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하기 전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와 그의 동행인 이스기 엔타로 예비역 상사 |
1 개요
1931년 6월 27일, 관동군 소속 스파이였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가 농업기사로 위장하고 대흥안령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중국군에게 억류되어 살해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를 두고 중일 간의 외교분쟁이 발생하였으며 일본은 이 사건을 만보산 사건과 함께 만주사변의 좋은 구실로 써먹었다.
2 배경
당시 일본 군부는 만몽정책 수행 과정에서 소련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대만몽 군사작전 계획의 일부분으로 소련군의 북만주 출동에 대비하여 흥안령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군 참모본부와 관동군은 다이쇼 시기부터 5개 조사반을 파견하여 흥안령 일대의 조사에 착수하였고 1928년에도 3차례의 조사가 있었다. 당시 일본군 참모본부와 관동군은 소련군이 치치하얼 등지로 주력군을 집중할 것이라 예측하였기 때문에 흥안령 동쪽 지구에서의 교전을 상정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주력군을 집중시켜 북진시킨단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소련군의 배후 차단이 시도되었는데 이를 위해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를 파견, 소련군 배후 차단을 위한 흥안령 종단을 위한 숙영, 급양, 급수, 행동불편에 관한 현지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3 전개
사건의 발단이 된 나카무라 신타로(1897~1931) 대위 |
3.1 나카무라 대위의 행로
나카무라는 5월 10일 도쿄를 출발하여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들러 봉천에서 받은 여권 외에 하얼빈에서 받은 여명학회 간사, 농학사라는 가짜 신분증 등을 지참했고 관동군 참모부 조사반의 주선으로 북상, 흥안령 일대의 조사에 착수했다. 나카무라는 이스기 엔타로 예비역 기병 상사, 백계 러시아인 시로카프, 안내인인 몽골인 등 총 3명의 일행과 동행하여 6월 6일 이렬극특을 출발, 흥안령을 남하하여 제심하 상류를 거쳐 색륜을 지나 7월 3일에 조남에 도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중화민국 관헌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감시 중이었고 일본 측도 그것을 알아 5월 31일 주만주 영사 대리가 외무성에 지질학 연구를 명분으로 파견됐음에도 중국과 몽골 관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나카무라는 6월 9일 이렬극특 역에서 말 세마리를 얻어 조남으로 이동했다.
3.2 일본의 대응
3.3 장쉐량의 대응
4 결과
5 참고문헌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부, 서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