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후기의 시인
金得臣
1604 ∼ 168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이며, 호는 백곡(柏谷)이다. 할아버지가 진주 대첩의 명장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며,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노력형 천재의 표본.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심하게 아둔했는데, 그 기억력이 뒤돌아서면 모두 잊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독려와 가르침으로 극복하여 20세에는 처음으로 글을 지었고, 39세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59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여 시(詩)를 지으며 살았다.
여기서 일반적인 극복이라면 책을 몇번 더 읽는 수준이겠지만, 득신은 읽는 횟수가 천문학적인 숫자를 상회했다.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 백이열전(伯夷列傳) 부분을 1억 1만 3천번 읽은 것으로도 유명하다.[1][2] 참고로 당시에는 1억이 지금의 1억(10,000의 1만 배)이 아닌 지금의 10만을 나타내는 단위였다.
특히 글을 잘 지었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한문(漢文)의 4대가 중 한명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극찬 덕분이었을 정도다. 그의 시를 접한 이식은 김득신에게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숙종 10년인 1684년,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저서는 《백곡집》 등이 있다.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3] 죽은 이유가 재물을 노린 화적떼 손에 피살당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그 화적떼가 사실 집안의 노비로 평소 김득신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계획했다고 한다. 이 비보를 들은 숙종은 충격을 받고 토포사로 하여금 화적떼를 토벌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아버지 김치가 생전 점을 잘쳤고, 민담에서 염라대왕이 됐다는 설화가 있어 김득신도 아버지 관련 설화에 잘 등장하고, 본인도 천연두 후유증으로 건망증이 생겨 그에 대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다.
2 조선 후기의 화가
金得臣
1754[4] ∼ 1822
1의 인물과 자주 헷갈리는 인물. 심지어 한자까지 같다. 1의 인물은 문신(文臣)이고, 2의 김득신(金得臣)은 화가다.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그의 가문은 대대로 명문 화원 가문이었는데,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동생들, 아들들 모두 화원이었다. 김득신도 가문을 따라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되었다.
초기엔 삼촌인 김응환(金應煥)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들을 그렸고, 점점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을 그렸다. 특히 풍속화에서 김홍도를 가장 잘 계승한 인물로 꼽힌다.
대표작에 《파적도(破寂圖)》, 《귀우도(歸牛圖)》, 《귀시도(歸市圖)》 ,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등이 있다.- ↑ 그래서 그의 서재 이름은 억만재(億萬齋)였다. 물론 이 숫자가 안좋은 기억력만으로 나온 숫자는 아니다. 좋은 글은 몇번 더 읽는 독서광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습관이 겹쳤기 때문이다.
- ↑ 그밖에도 한유의 <사설>은 13,000번, <악어문>은 14,000번, <노자전>은 20,000번, <능허대기>는 25,000번을 읽었다. 또한 여든까지 살아 아내와 딸을 먼저 보냈는데 장례식장에서도 하라는 곡은 안하고 책에 푹빠져 읽고 있었다고 한다.
- ↑ 70대 시기에 그 악몽같던 경신대기근 시기를 겪었음에도 생존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인구의 10%가 사망했을 정도이니 가히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쯤되면 생존왕?? - ↑ 아버지 김응리과는 11년, 삼촌 김응환과는 12년 차이다. 정확한 생년인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