보성전문학교 이철승(李哲承)입니다'
고이소 : ' 김성수(金性洙)[3] 군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
학생들 : '이번에 전문대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하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2.2 총리 고이소
고이소 구니아키는 미군에게 일격을 가해 그 기회를 노려 대미 강화에 나선다는 입장을 보였다. 내가 귀싸대기를 때리면 감동먹어서 협상하겠지 그러나 육군 지휘부는 고이소의 의향을 따르지 않고 최고전쟁 지도회의에서 고이소는 발언시 하타 히코사부로(秦彦三郞)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근대적 작전용병을 모르는 수상은 발언할 자격도 없다"라는 수모를 당했다. 그래서 육군성 내부에선 "이 내각은 2달 밖에 갈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니아키가 육군의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였다. 구니아키가 육군대학에서 졸업 했을 때 성적은 55명 중에 33등이였는데 20등 이하의 성적을 가지고 출세한 자는 고이소 뿐이었기 때문[4]에 다른 육군의 엘리트들에게 젊었을 적부터 무시당했고 이로 인해 어느 파벌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서 육군 내부에 그의 편이 되어줄 강력한 파벌도 없었다. 하지만 고이소는 육군 내부에서 이상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 구니아키는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유연하다는 평도 들었는데, 1930년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성적과는 달리 의외로 실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연설했는데 연설 내용이 논리적이고 표현력이 매우 좋아서 군무국장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맡았어도 매우 두각을 드러냈을 정도였다.
고이소 내각
1944년 10월, 사이판 함락을 구실로 사임한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어 총리에 발탁되었다. 예비역이 된 후 조선 총독을 하는 등 오랫동안 군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임명된 까닭에 도조 히데키의 압력으로 스기야마 하지메를 육상으로 임명하는 등 육군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전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히로히토가 무어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1945년의 고이소 구니아키
그는 도조의 정책을 이어가는 개삽질을 강행했고, 가미가제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자폭기에 장갑을 덧대는 등(...) 병크 삽질은 계속된다. 일본군을 막장화하는 데에는 도조의 공이 지대(...)했지만, 고이소 구니아키도 도조 못지 않다. 게다가 고이소 구니아키는 굉장히 우유부단한 성격이였으며, 각 일본 육군이나 해군 내각에서도 고이소에 대해서 그의 능력에 대해 불신했기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로는 맞지 않았다. 미군이 일격을 가한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패배를 듣고 고이소 구니아키는 군부에 복귀해서 육군상을 겸직해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려고 했지만, 육군이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삽질들로 인해 고작 9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손발이 안 맞아 해군은 해군대로 패전하고, 육군과 해군의 알력싸움으로 골만 깊어지는 등, 되는 일은 없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고이소 내각은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일본이 독일보다 먼저 항복하면 독일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고 기록을 남겼다. 고이소 내각이 무너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고이소 구니아키가 정치 브로커를 이용해서 중국과 전쟁을 멈추자는 시도했지만 과거에도 이를 시도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고이소 구니아키는 외무상 시게미츠 마모루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해서 그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내부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고이소의 막장 운영에 지친 귀족 원로들과, 해군 출신 원로들의 연합탄핵으로 총리직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당했고 고이소 내각은 1945년 4월 7일 무너져 버려 고작 8개월만 지속된 단명 내각이 되어버렸다.
패전 후 연합국 측의 예비검사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검사가 "장군, 장군은 조선의 호랑이라 불려졌지요, 이제 그 이유를 답하시오"라고 질문하자, 고이소 구니아키는 "뭐,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보시다시피 내가 제일 못생긴 얼굴이요, 이 얼굴이 호랑이와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에 기록하던 여성은 매우 웃었다고 하며 검사도 웃으면서 "잘 알았소"하며 납득했다고 한다. 고이소 구니아키는 이 취조 과정이 자신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라고 여겼고 검사와 취조 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 결국 1948년 A급 전범으로 극동군사재판에 불려나간 고이소 구니아키는 A급 전범으로 종신금고형을 선고 받고 스가모 구치소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1950년 스가모 구치소에서 식도암에 걸려 사망. 그의 나이 70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