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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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권혁주 (Hyuk Joo Kwon)
국적대한민국
출생1985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사망2016년 10월 12일 부산광역시
학력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모스크바 중앙 음악학교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1 개요

대한민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한국의 1세대 음악영재 이며 한국계 남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세계적인 수준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SNS 활동과 많은 연주회를 가져,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바이올리니스트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많은 마스터 클래스에 출강하면서 음악인들에게도 가장 인기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큰무대, 작은무대 가리지 않고 많은 무대에 선데다가 많은 마스터 클래스 출강 등으로 교육쪽에 공헌을 많이 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파가니니)와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등의 파가니니 곡들 연주에 본좌라고 평가를 받았다. 1포지션 하모닉스로 정확한 음정을 짚고, 지판 끝까지 가볍게 올라가는 화려한 기교, 리코세 주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등 화려한 테크닉을 보여주었다. 권혁주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파가니니 곡만은 인정할 정도.

사용하는 악기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후원한 1763년산 과다니니로 바이올린의 3신기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그의 악기는 보존 상태가 좋아 수십억원을 호가해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꿇리지 않을 정도. 그리고 현은 유명한 현 제조사인 덴마크의 Larsen Strings에서 후원받아 사용했다. 그 외 다른 스폰서에서도 악기를 후원했지만 주로 사용하는건 금호에서 후원한 과다니니였다.

2016년 10월 12일 부산 해운대구[1]의 택시 안에서 갑작스럽게 요절해 많은 클래식 팬들에게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2 생애

무려 만 3세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해 3년 후 음악저널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대상을 안았다. 7세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 김남윤 교수를 사사한 후 9세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모스크바 중앙 음악학교에서 1930년대 러시안 학파를 대표하는 스톨리아르스키와 얌폴스키를 모두 사사한 에두아르드 그라치 교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크렘린궁에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초청으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졸업 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11세에 제3회 차이콥스키 청소년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2위를 차지하면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으로부터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2] 바이올린 영재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세에 독일의 클로스터‐셴탈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7세에는 러시아에서 열린 제3회 얌폴스키 콩쿠르에서 그랑프리 및 ‘멘델스존‐얌폴스키의 론도 카프리치오소 최고 연주자상’을 거머쥐었다. 2004년 칼 닐센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19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 우승과 함께 덴마크 작곡가 작품 특별상, 젊은이 인기상을 두루 석권했으며 제 2회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콩쿠르에서도[3]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2005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6위)을 통해 그 음악성과 기량을 검증받았다.

이후 콩쿠르에 나가는건 그만두었으며,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서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등에 출강하여 후학 양성에도 힘써왔으며, 2012~13년에는 안양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 제2회 금호음악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7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본격적인 연주자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오케스트라 협연과 독주회, 실내악 가리지 않고 연주회를 하였으며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게 된다. 거기에 2013년에는 자신이 리더로 역시나 금호 키드인 3명의 연주자와 함께 칼라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해 매년 굵직한 연주를 이어왔다. 예를들어 2015년 9~10월에는 4회에 걸친 연주로 쇼스타코비치 현악4중주 전곡 연주를 끝냈다. 약간 무리할 정도의 스케줄이었는데 결국 건강에 무리가 와 2016년 9월 건초염·건막염·테니스엘보우·퇴행성 관절염 등 증세로[4]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주의 짧은 회복 기간 후[5] 연주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클래식 팬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긴 했지만 상상도 못했던 비통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3 안타까운 죽음

2016년 10월 12일 오후 7시 30분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움 챔버 오케스트라 창단연주회를 위해 11일 새벽 차를 몰고 부산에 왔다. 권씨는 해운대에 있는 한 호텔에 방을 잡고 나서 11일 오후 6시 30분 부산문화회관에서 리허설을 마쳤다. 같은 날 오후 8시 20분께 택시를 타고 남구에 있는 친구 집으로 이동해 친구와 청주를 2∼3잔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2일 0시 10분께 택시를 타고 해운대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고 20분 뒤 호텔에 도착한 택시기사가 도착했다고 말하며 뒤돌아봤을때 그는 이미 눈감고 숨져 있었다. 깊이 잠든줄 알고 기사가 흔들었을때 힘없이 쓰러졌고 곧바로 경찰과 병원에 신고했으며 호텔 직원이 바로 나와서 응급차가 올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고 뒤이어 119 구급대원이 이어받아봤지만 결국 멈춘 심장박동이 되돌아오지는 못했다. 향년 32세.

오전 10시 경에 부산일보에서 그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며 대중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난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사람들이 믿지 않거나 이 소식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마 후, 여러 인터넷 신문사에 이어 메이저 언론사끼지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하며 오보가 아님을 확인한 그의 팬들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천재 연주자의 급작스런 요절이란 점에서 음악계나 음악애호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관심도 커서 클래식 음악가로서는 이례적으로 그의 이름이 하루종일 포털 사이트 실검 1~2위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9시 뉴스에까지 보도되었을 정도였다.

활발한 연주자 활동을 이어왔었고, 사망 당일에도 연주회(당연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연주회는 취소되었다.)가 잡혀 있었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페이스북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상상도 못했던 요절이었다. 대체로 '뭐!? 권혁주가 죽었다고? 에이. 설마... 진짜??'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많은 클래식 사이트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소지품에서 발견된 부정맥 치료약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부정맥이 사인인가 했지만, 부검결과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으로 드러났다.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13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과 함께 권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외상은 전혀 없었고 혈전이 관상동맥을 막아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혈전이 심장에 영양분 등을 공급하는 혈관을 막아 심근경색이 일어났고, 심정지로 이어져 숨졌다는 것.

4 기타

파일:권혁주 라센.png

한국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고, 전공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라센 현의 광고 모델을 하기도 했다. 현악기 전문 악기사에 가면 저 책자 하나씩은 꼭 볼 수 있었다.
  1. 연주차 방문하였다
  2. 이 때문에 본격적인 연주자 활동을 시작한 2007년 이후에 금호아트홀에서 연주회를 상당히 많이 가졌다. 사실 그전 유학시절부터도 종종 금호아트홀에서 연주를 했었다.
  3. 얼마전에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한국 최초로 우승한 프레미오 파가니니 콩쿠르와는 다른 대회이다.
  4. 원래 건초염만 생겨도 상당히 무리했다는 것이다. 왜 이정도의 증세를 얻었냐면, 권혁주는 파가니니 연주에 호평을 받았고 그때문에 많이 연주했다. 하지만 그런 기교적인 곡일수록 당연히 손엔 더 무리가 많이 가게 된다.
  5. 바이올린 전공자들의 건초염의 수술 후 회복 기간은 4주 정도니까 상당히 무리를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