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萬寶山事件. Wanpaoshan Incident.
1931년 7월 1일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장춘현(長春縣) 삼성보(三姓堡)[1]에서 발생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의 소요 사태.
이 뒤에 일어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화교 린치는 그야말로 흑역사로 남았다.
2 과정과 결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1910년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조선인들은 경제적인 이유, 혹은 독립운동의 이유로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토지수탈 등으로 조선에서 살기가 힘들어지자 더 많은 인구가 연해주나 만주 방면으로 유출된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당시 일본 국적이었던 조선인들이 자국민이란 이유로 자국민 보호를 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에 일본 군경을 파견한다. 이때문에 중국에선 반한 감정이 일어난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얘기겠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보았다. 일본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르번구이쯔(日本鬼子)에 빗대 조선인을 얼구이쯔(二鬼子)라 부르기도 했다.[2] 반대로 조선에선 화교들의 유입과 계절성 중국인 노동자들의 등장으로 반중 감정이 대두된다.
1931년 일본은 중국인 앞잡이를 내세워 중국 지방정부에게 미개간지를 개발할 권리를 따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중국인 앞잡이 학영덕(郝永德)[3]은 제대로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족 농민 이승훈(李昇薰)과 계약을 한다. 이승훈은 이 계약을 이유로 180명의 조선인 농민을 이주시키고 개척 작업을 시작한다. 개척 작업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퉁(伊通)강의 관개수로 공사이다. 문제는 이 관개수로가 세워질 경우 주변 중국인의 농토에 피해가 간다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항의하자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을 파견하여 공사를 강행했다. 1931년 6월말에 관개수로 공사는 끝이 난다. 그리고 분노한 중국인 농민들은 관개수로 2리 가량을 메꿔버린다. 그러자 조선인 농민들이 이들과 대치하고 중국 경찰은 중국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은 자국민인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출동해 대치하고 무력 충돌이 빚어진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에게 발포했는데 조준 사격은 아니어서 사상자는 없었으며 충돌로 약간의 찰과상을 입은 농민들이 나온 정도였다. 공사는 7월 6일에 마무리 된다.
3 사건의 여파와 반화교 폭동
이 일이 있고 나서 일본 영사 소속의 경찰서는 조선인 농민이 중국인 농민에게 다수 부상당했다는 허위정보를 퍼뜨렸다. 당시 조선일보의 장춘 주재원인 김이삼이 조선에 이를 타전하여 7월 2일에 호외로 이 사건이 알려진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하면서 중대한 오기(誤記)를 하고 마는데 바로 조선인 농민이 중국인 농민에게 부상당했다는걸 살상당했다고 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잘못된 정보에 분노했다. 김이삼 본인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발표한 다음날 일제 밀정노릇하던 조선인에게 살해당했다.[4] 7월 2일부터 정정보도와 사과문이 실리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든 7월 10일까지 화교가 많은 서울, 천안, 평양, 인천, 부산 등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나서서 화교들의 거주지역과 가게를 공격했다. 당시 화교들의 진술을 보면 가게를 지키기 위해 끓는 물을 뿌리고 불에 달군 꼬챙이를 휘두르며 싸웠다고 한다.[5]
당시 파괴된 평양의 중국인 거리.
당시 만주 침략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원했던 일본 정부는 폭동을 방치했다. 폭동이 방치된데는 사이토 마코토의 임기 만료 후 우가키 가즈시게가 7월 11일 신임 총독으로 부임할 때까지 조선총독부의 통제력이 어수선했던 점도 한몫을 했다. (입헌민정당의 마지막 정부였던 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자체가 그렇게 안정된 기반 하에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일본 정부는 미지근했다. 국제연맹에 의하면 반화교 폭동으로 127명의 화교가 사망했으며 400여 명이 부상했다.[6] 폭동 기간 동안 화교들이 입은 피해는 당시 조선 엔으로 250만원 수준이었으며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한 화교가 4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화교들이 재산을 정리하고 이주하는 등 그 해 6만이었던 화교들은 겨울에 3만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 과정에서 일본의 왜곡과 조작이 있었음을 알리는데 주력하여 항일전선을 만들어낸다. 특히 조선과 중국의 악화된 감정은 이듬해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로 많이 희석되고 조선의 민족주의 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이나 중국의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한다. 그러나 많은 화교들에겐 반중감정이 일으킨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비교적 두루뭉술하게 서술하는 편이다. 혹은 단순히 일본의 분탕질로 일어난 일로만 치부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의 반중감정과 제노포비아가 작용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자체가 주목된 것도 그나마 최근의 일이고 언론에서도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는 사람이 없거든 만보산 사건에 대한 그 당시 조선인들의 태도와 해당 사건에 대한 현재의 한국 교과서의 태도는 관동 대지진 학살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와 섬뜩할 만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만보산 사건과 관동 대지진 학살이 둘다 제노포비아와 유언비어가 결합하여 발생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 중국 발음으로는 지린성 창춘현 싼싱바오
- ↑ 다만 이 표현은 중일전쟁 때에 주로 등장했다.
- ↑ 중국 발음은 하오융더
- ↑ 일본 특무기관 촉탁 앞잡이 노릇했던 악질 친일파 이종형이 부하를 시켜 죽였다. -출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p124
- ↑ 출처: 구술사료선집5 한국화교의 생활과 정체성(국사편찬위원회, 2007)
- ↑ 숫자는 조금씩 조사기관마다 차이가 있는데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 부상 118, 중국 측에서는 사망 142, 부상 546이며 만주사변 이후 조사를 한 국제연맹의 보고서에는 사망 127, 부상 392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