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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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공원에 있는 김시민 장군의 동상.

충민사의 모셔진 김시민의 영정.[1]

이름김시민(金時敏)
자(字)면오(勉吾)
시호충무 ·상락군 ·상락부원군
생몰1554년 ~ 1592년 11월 21일
본관안동
출생지목천(木川; 현 천안시 병천면) 출신.

1 소개

임진왜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김방경의 12대손이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8세 때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혔던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국조인물고는 정조 때 편찬된 서적이지만, 정조 때에도 김시민 고향의 사람들이 "저곳이 바로 김시민 공께서 뱀을 쏜 곳이다"라는 소문이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몸집도 크고 도량이 넓었으나 힘이 강한 것만 믿고 공부는 좀 덜 하면서 목소리만 크게 냈다는 식으로 평가받기도 했었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1581년에는 부평부사에 제수되었지만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에는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으로 복직했지만 병조판서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건의한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직했다. 이 때의 일을 국조인물고에서 좀 더 자세히 풀이하고 있는데, 병조판서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격분한 김시민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아 부수면서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받을 수 있는가!"라며 소리치고는 바로 벼슬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들었던 평가나 병조판서에게 이렇게까지 대들었던 일화를 보면 김시민은 흔히 말하는 남성적인 면이 매우 강한 천상 무인이었고, 자존심도 매우 강했던 성격으로 보인다.

1591년, 진주판관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에는 죽은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강화하여 성을 지켰다. 한편으로 곽재우 등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여러차례의 적의 공세를 물리치고 창원, 고성 등을 회복한 공로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2 진주 대첩

1592년 10월, 전라도 진공에 실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나가오카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의 대군을 진주성으로 보내 성을 공략하게 했다. 이것이 진주 대첩이다. 이에 김시민은 3800명의 적군 병사로 3만 대군 10배넘은 군사를 맞섰고 곽재우, 최경회 등의 의병들은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해 진주성에 힘을 보탰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는데 성안의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수적으로 더 많았던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적의 탄환을 맞았고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은 이후 사경을 헤메다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3 사후

조정에서는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제수했지만 교서가 당도한 것은 김시민이 죽은 이후였다. 이후 김시민은 선무 2등공신에 제수되었고[2] 진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때 김시민의 선무공신첩은 일본인에게 팔려 영원히 보지 못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에 이 사연이 소개된 뒤 전 국민적인 성원에 힘입어 국내로 돌아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진주에서는 죽은 후에도 그야말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김시민이 전사하자 성 안에 울음소리가 천둥 같았고 호남ㆍ영남의 인사가 다 서로 조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찌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김시민의 묘를 고향으로 이장할 때도 운구할 때 백성이 앞다투어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 지 오랠 것입니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3]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시민의 조카 김유가 진주를 지나게 되어 한 초가에 묵게 되었다. 김유가 김시민의 조카였음을 안 초가집의 노인이 자신이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시민을 모셨다고 하며 김유의 손을 잡고는 "어찌 김 사또의 공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엉엉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진주시에서는 그의 시호를 따 경남진주혁신도시 지역의 이름을 '충무공동'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충무공동과 상평동 사이를 흐르는 남강에 새로 사장교를 지어 김시민대교라고 하였다.

한편, 일본은 김시민의 분전으로 인해 진주성 공략에 실패한 뒤 그에 대한 원한을 불태웠다. 그러나 너무 원한에만 불탄 나머지 김시민이 전사한 줄도 몰랐다. 이후 1593년 6월,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재침공하였다. 진주성은 일주일 동안 일본군 10만 대군을 상대로 버텨왔으나 결국 함락되었고 다수의 장수들과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던 6만명 가량의 백성들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다수가 전사하여 전력 소모가 매우 컸다.[4] 이때 일본군은 진주성을 지키던 진주목사 서예원[5]을 잡아다 죽였는데 그를 김시민으로 착각하여 "목사(여기서는 김시민을 지칭)를 죽였다"라고 본국에 보고하며 서예원의 목을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이후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에서 '모쿠소 호간(木曽判官)'이라는 괴물이 일본군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리지만 용맹한 일본 장수에게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게 되었다. 이건 김시민의 직책이었던 목사의 '사(使)'자가 16세기 한국어에서는 'ㅏ'가 아닌 아래아 발음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목사'와 '목소'의 중간 정도 되는 발음이었고, 이렇게 '목사'를 접한 일본군이 이것을 '모쿠소'로 알아듣고 일본에 전하여 일본식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가차한 결과인 것이다. 이로 보아 일본군이 얼마나 김시민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는지 알 만하다. 비슷한 예로 거북선을 복카이센 沐海潛(=목해선)이란 괴물배로 부르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 배를 퇴치(…)한다는 내용의 연극 또한 성행했다고 한다. 그 만큼 일본이 김시민에게 엄청난 쇼크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6]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4.1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등장하여 맹활약. 배우는 정의갑. 변복(?)한 이순신이나 권율과 접선하여 책략을 짜는 등 지장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조되어 묘사되었다. 본작 중에서는 진주성을 지킬 때 지원군을 끌고 온 유숭인을 성 안의 지휘체계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7] 들이지 않는 부분이 나오는데, 두 장수의 카리스마가 완전히 폭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장수는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극중에서 유숭인(김영선 분)은 적의 1/20도 되지 않는 군사로 닥돌을 감행했으나 결국 큰 피해를 입히진 못했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김시민 : "성문을 열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우병사 영감. 지금 성문을 열면 왜군은 물밀듯이 들이닥칠 것이오. 허면 진주성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적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외다."

유숭인 : "앞으로의 싸움이 꽤나 고단할겝니다, 김 목사"'
김시민 : '우병사 영감....'
유숭인 :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이다." "무운을 빕니다."

실제 역사는 드라마에서 묘사된 모습의 이유가 아니였으나, 진주성 전투를 예고하는 장치로써 상관인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자기희생으로 매우 비장하게 각색하여 "삶과 죽음이 뒤엉킨 6일"이라는 예고에 걸맞도록 처절한 전투 장면을 예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진주 대첩은 불멸의 이순신의 79회~80회에 걸쳐서 등장한다.[8] 다만, 김시민의 최후는 실제 역사와 꽤 다르게 묘사했다. 실제로는 저격당한 후 며칠간 사경을 헤매다가 순국을 하였으나, 드라마에서는 성벽을 넘어 쳐들어오는 적군을 진삼국무쌍 마냥 막아내던 도중에 저격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망 시기 또한 역사와는 다르게 일본군을 물리치고 휘하 장수인 곤양군수 이광악에게서 승전 보고를 듣던 도중에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 것으로 표현됐다.

4.2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에도 등장하는데, 사실 스토리상으로 조선의 반격은 임진왜란 한참후의 시기이므로 원래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나 영웅 수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역시 죽은 김덕령과 함께 멀쩡히 등장한다. 어차피 조선이 이시다 미츠나리와 연합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공격한다는 스토리부터 말이 안되기야 하지만은...

흑철창을 장착할 경우 쐐기찌르기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원거리공격을 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그 이외엔 아무런 기술이 없으므로 순전히 몸빵용이라서 큰 인기는 없다. 물론 아예 개성이 없는 권율보다는 백배 낫긴 하지만... 여담이지만 진주성 방어를 지휘한 사람이라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주변 유닛들에게 주는 버프는 방어력 증가 버프다. 보통 방어력 버프는 마법계 영웅들이 주는 편인데 근접계 영웅이면서도 방어력 버프를 주는 꽤 이례적인 케이스.

4.3 천하제일상 거상

천하제일상 거상에도 등장하시지만 초보자 퀘스트를 깨다 보면 김시민 고용권을 그냥 주기에 초보자들이 초반에 장수가 없을 때 사용하는 장수. 사실 김시민의 기술인 연옥술 자체는 엄청나게 강력한 기술이였는데 너프 먹고 소위 구멍 뚫린 연옥술로 바뀌면서 망한 케이스. 또다른 기술인 쐐기찌르기는 평타 기반 스킬이기에 한계가 뚜렷하고 신립 등의 더욱 강력한 평타 기반 장수에 밀려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안습... 하지만 몹이 연옥술을 사용하면 무지 아프다.

김시민의 진가는 레벨 100이 넘어서야 발동하는데, 근처의 팀원들에게 마법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패시브 스킬 '격려'가 발동된다(최초 마법 저항력 10%). 100 이후부터 레벨이 높아질 수록 마법저항력이 더욱 증가하기 때문에(최대레벨인 250레벨이 될 경우 마법저항력이 85%다! 3만원짜리 캐시템과 맞먹는 가격의 해왕갑옷이 40%란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저항력.) 후반에 굇수로부터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편이다. 주력장수가 아닌 보조장수로 쓰이는 편.

뒤늦게 패치된 김시민 2차는 신라시대 대장군 김유신으로, 스킬은 총 3개로 땅에 불이붙는 쐐기찌르기인 화염찌르기와 데미지가 높은 범위 마법인 회전창, 그리고 결정적으로 격려 패시브가 짤리지 않고 역시 가지고 있다. 주력 스킬인 회전창은 범위가 좁고 데미지가 불안정해 항우보다 안좋다고 하지만 신수 등등의 더욱 강력한 주력 용병을 갖게 되면 해고가 답인 항우에 비해 올체 찍고 패시브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김유신이 활용도가 더 높다. 그러나 회전창의 묘한 성능으로 인해 보통은 군모의창이나 현명창을 채워주고 그것을 이용해 레벨업을 하거나 올체찍고 쩔경 먹인다.

4.4 징비록

징비록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박정우. 28화에서 진주 대첩을 이끄는 모습이 나온다.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2007년 1월 22일 표준영정을 바꾸기로 했다. 표준영정은 1977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인데, 김시민 장군은 사망할 당시는 39세였지만, 영정은 나이가 많은 노인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영정은 각계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 다시 제작될 예정이다.
  2. 원균 따위가 1등공신이란걸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하다.
  3. 인조 시대가 되어서야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순신도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백성들이 통곡을 하며 운구를 붙잡아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4. 2차 진주성 전투 문서에 나와있지만 당시 일본군의 10만 대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협박성 명령으로 인해 꾸려졌고 가토 기요마사, 타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 등 일본군의 적장 대부분이 모두 달려든 규모였음에도 함락에 일주일이 걸렸고 일본군도 함락, 군사 재정비 이후 전라도 침공을 하지 못할 정도의 크게 피해를 입었다.
  5. 서예원은 의병 도대장 김면의 중위장이다. 김면 참조.
  6. 일본인들의 착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목을 베어 본국으로 가져온 적장이었다는 점이 모쿠소가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김시민은 유명한데 이순신은 유명하지 않았다?
  7. 오늘날로 치면 김시민은 투스타인데, 유숭인은 쓰리스타라고 볼 수 있다.
  8. 79회는 전투의 서막 정도 되는 부분이고, 본격적인 전투는 80회에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