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999년작 영화. 스페인, 미국, 프랑스 공동제작으로, 쟝르는 초자연적 미스테리물.
1 줄거리 (스포주의)
희귀한 고서적을 추적해 사들인 뒤 높은 값에 되팔아 돈을 버는 뉴욕의 고서적상 딘 코르소(조니 뎁 분)가, 부유한 책 수집가인 보리스 볼칸(프랭크 랑겔라 분)으로부터 어떤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 이를 찾는 과정에서 위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17세기 작가인 아스트리데 토키아가 쓴 "어둠의 왕국의 아홉개의 문"이라는 책인데, 원판은 따로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토키아가 만든 사본 세 권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원판은 악마가 직접 썼으며, 사본 세 권 중 두 권은 가짜이고 단 한 권만이 원판과 똑같은 진본으로서, 진본의 삽화에 나온 대로 의식을 행하면 악마를 불러내 영생과 불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볼칸은 이를 허황된 소리라며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도, 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될거라며 자신이 거금을 들여 입수한 사본 한 권을 코르소에게 맡기는 등 진본에 대한 열망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볼칸이 입수한 사본을 되찾아가려는 원래 주인(영화 시작과 동시에 자살하는 노쇠한 남성)의 미망인인 탤퍼부인 리아나(레나 올린 분)가 코르소를 유혹하기도 하고, 코르소의 책을 맡아 보관중이던 동료 서적상이 기괴한 모습으로 살해된 채 발견됨과 동시에 코르소의 신변에도 점점 위협이 닥쳐온다. 코르소는 살해당한 동료에게 맡겨두었던 사본이 사라진 것을 의뢰인인 볼칸에게 보고하는데 시간낭비 하지 말고 나머지 사본의 행방을 찾으라는 볼칸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으로 떠나고, 수수께끼의 젊은 여인(엠마누엘 자이그너[1] 분)이 접근하는데, 코르소는 그녀의 도움으로 극중에서 이후로도 몇 번이나 탤퍼부인 리아나의 사주를 받은 수하들에게서 생명을 건지게 된다.
나머지 두 권의 사본은 포르투갈의 빅터 파르카스라는 몰락한 귀족 노인과 프랑스의 케슬러 남작부인의 소유였는데, 두 사람 모두 자신이 갖고 있던 사본이 진본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으며, 공교롭게도 코르소와 접촉한 거의 직후에 동료 서적상처럼 기괴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코르소는 자신의 손을 거친 각각의 사본들 삽화에 수상쩍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채고,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스페인의 쌍둥이 형제가 오랜동안 유지해온 고서적 복원 전문점에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되면서 그 의심이 본인만 갖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까지 확인하게 된다. 코르소는 세 권의 사본들끼리 비교한 삽화들의 차이가 교묘하게 꼬여있는 것을 알게되면서 진본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그 와중에 볼칸에게서는 의뢰를 어서 완료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고 자꾸만 코르소의 코앞에서 소유주의 해괴한 죽음과 함께 삽화들만 찢겨 나간 채로 절반 이상 불에 타버린 다른 사본들 때문에 난관에 부닥치게 되는데 그 때마다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나타나는 미묘한 여인의 도움으로 방향을 가다듬어 간다.
볼칸 이외의 다른 두 사람의 소유주들이 죽음을 맞이한 후에 코르소는 자신을 미행하면서 소유주들의 살해를 일삼은 장본인이 다름아닌 탤퍼부인 리아나였음을 알고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쫓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탤퍼부인이 은신한 장소인 프랑스 파리 교외의 작은 마을에까지 미묘한 여인의 인도로 다다르게 된 코르소는 탤퍼부인 리아나가 결혼하기 전의 친정인 생마틴(Saint_martin)가의 대저택에 잠입하여 그곳에서 악마 숭배자들의 의식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의식을 주도하는 사람이 바로탤퍼부인 리아나였으며 책을 이용해 악마를 불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볼칸이 난입하여 그들의 의식 자체를 비웃고 리아나를 살해한 뒤 충격과 공포로 흩어져 달아나는 악마숭배자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코르소는 생마틴 저택에서의 오해로 미묘한 여인과 헤어져 혼자서 볼칸을 쫓아가고, 볼칸은 코르소가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이용해 의식을 치르는데 악마의 은총으로 불사신이 되었다며 환희에 찬 볼칸에게 좀더 확실하게 증명해보이라는 식으로 부추기는 코르소를 깔보듯 쳐다보고는 이런 믿음없는 불경한 자 같으니 자신만만하게 직접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혼자서 도취하지만 악마의 은총은 커녕 몸에 불이 붙어 고통을 못이기고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만다.
온 몸이 맹렬한 불꽃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볼칸을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린 후 코르소는 책과 뜯겨진 삽화들을 그러모아 화재에 잠식되어가는 성에서 빠져나오는데, 차에 올라탄 코르소의 입에서 불붙은 담배를 빼앗으며 느닷없이 나타난 미묘한 여인은 코르소를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둘은 불타는 성 앞에서 알몸이 된 채로 관계를 갖는다.
날이 밝아온 후에 함께 길을 떠난 코르소에게 여인은 볼칸이 모은 삽화들 중에서 아홉번째가 가짜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알려 준다.
코르소는 다시 스페인의 쌍둥이 형제의 고서적 복원 전문점으로 찾아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많던 고서적들과 무거운 책장들은 모두 사라져 있고 쌍둥이 주인 형제의 행방도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책장을 들어내려 공사를 하던 인부들에게서는 어떤 힌트도 얻어내지 못할 것 같아 낙담하려는 찰나, 인부들에 의해 앞으로 기울여진 책장 위에서 두껍게 쌓인 먼지와 함께 미끄러져 떨어지는 한 장의 종이를 집어드는 코르소는 바로 그 종이가 찾아야하던 삽화임을 깨닫게 된다. 삽화는 다른 어떤 사본의 삽화들과 달리 한 눈에도 완전히 다른 삽화임을 알 수 있는 여러 갈래의 머리를 가진 용과 그 등에 올라탄 채로 한 손에 책(진본 어둠의 왕국의 아홉개의 문[2])을 펼쳐든 여인이 그려져 있었고, 그녀삽화 속의 여성의 얼굴은 코르소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도움으로 올바른 삽화들을 찾아낸 코르소는 악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성으로 돌아간다.
2 추가해석
그동안 의아한 장면들을 볼 수 있었을텐데, 그 여인이 코르소의 위기 때 어디선가 나타나면서 보여준 초자연적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여인은 코르소가 리아나의 수하로부터 강변에서 습격당할 때와 리아나의 집안 저택에서 악마 소환의식 중에 계단을 사용하지 않고 천천히 날아내려와 사뿐이 바닥에 안착한다.
그리고 집중해서 작품을 보아오고 있었다면 그 여인의 눈동자가 유독 차가운 색깔들로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불타는 성 앞에서 두 사람이 관계를 갖는 장면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장면으로, 코르소는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인간을 초월한 어떤 다른 존재의 힘을 발산하고 있음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그녀가 자신의 주위를 떠나지 않으며 진품의 책을 찾는데 정말 주요한 조언과 도움을 준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쯤까지 오면 그 여인이 코르소의 앞에 출현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될텐데, 그녀는 리아나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서의 '마녀'이며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한계에 갖힌 지혜와 욕심으로 흐려진 판단력의 가짜 마녀인 리아나와 달리 이쪽은 정확한 길을 미리 알고 있었던 진짜 마녀로 표현된다.
극중에서 그녀가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코르소는 그녀의 선택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사건이 연이어지며 어쩔 수 없이 휘말리게 되면서부터 점점 불가사의한 그 책에 깊이 관련되는 존재가 되는데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코르소는 그녀가 찾으려 하고 기다려왔던 사람으로 선택받게 된다.
앞서 언급한 눈동자 색깔이 변하는 장면들은 극중에서 모두 네 번의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는데, 그 때마다 코르소는 그녀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당한 채로 홀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때의 코르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묘한 그녀(진짜 마녀)로부터의 어떤 검증을 받고 있는 것이라 보여지는데 두 번째의 클로즈업 장면은 그녀가 흘린 코피를 직접 자기 손끝에 찍어 코르소의 이마에서부터 콧등까지 피를 묻히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전의 클로즈업 장면이 1차 검사였다면 2차 클로즈업 장면은 마치 중세시대에 영주들이 자신의 소유물들에 낙인을 찍어 소유권을 표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3]
불타오르는 성 앞에서의 두 사람의 정사장면은 피의 세례에서 최후의 완성 단계로 나아간 모습이라 볼 수 있으며, 사실상 악마를 소환하고자 시도했던 리아나는 마녀로서의 본분을 오해하고 스스로 선택을 받고자 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고, 볼칸은 진짜 마녀로부터의 인정도 조언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된 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열쇠인 삽화들을 분별해내는데 있어서 실패하였고 최후의 완성 단계인 마녀와의 정사[4]까지 다다르지도 못해 끝내 죽게 된 것이다.
진짜 마녀인 그 여인은 영화가 진행될 수록 자기 안위와 돈에만 관심이 있었던 소극적인 코르소가 점점 잔인한 면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는 것을 보면서 흡족한 듯이 코르소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하며 감탄하는 모습을 보인다.
모든 사건들의 시발점이자 원인인 고서적(어둠의 왕국의 아홉개의 문)은 원본은 따로 있고 인간계에 남은 사본이 세 권이라고 극 초반에 언급되는데, 인간계의 세 권 중에서 진본은 단 한 권임을 밝히는 볼칸의 말은 단 한 명의 적합한 자가 나타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적합한 자를 찾기 위해 준비하는 위치의 존재들도 많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볼칸은 그 적합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 믿었고 스스로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는 것을 방해할만한 존재들을 해쳐가면서 그 가능성을 사실로 만들려 발악하였으나 이미 정확한 길을 인도하는 진짜 마녀는 코르소를 선택한 후 였으니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이었던 셈.알았어도 포기하고 물러섰을지는 의문
인간계의 세 권을 각각 소유하고 있던 이들은 말하자면 '선택된 자'를 준비하기 위한 밑돌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단 한 명의 선택된 자가 점점 확실해질 수록 극의 전개를 따라 차례대로 제거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요컨대 볼칸과 탤퍼부인 리아나가 실패한 이유는 '정확한 길'로 인도되지도 못하고 진짜 마녀의 선택도 받지 못했으면서 건방지게도 애초에 정해져 있던 길이 아닌 스스로 자만에 빠져 착각한 길을 멋대로 걸어가 끝내 잘못된 순서로 주인님을 불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진짜 마녀는 '적합한 자'를 선택하고 정확한 길로 인도하기 위한 존재이며, 스페인의 쌍둥이 고서점 주인 형제도 마녀와 비슷한 포지션이나 좀 더 정확히 구분하자면 여러 갈래의 길 한 옆에 세워진 교차로 안내판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증거로 교차로를 통과해야하는 단 한 명의 '선택된 자'가 '인도하는 존재'인 진짜 마녀로부터 자격을 부여받게 되자 마자 사명을 완수했다는 듯이 사라진 것을 들 수 있는데, 극중에서 쌍둥이 형제가 어찌된 것인지는 이후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정확한 길안내를 받은 코르소에게 최후의 자격을 전달한 후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진짜 마녀도 사명을 완수했기에 모습을 감춘 것이라 볼 수 있다.
혹자는 코르소가 화재로 불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쩡한, 아니 불탄 흔적조차 보이지도 않는 그 성채로 준비를 마치고 다시 찾아갈 때 진짜 마녀를 만나러 갔다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하고 쉬운 결론을 성급하게 내린 것이다.
코르소는 성채 앞에서 진짜 마녀와의 정사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 인간사의 어두운 곳으로만 끈질기게 전해져왔던 '단 한 명의 선택된 자'가 되었음을 깨달았기에 더이상 할 일이 없어진 마녀를 만나러 갔다기보다 자신이 갖춘 자격을 인정받으려 실행했을 터.
증거는 마지막에 코르소가 다가갈 때 자격이 완전히 갖추어졌음을 상징하듯 새벽의 빛줄기는 성채에 걸려 아홉갈래로 빛을 내고 있으며 성채는 스스로 닫혀있던 문을 열어 '선택된 자'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3 평가
평은 그리 좋지 않은 작품이다. 특히 폴란스키 작품인 로즈매리의 아기와 유사한 점이 많은 작품이라 비교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독 미국 내에서 평가가 박한 것을 보면 감독 자신의 범죄기록/사생활 문제가 영화의 저평가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영화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적성에도 맞지 않는 액션 신을 끼워넣어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세니에르가 와이어 액션을 하는 장면은 필견.
하지만 감독 특유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괜찮으며 쟝르 팬이라면 한번쯤 봐둘만한 영화다. 3800만 달러 예산에 6000만 달러 가까이 벌어들여 흥행 면에서도 망작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