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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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金炯敏)[1]
(1907년 5월 12일 ~ 1998년 5월 2일, 전북 익산)
대한민국 초대 서울특별시 시장이다. 호는 눌정(訥丁)이며, 본관은 금녕(金寧)이다. 전북 익산시 춘포면 봉개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사업 때문에 완주군 삼례로 이사했다.
전주신흥학교에 진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고, 광주 숭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하와이에서 정규 고등학교 과정을 거친 뒤 오하이오주의 웨슬레안 대학에서 교육학 학사과정을 거치고, 미시간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개성 숭도보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43년 일제에게 돌연 체포되어 수감[2]되었다가 이듬해 10월에서야 풀려난다.
해방 후 석유상사인 3.1사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이 때 미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으로부터 한성부윤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당시 김형민의 나이는 겨우 38세였다.!! 하지 중장의 삼촌이 웨슬레안 대학에서 김형민과 함께 수학하던 동창이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한성부윤으로 추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
갑자기 젊은 나이에 한성 부윤으로 취임하게 된 그는 우선적으로 서울시 행정지명을 바꾸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앞장 섰다.[4]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서울이라는 지금의 명칭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서울은 한성, 경성부 등으로 불렸으나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강하게 주장하여 지금의 명칭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5]
이 후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스스로 시장직에서 물러났고, 본업이었던 삼일사 사업에 매중하게 된다. 1998년 5월 2일 서울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고, 고향인 익산에 장지가 마련되었다.- ↑ 이 문서는 다음 블로그의 글을 상당부분 참고 및 발췌하여 작성하였다. 참조1
- ↑ 미국 유학파였던 그가 수업시간에 친미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 하지 중장의 추천 이야기는 그가 38세에 서울시장이 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설 중 하나다.
- ↑ 왜식의 정(町)을 동(洞)으로, 통(通)은 ‘로’(路), 정목(丁目)을 ‘가’ (街)로 고쳤다.
- ↑ 심지어 이 당시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명명하자는 높으신 분들의 의견이 강하게 있었다. 이를 김형민 시장이 국구 반대해서 서울시로 밀어 붙였다. 하마터면 4.19 터지고 수도 명칭을 수정 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