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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찰스 1세(Charles I of England) |
부친 | 제임스 1세 |
모후 | 덴마크의 앤 |
생몰년 |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48년 2개월 11일) |
재위기간 | 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23년 10개월 3일) |
대관식 | 1626년 2월 2일(스코틀랜드) 1633년 6월 18일(잉글랜드) |
장례식 | 1649년 2월 9일 |
목차
"I must tell you, A subject and a sovereign are clean different things. If I would have given way to an arbitrary way, for to have all laws chang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word, I needed not to have come here, and therefore I tell you that I am the martyr of the people.""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신민과 통치자란 완벽하게 다른 존재다. 만약 짐이 모든 법률을 좌지우지하는 검의 힘으로 독단적 정치를 했다면,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짐은 국민의 순교자다!"
ㅡ 죽기 직전 단두대 앞에서.
1 개요
제임스 1세와 덴마크의 앤의 차남[1]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군주였다.
찰스 1세는 키가 작았으며, 늘 수줍음을 탔고 말이 적으며 내성적이었다. 잘 알려진 반 다이크의 초상화[2]보다 실제의 위엄은 덜했다고 한다. 신앙심이 돈독하였기에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궁정 내의 저속한 분위기가 즉시 사라졌다고 한다. 독실한 성공회신자였고, 이 시각에 입권해 교권강화는 곧 왕권강화, 또 왕권강화는 곧 교권강화라는 입장이 강했다.#
당시 왕족의 결혼이 그랬듯이 즉위 직후 정략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누이인 앙리에타 마리아였다.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는데다가, 왕의 측근들은 프랑스에서 온 왕비를 홀대하도록 왕을 부추겼기에 초기에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3] 그러나 왕비의 반대파가 죽거나 실각한 후에는 부부 사이가 좋아졌으며 자식도 몇 명 두었다.
찰스 1세의 치세는 국제 정세와 국내의 기독교 종파간 갈등, 의회와의 권력 분쟁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며, 이후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지도하는 의회군에게 패배하여 재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 모래성 위의 왕권
제임스 1세는 선대왕인 엘리자베스 1세의 능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제임스 1세가 사망한 후 차남인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막 즉위한 찰스가 당면한 문제는 그의 아버지 대부터 올라가고, 오랜 시간 동안 곪아 있었다. 튜더 왕조 시절에는 귀족과 지방 호족들이 왕실에 고분고분하였다. 그러나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부터 그들은 점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들어온' 왕조였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계였다.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리 강력한 왕조는 아니었는데, 잉글랜드 왕위를 운 좋게 얻기는 했지만 세력은 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헨리 8세가 무분별하게 몰수한 뒤 헐값에 처분했던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매입한 상공업 계층은 젠트리, 요먼 계층으로 성장해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더이상 헨리 시대의 거수기 노릇은커녕 국왕권을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청교도의 세력도 강성해져 국교회(성공회)를 지지하던 국왕과 대립하는 판국이었다. 왕실의 재정 위기는 이미 헨리 8세 말년에 표면화된 것이었고, 엘리자베스는 긴축정책과 해외 투자, 드레이크 등의 해적질 수입 등으로 이를 메웠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하여 영국 국왕의 재정적 기반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프랑스가 교회를 온존시키되 자주 원조금을 받아내는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교회 돈을 받아낸 것에 비하면, 헨리의 한탕 정책은 본인의 낭비 이후 자손들의 돈줄을 차단하고 신흥 세력의 기반을 닦아버렸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임스 1세는 강력한 왕권을 원하여[4] 그를 위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건설하려 했다.
당연히 의회는 심하게 반발하였으며, 제임스 1세가 죽었을 때는 이것이 암살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3 의회 없이 혼자 놀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지라 찰스도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고, 아버지의 노선을 계속 밟았다. 그러나 실권을 가지고 있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5]가 여러 실정을 범했고, 무리한 해외 원정도 줄줄이 실패하여 영국에는 악재가 겹쳐 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의 신교도 반란을 지원한 사건인데 이때 프랑스 라 로셸에서 농성중인 신교도를 지원하다 대패한다. 이러한 실정이 발생하면서 과세부담이 중해졌고 의회는 1628년에 권리청원[6]을 내놓는다. 찰스 1세는 일단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지만, 몇 개월 후 입을 싹 씻고 의회를 해산해 버렸으며 이후 11년간 그 문을 걸어 잠가버리게 된다.
의회를 열고 닫는 것은 왕의 권한이었기에 의회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만큼의 분노와 불만을 쌓고 있었다. 그 동안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을 피하기 위해 각종 명목으로 특별세를 거두며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4 기독교 문제
더 큰 문제,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반란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문제는 찰스가 즉위하고부터 착실히 뿌린 씨앗을 거둬들인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왕답게 제임스 1세는 성공회를 지지했고, 이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까지 강요하여 그것이 문제가 된 임금이었다. 단지 제임스 1세는 어린 시절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자란 만큼, 스코틀랜드인들을 다스리는데는 능숙했고 애착심을 여러 차례 보이는 방법으로 통치에 성공을 거두었다. 제임스 1세는 수시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유력 클랜을 회유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스코틀랜드를 무시하여 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헨리 8세 이래로 종교에 의한 피바람을 몇 번이나 맞았던 영국이었기 때문에, 가톨릭교도인 왕비의 존재는 곧 찰스가 영국을 다시 가톨릭화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찰스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고교회파'[7]인 윌리엄 로드를 지명하자 분쟁은 커져만 갔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윌리엄 로드의 됨됨이였다. 매우 전투적이었던 그는 성공회의 세력권에 침입한 청교도를 '박멸'하기 위해 그들의 코나 귀를 자르는 만행을 서슴치 않던 자였고, 장로회가 우세한 스코틀랜드 지역에 영국성공회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으며, 이때문에 1639년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5 의회와의 신경전
처음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진군하였으나, 결국 군비의 부족으로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5.1 단기의회
그리하여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한 특별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1640년 4월 13일 의회를 열었다. 의회는 찰스 1세가 요구한 전쟁 예산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가 징수해 오던 다른 특별세를 심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상원에 전쟁 예산이 특별세에 대한 불만처리에 앞선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하원에 보조세를 성립시켜 준다면 선박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하원은 그 말을 쿨하게 무시했고, 찰스 1세는 추밀원 회의를 열어 또다시 혼자놀기를 선언하는 동시에 5월 5일에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5.2 장기의회
그러나 국왕 폐하의 혼자놀기는 오래 가지 못하여, 스코틀랜드군이 영국에 침입하여 북부 2개 주를 점령하자 찰스 1세는 이를 인정하고 화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콧대가 짓눌린 왕은 요크에 귀족만의 의회를 열었고, 다시 11월 7일 웨스트민스터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11년 동안 짓눌렸다가 제대로 터뜨리지도 못하고 삭혀야 했던 울분이 터져나왔고, 의회는 마침내 왕이 어질러 놓은 나라 꼴을 도로 갈아엎기 시작했다. 독재의 상징인 특별재판소를 폐지하고, 왕의 측근인 윌리엄 로드를 탄핵하고, 스트래퍼드 백작을 체포하여 처형해 버렸다. 그리고 1628년의 전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회는 최소한 3년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라는 규칙을 제정했다.
이렇게 이 의회는 1653년에야 폐회되는 장기의회가 되었고, 그 사이에 국가의 주권이 국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는 이념이 등장하여 왕과 의회의 사이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때맞춰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8]
이에 의회는 국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의하고, 다시금 찰스 1세의 잘못을 2백 개 조항에 걸쳐 시시콜콜히 나열하며 삼가 시정해 주십사는 대항의문을 내놓는다. 그러자 격분한 찰스 1세는 결의문 통과를 주도한 다섯 의원을 체포하고자 몸소 의사당에 난입했으나, 의회는 국왕의 요구를 면전에서 묵살해 버렸다.
6 영국 내전
이제 국왕과 의회 사이에 남은 것은 현피한 쪽이 끝장을 보는 것뿐이었다.
의회는 지방의 민병대 통솔권을 자신에게 주는 법안을 결의했다. 이에 맞서 찰스 1세는 노팅엄에 가서 자신의 깃발을 내걸었다.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 둘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잉글랜드 남부는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6.1 1차 내전
내전은 처음에는 왕당파에게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1645년 올리버 크롬웰의 '신모범군'[9]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6.2 2차 내전
결국 1646년 4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항복하면서 내전이 잠시 종식되었다. 찰스 1세는 이후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계속 외부와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며, 의회의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게 되자 왕당파가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당파는 1년여 만에 또다시 진압당했고, 크롬웰은 더 이상 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1648년 12월, 크롬웰의 군대가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의원들을 가두어 버리고 50여 명 남짓의 크롬웰 지지자들로만 의회를 편성했다. 이를 "잔부 의회"[10]라 하며,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7 신하에게 목이 잘리다
최고 법원은 뻔한 결말에 뻔한 줄거리로 흘러갔다. 왕은 자신이 반역자에게 희롱당하고 있을 뿐이라며 재판 내용을 거부하고 차라리 혼자놀기를 택했다. 법원도 애초에 왕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이 정해져 있던 판결인 사형 선고를 내렸다.
1649년 1월 30일, 영국의 왕 찰스 스튜어트 1세는 신민들 앞에 사형수로 섰다. 사형대는 영국 왕실과 귀족들의 연회장인 화이트홀의 뱅퀴팅 하우스 앞에 차려졌고 군인들이 그를 그 곳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자신 역시 그 누구보다도 인민들의 자유를 갈망했노라고 주장했다.[11]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 수 없음을 말했다.하지만 결국 영국은 입헌군주정, 즉 의회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영국 특유의 전통이 만들어 졌다...
연설을 마친 찰스 1세는 집행자의 지시에 따라 사형대에 엎드렸으며 성직자가 찰스 1세가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후 참수되었다. 찰스 1세의 목은 도끼질 한번에 깨끗이 잘렸고[12] 집행자는 잘린 머리를 대중들 앞에 높이 들어 보였다.
이후 당분간 영국은 왕이 없는 국가, 즉 공화정이 되었다. 다만 크롬웰이 거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휘둘렀고 압제적인 정치를 펼쳐서 실제적으로 왕정과 별 차이는 없었다.
처형 당시 매우 간지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나 실제 찰스 1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출처
이것만 해도 충분히 간지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알려진 내용[13]은 최후변론의 내용과 유사하다. 찰스 1세는 판결을 받기 전에 최후변론에서 "기억하시오. 나는 당신들의 국왕, 합법적인 왕입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어떤 죄를 덧씌웠는지 기억하시오... (후략)"란 말을 하였다. 처형되는 날 아침 자식들에게도 "아버지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단다." 하면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 찰스 1세의 처형에 관한 루머가 있는데 영국의 군대 중 해군이 Royal Navy, 공군이 Royal Air Force라고 쓰는 데 반해 육군은 그냥 British Army라고 하는데, 영국 육군은 왕정국가에서 왕의 목을 날린 전적이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Royal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영국 육군은 전통적으로 왕의 권한 아래에 있던 다른 군과 달리 의회가 소집을 허가할 때 움직이는 의회 소속이므로 Royal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 것이다. 왕의 목을 친 것과 무관하다. 뭐 어쨌든 의회 소속이라 왕 목 친 건 사실이다
한편 그의 왕비인 앙리에타 마리아는 내전이 진행중일 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자식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한 후,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인 프랑스로 돌아가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때 어머니와 같이 수도원에 들어갔던 딸 앙리에타(영어명 헨리에타)는 나중에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공과 결혼했으나 요절하고 만다.
이 왕이 참수당하는걸 보고 프랑스에서는 영국을 '왕 모가지 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여기고 디스하기도 했는데, 후일 프랑스 혁명때 루이 16세가 참수되자 영국에서도 프랑스를 보고 늬들도 우리랑 똑같다며 디스했다. 심지어 영국 왕족과 귀족들은 프랑스 왕족과 귀족들이 대대적으로 끔살되는걸 보고 고소해하며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영국-프랑스간의 사이가 좋지 않음도 감안해야겠지만
8 가족
어느 나라 왕족들이나 다 그렇듯이, 이 집안도 상당히 불행한 집안이었다.
8.1 부모와 형제자매
-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왕위를 잇지 못했다.
8.2 자녀들
- 같은 이름의 형(1629년생 찰스)이 있었지만 태어난 다음 날 숨졌다.
- 멸망한 왕조를 복구한 이후 혁명으로 목이 날아간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귀족층들의 지지를 끌어내며
-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기도 했으나, 굉장한 호색한이었고, 낭비벽이 심했다.
- 메리가 낳은 아들 오라녜 공 윌리엄은 후일 윌리엄 3세가 되었다.
- 찰스 1세가 처형당하기 전날인 1649년 1월 29일, 올리버 크롬웰의 허가로 남동생 헨리와 함께 찰스 1세를 면회할 수 있었다.[17] 그 자리에서 찰스 1세는 네 어머니(앙리에타 마리아)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전해라라고 했고, 찰스 1세, 엘리자베스, 헨리가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는지 1650년 9월 8일 숨을 거두었다. 여담으로 이 면회를 지켜본 올리버 크롬웰마저 이 가족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찰스 1세를 면회했던 인물. 찰스 1세는 헨리에게 아버지(찰스 1세)는 죄가 없단다. 너희 형들이 죽지 않는 한 너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단다. 그러니 저놈들(크롬웰 파)이 널 옹립시키려 해도 너는 거부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1660년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 이름은 어머니에게 따온 듯하다. 아버지 찰스 1세와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가 1644년 4월 청교도 혁명의 여파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때 찰스 1세와 만난 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후 헨리에타 마리아는 1644년 6월 헨리에타 앤을 출산하였으며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이후 헨리에타 앤은 어머니의 친정 식구(외삼촌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결혼했다.
9 평가
찰스는 차캤습니다. 의회를 죽입시다 의회는 찰스의 원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꼴통 왕의 이미지지만, 사실 특별히 찰스 1세가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했다는 것은 아니다. 찰스 1세는 한마디로 당시의 전형적인 절대군주였다.[18]
개인으로서는 나름 매력이 있었고, 대내외적 사고도 그렇게 크게 저지르지는 않았다. 쾌락주의적이었던 아버지에 비해서 품위 있고 청렴하였고 인품은 좋았기에 집권 초중반기에는 인기가 꽤나 좋았다.
찰스 1세의 가장 큰 문제는 불통의 군주에다가, 역사를 잊어 먹은 군주였다는 것이다. 찰스 1세는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신실하고 우직했으며, 왕권을 신앙에 의해 보장된 권리라고 생각했기에, 의회를 대화의 상대가 아닌 진압의 상대로 보았다. 그리고 이 우직함은 나름대로 킹 제임스 성경과 같은 종교적 프라파간다나 협상과 회유에 능했던 부왕 제임스 1세만도 못했다. 재정사정에서도 제임스 1세에 비해 넉넉하지 못했다. 심지어 항목에 보면 나와있듯이 욕지거리도 잘 했고(...) 정책을 우직하게 밀어 붙히는 것과는 별개로 그 과정에서 소통과 의견 수렴도 적극적이었던 아버지와 반대로 기본적으로 우아하고[19], 무엇보다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동군연합이란 제도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어릴 적 부터 정치적 불안정으로 악명 높았던 스코틀랜드 정치판에서 험하게 구르며 자랐던 아버지와 달리 온실 속의 화초 처럼 자라서 왕권이란게 그냥 그대로 주장하면 이루어 지는 걸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부왕이 주장한 왕권신수설은 사실 그 시대 유럽 보편적인 가치관에서는 새로운 이론이라 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굳이 제임스 1세가 이론화 하며 주장한 걸 생각해 보자. 제임스 1세, 아니 그 전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본인이 "베네치아의 도제만도 못한 권력이다"라고 말 했을 만큼 왕권이 유독 약했던 스코틀랜드에서 자라나 왕권이란게 말로만 떠들게 아니라 실제로는 치열한 정치적 밀당과 파벌간 이해 관계 조절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한 저런 통치자의 관점에서는 사법 체계가 그 시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발달했으며, 역사적으로 중앙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잉글랜드와 반대로 꿔다놓은 수준으로 중앙 권력이 불안정했던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일부로 당연한 걸 이론화 하면서 차분하게 왕권을 강화하는 장기적 프로젝트를 추구한 것이었다. 실제로 통치적인 측면에서 봐도 잉글랜드의 정치적 엘리트들은 나름 불평불만은 해도 제임스, 그리고 그 아들의 통치에 직접적인 반항은 못한 반면, 아버지 치세만 해도 계속 왕권에 반발하며 싸우려고 들었던 세력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매파 세력이었고, 본인의 시대에도 결국 모가지 날아간 청교도 혁명도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혁명으로 한 곳에 권력 누수가 생기면서 나머지 잉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권력이 아예 도미노 처럼 무너진 것이다.
이런 동군연합의 불안함과, 스튜어트 가문이 탄생한 뿌리를 잊지 않고 몸은 잉글랜드로 내려갔어도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애정어린 관심을 가졌던 부왕과 달리, 찰스는 어린 아이 시절에 스코틀랜드를 떠난 이후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관심도, 흥미도 없었으며 자신의 선조들이 얼마나 스코틀랜드에서 고생했는지 제대로 이해 하지도 못했다. 이러다 보니 특히 종교 문제로 부왕 시절 부터 불평불만이 많았던 장로회 중심 스코틀랜드 정치 세력들이 그나마 같은 나라 출신이며,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고향을 잊지 않았던 아버지 시절에는 비교적 잠잠히 있다가 아예 지 뿌리도 잊어 먹고 머나먼 외국에서 폭군 처럼 행세하는 아들 치세에 들어서는 스코틀랜드 현지 정치적 전통 그대로 대귀족, 성직자, 도시민들이 연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키니 한곳에서 터진 권력 누수가 다른 곳에서도 해일처럼 집어 삼킨 것이다. 분명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찰스는 모가지가 날아갈 만큼 유독 무능하거나 폭압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찰스는 잉글랜드 뿐만의 왕이 아니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다[20]. 이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반골기질이 막강했고, 국왕의 권력이 약했던 스코틀랜드에서 말아 먹으니 동군연합이란 체제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아예 다스리던 삼왕국 모두 말아먹게 된 것이다. 찰스가 근세의 다른 군주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폭압적이고 무능했던 건 아니지만, 영민하기 그지 없었던 자기 아버지에 비해서 현실에 안주하고 시야가 짦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에 따라 자기가 직면한 문제의 규모 자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본인과 왕가가 태어났던 스코틀랜드에서 부터 국정을 말아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항목의 역사에 가 보면 나오지만, 동시대 기준으로 스코틀랜드는 네덜란드, 베네치아 같은 아예 대놓고 공화정이었던 나라들 다음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랑 비슷한 수준으로 왕권이 약했고 불안정했던 곳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터 치열한 정치 싸움의 복판에서 성장했던 자기 아버지는 그 사실을 결코 잊어 먹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특별히 뒤에도 보듯이, 의회는 그다지 국민을 대변하는 집단도 아니었고, 뒤이어 들어선 커먼웰스, 즉 영연방 공화국도 그다지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이런 점은 프랑스 혁명 직후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나 나폴레옹 제국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찰스 1세는 나름대로 후일에 괜찮은 평가도 받고 있고, 특히 찰스 2세 때 상당 부분 이미지가 복권되었다.
그렇기에 당대에는 (특히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에는) 찰스 1세는 왕정복고의 상징이자 희생양으로서 여겨진 감도 있다. 사망 직후에 출간된 『왕의 성상(Eikon Basilike)』이 대표적인 시각이다. 이를 위해 크롬웰은 존 밀턴 등을 동원하여 왕권신수설을 부정할 이데올로기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즉, 어떤 확고한 이념이 있어서 왕을 죽인 게 아니라, 왕을 죽인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된 사상이 오늘날의 민권 사상이다. 144년 뒤의 루이 16세와 비슷하게 찰스 1세는 일종의 '시범타'로서 처형된 것이고, 왕권신수설의 패배의 상징으로서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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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스 덤블도어를 연기했던 리처드 해리스가 올리버 크롬웰을 연기하고 알렉 기네스가 찰스 1세를 연기한 영화 풍운아 크롬웰(Cromwell, 1970)에서는 크롬웰과 같이 비중도 많고 꽤 좋게 나온다. 영국과 미국 합작에 감독인 켄 휴즈, 주연 배우인 리처드 해리스,알렉 기네스, 티모시 달튼 등 배우진들도 싸그리 영국인들이다. 크롬웰도 나쁘게 나오지 않고 둘이 같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이렇게 나오며 처형당할때 왕자인 찰스 2세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난한 군주 정도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평은 그냥저냥 범작 수준 평가이며 흥행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 ↑ 제임스 1세의 장남인 헨리는 1612년 사망했다.
- ↑ 일설에 의하면 찰스 1세는 반 다이크가 초상화를 그려다 줬는데 돈을 안 내고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
- ↑ 이걸 부추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버킹검 공작이다.
- ↑ 사실 제임스 1세의 구상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까지 통합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 ↑ 너무 무능했기 때문에 찰스 1세의 동성애 상대여서 재상이 되었다는 루머가 퍼질 정도였다. 예비역 장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했다가 분노한 해군 장교의 칼에 찔려 피살되었는데 삼총사에 나오는 그 멋진 신사 버킹엄 공작과 동일인물이다. 그래서 암살의 배후에 리슐리외가 있다고 각색되었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또한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멋들어진 신사도 아니었고 리슐리외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능했다.
- ↑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비롯해서 왕권도 건드릴 수 없는 일련의 ‘자유권’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
- ↑ 성공회를 인정하되, 가톨릭의 전통을 일부 회복하려던 무리.
- ↑ 스트래퍼드는 아일랜드 총독 출신이었다. 그가 처형되자 "잉글랜드의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 반란이 일어났고, 다시 잉글랜드에서 "왕과 왕비가 프랑스와 짜고 개신교도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으로 번졌다.
- ↑ New Model Army. 간혹 '신형군'이라고도 부름. 흔히 철기병으로 알려졌지만...
- ↑ Rump parliament. 문자 뜻 그대로, 크롬웰 파의 찌꺼기의회.
- ↑ 절대군주가 인민의 자유를 갈망했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수 있는 게 찰스 1세가 말한 자유는 지배자의 호의에 의한 자유를 말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의회파들은 이에 대해 진정한 자유란 자신들을 지배할 법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 반론했다.
- ↑ 당시 집행자의 도끼질이 능숙하지 못했거나 도끼날이 날카롭지 못했을 경우 수번을 내려쳐 사형수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저 세상에 가는 일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볼 때 찰스 1세는 운이 좋았다. 실제로 찰스 1세의 할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는 4번의 도끼질 만에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았다.(처음 도끼질은 목이 아닌 뒤통수를 찍었다고...)
- ↑ "짐이 법을 어겼다고 치자. 그러나 신하가 왕을 처벌해도 된다는 내용이 법에 없으니, 신하도 법을 어긴 것이 아닌가?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과 신하가 왕을 처벌하는 것...어느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짐은 후세에도 왕으로 남지만 그대들은 영원히 반역자로 남을 것이다!"
쉽게 말해 "너네도 똑같이 될 것이다 이놈들아!" - ↑ 무려 17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16명은 사산되거나 유산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윌리엄(1689년 ~ 1700년)마저 요절했다.
- ↑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 러시아 혁명 당시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 ↑ 서자들은 워낙에 넘쳐나지만, 적자가 없어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
- ↑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면회하지 않고 해외에 꽁꽁 숨었던 이유는 크롬웰 일당에게 잡히면 무조건 처형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와 헨리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살해해도 왕당파가 큰 타격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 ↑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나오는 창작대사로, 찰스 1세가 국회에게 "그대들의 가장 큰 적은 나인데, 어찌하여 내 목 칠 궁리는 안 하는지 신통하도다....."라고 디스하는 부분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왕권신수설 신봉자인 찰스 1세와 국회와의 관계, 그리고 그의 눈에 국회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한 컷에 담아내는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 ↑ 왕이 우아한 건 기본적으로 문제는 아니지만, 당시는 종교개혁 이후 엄숙주의와 회화, 조각 같은 시각적 미술을 우상숭배라고 배격하던 청교도적 분위기가 왕성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 ↑ 영국이란 나라가 워낙 잉글랜드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다른 나라 두개의 비중은 현저하게 적고, 따라서 역사적 해석도 여전히 잉글랜드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걸로 보인다. 청교도 혁명과 삼왕국 전쟁 시절은 기본적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했고,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문맥과 전통을 이해하지 않고는 왜 멀쩡하던 나라가 혁명 내전 막장판이 됬는지 이해 할 수 없다. 11년 폭정 이후 갑작스럽게 의회를 다시 열어 결국 군대를 동원한 의회의 반란이 터진 계기 자체가 스코틀랜드에서 먼저 터진 언약파 반군을 진압하기 위한 예산과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