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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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16대17대18대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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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형민2대 윤보선3대 이기붕
대통령 기록관 존영[1]
이름윤보선(尹潽善 / Yun Posun)
출생지조선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본관해평 윤씨
출신정당민주당,[2]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
종교개신교(장로회)
부모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형제자매6남 3녀 중 장남
영부인공덕귀
자녀2남 2녀
생몰년도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92세)
재임기간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2일
서명[3]

1 개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4]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붕괴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였으나, 1962년 3월 대통령직을 하야하였다.[5]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야당을 이끌었으나 1980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아산군[6] 출신으로, 호는 해위(海葦)[7]이다.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 대통령

윤웅렬, 윤영렬 형제를 필두로 구한말에 유력 가문으로 떠오른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이다. 윤영렬의 차남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윤치호가 당숙, 윤치성윤치영은 숙부이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1915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잠시 활동하다가 탈퇴하고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별명이 "영국 신사".

귀국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등 요로를 통해 집요한 협조를 강요받았으나, 석왕사에서 은신하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과 사별하며 여식만 남겨두고 있던 터라 일본의 협박이 잘 먹히지도 못했다.잃을 게 없거든 심지어는 문중회의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기까지 했다.[8]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한다. 미군정에서 농상공국 고문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이 독선적 태도를 견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멀리하자 상공부장관을 사퇴하였다. 6.25 전쟁국민방위군 사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원 내각제라서 대통령의 권력이 억제되어 있었고, 1년 쯤 지난 후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워낙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간도 짧았다. 실권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 국무총리가 담당했다.

역임 1년만에 박정희5.16 군사정변으로 하야하려 했는데 당시 반응은 새벽에 보고받았던 "올 것이 왔다"였다.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주한미대사와 UN사령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한림 중장을 저지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2.2 하야 이후

존재감이 참 없었다.[9] 최규하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존재감이 없을까... 하면 그래도 윤보선 쪽이 낫다. 박정희와 두 차례(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대통령 선거)나 대통령 선거 대결을 했으며 특히 박정희 집권 전에 치뤄진 첫번째 선거는 거의 이길 뻔 했다. 바로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전력을 들춰 낸 것. 박정희는 매카시즘 하지마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혹해했다. 하지만 결국 그 색깔몰이로 영호남과 제주도의 반발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전남에서는 박정희에게 몰표가 쏟아졌을 지경이었다.[10] 매우 귀족적인 성향의 윤보선[11]에 비해, 박정희는 그 자신이 소작인 빈농의 자식임을 강조하여 농민 표가 박정희에게 많이 간 탓도 컸다.[12] 두 번째는 완패.

첫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정신적'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정신승리 5.16 이후 해산된 민주당 구파(사실 5.16 직전에는 신민당)을 규합하여 민정당을 창당하고[13] 총재로서 오래 정치를 했다. 이후 민중당신한당에 몸담다가 신민당으로 통합. 1971년 신민당의 유진산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유신시대에도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제5공화국에는 호의적[14]이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던 14살 연하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를 허탈하게 했다. 그의 비서를 지낸 조종호김정례 등이 민주정의당이 입당했다. # 말년에는 노태우를 공개 지지선언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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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22일 열린 제8차 헌법 개정안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석하여 인터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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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상으로 나온 제일 말년의 모습이다. 1989년 5월 17일 홍성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윤보선 전 대통령을 문병 당시의 사진. 이후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3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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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에 위치한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선영.[15]

4 여담

  • 서울에 있는 윤보선 고택은 고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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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쓴 글씨 중에서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이며 정확하고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다. YS와DJ의 대결구도는 사실상 윤보선과 장면[16] 세력, 즉 신구파의 갈등에서 기원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김영삼이 정계에 뛰어들게 한 '정치적 아버지'는 6.25 전쟁 때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이며, 이후 조병옥을 거쳐 유진산의 정치적 적자가 되었다. 윤보선과 친해져 민주당 구파의 후계자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나, 윤보선보다는 유진산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 YS가 장면과는 초면부터 확실히 선을 그은 것은 맞다.
  • 고향인 아산에서는 지역 알리기를 하고자 윤보선 고향임을 홍보했는데, 인지도가 듣보잡급이라 그런지 참혹하게 관광객 유치에 실패했다(...).
  • 영상물에서는 이순재가 윤보선 역할로 일세를 풍미했다. 드라마 공화국 시리즈제2공화국은 윤보선 생전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훗날 인터뷰에서 소감을 물으니, '연기를 점잖게 잘 하는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사실 실제 이상으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4.1 각종 타이틀

  • 2016년 기준으로 권한대행을 포함해 가장 장수한 전임 대통령(향년 92세)[17] 이다. 2위인 허정보다 163일 더 오래살았다.
  • 조선시대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
  1. 대통령 재임시에는 민주당이었다 무소속으로 바꾸었다.
  2. 특이하게도 한글이 아닌 영어 서명을 썼는데, Posun Yun의 앞글자만 따서 PSY라고 사인을 했다. 그 가수 말고
  3. 실질적인 정부 수반으로서의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이 담당하였다.
  4. 처음에는 헌법기관이 사라진다는 이유로 쿠데타 세력과 미군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야를 말렸지만,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처럼 되다가 기성 정치인의 출마를 금지한 민정이양 계획 발표에 따라 1년 뒤 하야를 사실상 강요당해야했다.
  5. 아산시 둔포면에서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길도 "해위길"이라고 명명되었다.
  6. 해위란 호는 독립운동가 신규식상하이에서 지어준 호이다. 해위란 바다 갈대라는 뜻이다.
  7. 가문의 창씨는 이동(伊東, 이토)이었다. 친일행위가 존재한 윤치호는 '이동치호'로 창씨개명했는데, 사람들은 '이 똥 치워'라고 조롱했다.
  8. 오죽하면 리그베다위키 시절에 정치적 편향과 소송드립 등 각종 논란을 우려해 정치인 항목이 거의 다 사라졌어도(그나마 대통령 항목을 남기긴 했으나 사후에도 정치적인 논란 등을 우려해 기본 내용만 남김.) 이 항목은 남아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무위키 시대가 열리고 각 대통령들의 항목이 어느 정도 내용이 채워지고 있는 와중에, 이 항목 다른 대통령은 있는 평가도 없을 뿐더러 내용 채워지는 속도는 심히 안습하다. 그야말로 한없이 낮은 존재감.
  9. 서부경남, 전남 지역은 남조선로동당 유격대의 활동으로 피아를 구분없이 숱한 인명이 사라진 지역이다. 특히 전남의 경우 한국전쟁 기간 정규군과의 교전도 없었는데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제주도는 4.3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5대 대선에서는 이 세 지역(전남 57.2%, 경남 61.7%, 제주 69.9%)의 박정희 득표율이 경북(55.6%)보다 더 높았다.
  10. 지방 유세를 가면 물을 마시거나 여관에서 자는 것도 꺼렸다. 기생충이나 세균이 있을 것 같다고.(...) 이건 뭐 장면도 비슷했지만.
  11. 지역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 선거 양상은 딱 4글자로 요약이 가능하다. 여촌야도. 때문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는 박정희 지지율이 더 나오고, 광주, 부산, 서울에서는 윤보선 지지율이 더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농현상으로 시골 인구가 급감하고, 1970년대 접어들면서 TK 지역주의가 노골화되자 사라진다.
  12. 제5공화국민주정의당과는 전혀 다른 정당.
  13. 당대에는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의 대표'윤'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윤보선 평전에서는 김대중, 김지하 등 재야인사들의 석방에도 나섰다고 하면서 신군부 협력 사실을 반박했다.
  14. 또 역장이라고 하는데, 조상산소 윗쪽에 후손의 묘라는 뜻이다.
  15. 김대중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
  16.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함으로써,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24년까지 생존해 있을 경우 가장 장수한 대통령 타이틀을 뺏기게 된다.하지만 전두환은 행적을 보면 딱히 의미가 없어서 그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