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ition of Rights
1628년 영국에서 국왕에게 청원된 국민의 인권과 권리에 관한 선언.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으로 평가 받는다.
1 국왕과 의회의 갈등
1625년 즉위한 찰스 1세는 왕권지상주의자였고 무리한 해외원정으로 말썽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 해외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삥강제적인 기부금과 임시 과세로 마련했다는게 문제였다. 유럽대륙에서 영국에 실질적 이득이 의문스러운 전쟁에 재정을 쏟아붓는게 옳은지에 대한 회의가 커져갔다.
게다가 당시 군대의 폭압적 행태도 문제였다. 찰스 1세는 돈안들이고 군대를 유지하려고 민간인들에게 병사를 부양하게 했고 이에 대해 반발하면 군법재판에 민간인을 넘기는등의 터무니없는 일들을 자행했다. 이런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의회에서도 이를 문제 삼았고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심해졌다.
2 권리청원
1628년 찰스 1세는 재정확충을 위한 특별세 부과를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이 기회를 찰스 1세의 폭정을 바로잡을 기회로 여겼고 국왕에게 요구할 사항들을 청원이라는 형태로 정리했다. 특히 이를 주도한것은 에드워드 코크로 마그나 카르타에 대해 법학적으로 논평한 최초의 인물인 그가 권리청원을 주도한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권리청원의 내용은
1. 어느 누구도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 함부로 구속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
2.국민은 군법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
3.군인이 강제로 민간인의 집에 머무를수 없다.
4.평화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할수 없다.
5.의회의 동의없이 과세할수 없다.
등이었다.
의회는 권리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특별세를 허가할수 없다고 맞섰고 결국 찰스 1세는 어쩔수없이 이를 받아들였으나이듬해인 1629년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11년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뒤끝 쩌네
그러나 11년후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과의 전쟁 패배로 거액이 배상금 지불 문제가 일어나자 찰스 1세는 어쩔수 없이 의회를 다시 소집했고 국왕과 의회의 갈등은 폭발해 청교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의의
권리청원은 비록 당시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나 후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첫째는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과세를 의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이후 민주주의 정치에서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에서 나와야 함을 명백하게 했다고 볼수 있다.
둘째로는 법에 의한 통치,즉 법치주의로 사람이나 폭력에 의한것이 아닌 법률에 의거한 통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볼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