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리노 해전 | ||
날짜 | ||
1827년 10월 20일 | ||
장소 | ||
그리스 남단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안의 나바리노 만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국 | 이집트-오스만 투르크 |
지휘관 | 에드워드 커드링턴,앙리 드 리니,로힌 헤이덴 | 이브라힘 파샤[1] |
병력 | 영국군:전함 3척, 프리깃함 4척,쌍돛대 범선 1척,커터 1척 프랑스군: 전함 3척,프리깃함 2척 , 커터 2척 러시아군:전함 4척,프리깃함 4척 | 프리깃함 4척,전함 3척.코르뱃함30척,쌍돛대범선 28척,스쿠너선5척,수송선 수십척,화공선 다섯 척 |
피해 규모 | 178명 전사 선박피해 없음 | 선박 60척 대파 8000명 이상 전사 |
결과 | ||
그리스의 독립 확정 . |
1 배경
1.1 그리스 독립전쟁
1822년 1월 그리스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공화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대해 오스만투르크는 그리스 전역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가하였으며, 이 사건을 알게 된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찬성하는 뜻을 비쳤고 바이런의 경우에는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투르크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기까지 했다. [2] 그러나 구심점이었던 바이런이 열병으로 죽은 후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기세가 꺾였고 한편 불리한 상황에 놓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마흐무드 2세는 무하마드 알리에 의해 통치되어진 이집트에 도움을 구했다.알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의 할양 등을 요구조건으로 하면서 1824년 7월에 참전을 결정하여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는1825년 2월에 칸소,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부에 남겨졌던 오스만 최후의 거점이던 메트니에 상륙했다.그리고 나발리노, 메솔롱기를 점령하고 아테네도 함락시켰다. 위기상황에 빠진 그리스군은 유럽 열강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는데그 한편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코로코트로니스, 그리스 본토에선 게오르기우스 카라이스카키스, 해상에서는 안드레아스미아울리스가 게오르기우스 사크튜리스에게 집결하여 각 세력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크레타섬에 상륙한 이집트군(사령관 하산 파샤)은 처음에 크레타 동부에서의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서부에선 그리스군의 격렬한 저항을받았다. 이에 이집트군 사령관은 후세인 베이로 교체되었는데, 후세인은 동굴로 달아난 기독교도들을 질식시키기 위해 불을 피워 학살하고 가혹하게 다루어 이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추방시켰다.이 때문에 그리스군은 크레타섬 동부로 철수했지만 결국 대다수가 1824년 4월에 붙잡혀 이집트로 연행되었다. 일부 군대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도망하여 1825년 7월에 크레타섬 재탈환을 목적으로 900명의 부대가 크레타섬에 상륙해 요새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집트군의 우세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2 연합군의 참가
이 사태를 보고 있던 영국의 외무장관 조지 캐닝[3] 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1825년에는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후 장례식에 웰링턴을 보내 새 황제 니콜라이 1세를 움직이게 했고 그 결과 1826년 4월 4일 다음과 같은 의정서를 조인했다. [4] 또한 프랑스를 참가시키기 위해서 1826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파리를 방문했다. 리버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이듬해 4월 총리가 된 캐닝은 자신의 그리스 정책을 새 내각에서 최우선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1827년 7월 6일 런던협약을 체결한다. 그 전문은 세 강대국이 해적행위를 근절하고 통상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군력을 동원해 개입한다는 것이었다. [5] 그리고 이 협약이 체결된 지 1주 후 근해에 있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 함대에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양측이 받아들임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만약 그리스가 찬성하고 투르크가 거부할 시 연합함대는 즉시 움직여 투르크의 육군이나 해군의 증원부대가 그리스 영해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6] 고더리치 자작이 새로이 수상에 취임한 후 1827년 2월 영국은 에드워드 코드링턴 제독을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임지로 떠나보냈다.
3 전투 경과
1827년 9월 7일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코드링턴은 이슬람 함대를 그리스 해안에 단절시키는 작전을 개시했고 이에 맞서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슬람 함대는 나바리노에 닻을 내렸다. 코드링턴은 해상에 위치를 고정시키고 드 리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여기에 합세했다. 이브라힘 파샤는 술탄으로부터 추가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9월 25일 휴전협정에 서명했지만 10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협정을 깨고 파트라스의 그리스 선박을 공격했고 코드링턴 제독은 프리깃함 두 척과 쌍돛대 범선 한 척으로 물리쳤다. 그 후 하이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와 합류한 후. 계속해서 이브라힘이 살인과 방화를 계속하자 코드링턴은 프랑스와 러시아 제독과 협의해 나바리노 만으로 진입해 이브라힘의 함대를 봉쇄해 버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연합군은 10월 20일 오후 2시에 나바리노 만에 진입을 개시해 해전을 개시했다. 4시간 정도 계속된 나바리노 해전은 화력에서 우세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7] 연합군은 178명만이 사망했지만 이슬람은 8천여명이 넘는 사망자와 60척의 선박이 대파되었고 나머지 29척은 전투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8]
4 영향
그리스는 이 해전으로 독립을 성취하였다. 반면에 러시아는 아쉬웠는데 조건부로 이 전쟁에 참여해 자신들의 입지가 위험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로써 메테르니히가 세운 반자유주의와 반민족주의의 빈 회의의 약정은 사실상 개별적 이익우선을 추구하는 국가들에 밀려 무너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