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1세

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알렉산드르 1세니콜라이 1세알렉산드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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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파블로비치 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생애 : 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2일(58세)
재위 : 1825년 12월 1일 ~ 1855년 3월 2일(29년 91일)

1 개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3대 차르이자, 폴란드 국왕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퍼진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그저 언론 탄압과 숙청을 한 인물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이며 알렉산드르 1세의 셋째 동생이다. 형이며 전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와 나이차가 무려 19살이나 난다.둘째형과는 17세 차이가나고 그 사이에 누나가 여섯[1]이다.

즉위 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2 갑작스러운 즉위와 사회 혼란

형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는 둘째형인 콘스탄틴 대공으로 황태제의 지위에 있었는데, 콘스탄틴 대공이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귀천상혼을 하자 1820년경 형인 알렉산드르 1세가 법령으로 귀천상혼 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계승권을 인정치 않는 법령을 공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미리 제정해두었고, 콘스탄틴 대공도 두번째 결혼도 나이가 거의 40이 넘어서 했기 때문에 자식도 그때까지 없는데다가 별로 황위에 미련이 없어서 한술 더떠 자신까지도 상속권으 포기하며 이에 동의하게 한다. 이에 때라 니콜라이가 형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가 된다.

문제는 니콜라이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것...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 겨울에 급사하고 신하들은 공식적으로 황태자 지위에 있던 콘스탄틴을 옹립했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이를 거부했고 다음 순위인 니콜라이도 형을 뛰어넘고 물러받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래서 3주동안 콘스탄틴 대공이 폴란드 총독으로 있던 바르샤바와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왔다갔다 하는 빵셔틀이 펼쳐진다. 콘스탄틴 대공이 막내 동생 미하엘 대공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수도에 파견하여 니콜라이를 설득해 결국, 니콜라이가 새 황제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우여 곡절 끝에 즉위했는데 즉위식 때 군대 사열에서 콘스탄틴 대공에 충성을 바치던 일부 군인들이[2] 새황제에 충성을 거부하고 이탈하며 단초가 된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곤욕을 겪게 된 이후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유럽의 기존질서 유지에 철저한 역할을 담당해서 신성동맹을 유지시켰고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폴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폴란드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던 자유와 자치권을 박탈했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1849년 헝가리에서 일어난 혁명을 합스부르크 왕가를 도와 진압하였다.

3 몰락과 쓸쓸한 최후

그러나 유럽의 헌병이라 불리며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극도로 억압했던 그의 외교정책은 1853년 발발한 크림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비록 크림전쟁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간의 전쟁이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을 원조했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도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해왔던 것이다. 즉 러시아의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억압이 오히려 주변 유럽국가들에게 부담이 되어서 도리어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당하게 된 것이다.

결국 크림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참패를 당하여 군사적, 정치적 타격을 입은 채 실의에 빠져살았다. 그러다 1855년 측근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차가운 빗속에서 군대를 사열을 하다가 폐렴으로 쓰러져 1주일 후 사망하였다. 그나마 전쟁은 끝난건 1856년이었는데 일부에서는 크림전쟁의 패배에 절망하여 굴욕적인 전쟁 종전 협정에 서명하는 꼴을 보이기 싫어 음독자살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 니콜라이 2세와의 공통점

무엇보다 증손자 니콜라이와 처해진 운명이 닮았다.

차이점이라면 본인의 가문은 대를 이었으나 증손자의 대에서 가문이 멸족당했다는 점.

5 가족사

정말 불행하지 않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족사가 불행했다.

  1. 그중 한명은 3살에 죽엇고, 2명은 난산으로 죽었고, 1명은 그 휴유증으로 단명했다. 살아남은 2명도 시집 이후 니콜라이를 본 적이 없이 쓸쓸이 숨을 거두었다. 참고로 이 누나들 중 하나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에 시집을 갔는데 이 누나의 딸 즉 조카중 하나는 자기 처남인 빌헬름 1세의 황후인 아우구스타이다
  2. 콘스탄틴 대공은 알렉산드르 황제 치하에서 군인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활약을 오래 했기 때문에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에비하면 니콜라이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까마득한 풋내기...
  3. 그래서 이들은 미들네임으로 '니콜라이의 딸'이란 뜻의 '니콜라예브나'가 있다.
  4. 1801년 3월 9일 오스트리아에서 딸 알렉산드리네를 낳았으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알렉산드라도 3월 16일에 출산의 여파로 죽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죽음 이후에 그녀의 남편(레오폴트 2세의 아들-즉 프란츠 2세카를 루트비히의 동생이다.)은 새로 결혼했다.(......) 1주일 후에는 파벨 1세가 암살되었다.
  5. 독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에게 시집갔으나 딸 마리를 낳자마자 죽었다. 그녀의 남편도 아내의 죽음 이후 건강이 나빠지다가 1819년에 죽었다.
  6. 이 사람의 딸이 작센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이니 빌헬름 1세의 장모다. 참고로 빌헬름 1세는 이 사람보다 11살 어린 1797년 생인데, 아우구스타는 1811년생이다. 이로 인해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는 니콜라이 1세와 외할머니의 동생인 동시에 고모부인 관계다
  7. 독일 소왕국인 헤센-카셀 출신의 남자와 결혼했으나 알렉산드라는 이미 결혼 전부터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다가 1844년 아들을 낳고 죽었다. 엄청난 미인이었고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정말 사랑했던 딸인데, 타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니콜라이 부부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