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

일본 제국의 외지
외지지역시대통치기관
화태(樺太)가라후토 ⒧화태청
조선(朝鮮)조센총독부
대만(臺灣)다이완총독부
남양(南洋)난요남양청
관동(關東)간토관동청
⑴ 가라후토는 1943년 이후 내지(內地, ないち, 본토)로 편입
장춘에 있었던 관동군 사령부.
관동군 사진

1 개요

일본어 : 関東軍(かんとうぐん)
영어  : The Kwantung Army

관동군은 옛 일본 제국총군 가운데 하나였다. 관동군의 '관동'은, 일본 본토의 지역 구분 중 하나인 관동(간토)과는 무관하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여순(旅順, 뤼순), 대련(大連, 다롄) 일대에 租借하던 일본 제국은 이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로 명명했다. 산해관(山海關)의 동쪽 지역이라는 의미. 당초 일본 제국이 중국에게 획득한 지역은 요동반도였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여순과 대련 일대로 조차지가 축소되었다가 러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 전역을 다시 장악했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조직된 군대가 바로 관동군이다. 훗날 괴뢰국인 만주국이 수립된 후에는 만주 전역으로 작전 지역이 확대되었다.

1.1 시초

일본 제국은 청일전쟁 직후 요동반도를 장악했으나 삼국간섭을 위시한 외교상 각종 압력으로 반환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 후 중국을 위협해 기어이 이곳을 조차지로 확보하였고 이곳에 주둔할 부대를 1개 사단 규모로 편성했다. 이것이 관동군의 시초가 되겠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저 1개 사단은 본래 남만주철도가 관할하는 철도 연선을 수비하는 부대로 출발했었다고도 한다. 즉 관동군의 시초는 본래 철도 수비대인 셈.[1]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여순과 대련을 점령 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1905년 9월 5일)하여 러시아에서 이 지역의 조차권을 인수했다. 이 지역명을 관동주[2] 라고 정하고 관동총독부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만주국의 모태가 된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관동도독부'가 되었지만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이 전부이다. 이후 1919년 4월 관동청으로 다시 변경된다.

만철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고자 창설된 6개 독립 수비 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1.2 폭주

관동군은 일본 제국 육군 소속이었지만, 일개 총군 주제에 육군성이 아니라 덴노와 직속으로 이어지는 명령 체계가 있었다. 대한민국기무사가 생각나면 기분 탓이다 대본영이 설치된 후로는 대본영에 작전을 지휘받지만, 관동군은 자신들이 대본영과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라고 생각했으며, 이런 생각으로 후에 만주사변이나 할힌골 전투를 일으켰다. 이는 결론으로 일본의 패망을 부르는 도화선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으로 비유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동부전선을 관할하는 제1야전군사령부가 (가칭) '관동군'[3]이란 명칭을 받고
  • 동부전선의 중요성을 명목으로 일개 야전군 주제에 육군본부도 아닌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직속으로 명령 체계가 이어지고,
  • 스스로 합동참모본부와 수평 관계라고 여겨서 합참의장조차 관동군 사령관에게 명령이 아닌 '협조'를 요청해야 할 지경이며,
  • 군 통수권자가 수장으로 있는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놓고 반발하면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구역, 강원선(옛 경원선) 철도 등에 제멋대로 침투해 대북 도발을 벌여 제2차 한국전쟁을 야기한다

...그나마 한국은 대통령과 NSC에서 명령으로 진압하면 그만이지만 얘넨 그런 것도 없다. 끝발 죽이네

관동군은 관동주를 거점으로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노렸고 1928년에 중국 군벌장작림(장쭤린)을 폭사시키고 중국 국민당에 혐의를 덮어씌워 이곳을 차지하려 했으나 그 아들 장학량이 일본 제국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국민당군에 합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작심한 만큼 일본 제국은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고 1932년 대좌 이시하라 간지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철도의 운영권을 일본 제국이 소유했으므로, 해당 폭파 책임을 중국 측에 돌려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침략을 개시했다. 이곳에 배치된 중국 동북변방군(동북군, 바로 장학량의 군벌군이다)은 200,000 명이 넘었지만, 관동군 불과 10,000 명에게 만주를 빼앗기고 만다. 그 이유는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게 우선이니까 저항하지 말고 산해관 내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런 명령 탓에 장학량은 이후 장개석에 불만하고 장개석을 감금하여 국공 양당의 항일 연합을 촉구하는 시안 사건을 일으킨다.[4] 이런 사건 일련은 중앙의 명령이 전혀 없이 벌어졌고 중앙 행정부는 사후 추인하기만 했다. 군부의 폭주가 국가를 막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렇게 만주를 차지한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관동군을 계속 확대했다. 관동군사령관은 만주국을 실제로 지도했고 만주국의 모든 행정은 일본 제국인 관료나 관동군 참모가 결정했다.

중국인조선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100 부대와 731 부대를 운영했다.

1.3 확대

만주를 침략하여 소련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기에 관동군은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고 병력을 점차 늘렸다. 1945년 만주 작전 당시 관동군의 병력은 근 750,000명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선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관동군의 주력은 남방 전선으로 빠져나가 속 빈 강정에 불과해졌다.

여기에다 관동군은 보조 병력으로 만주군도 거느리고 있었다. 어차피 만주국 자체가 일본 제국, 아니 관동군의 괴뢰국이었으므로 그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허나 만주군은 관동군보다 훈련 수준은 물론이고 충성심과 사기 모두 극도로 낮았기에 전력으로선 별 가치가 없었다. 당초 만주군의 시초부터가 장학량에게서 강탈네토라레한 동북군 병력이었고 마적 떼나 다름없던 당시 중국 군벌군의 상태는 막장 그 자체였다. 만주군의 자세한 사항은 만주군 항목 참조.

만주는 육군 대국인 소련과 맞닿고 있었기에 일본 제국 육군은 소련군과 대치하는 관동군을 최정예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동군은 유망한또는 정치질하면서 라인 잘 타는 일본 제국 육군 장교가 거쳐가는 출세 코스이기도 했다. 라인 잘 타던 인물의 대표격도조 히데키도 관동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소련몽골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을 중시해서 소만 국경의 병력을 늘렸다. 그러다가 결국 1938년에는 조선 만주 소련의 국경 지역인 두만강 유역에서 충돌했다. 이 전투가 하산 호 전투이다. 이 하산 호 전투에서 관동군은 초반에 소련 군대를 퇴각하게 하는 등 선전하는 듯했으나 당연히 반격받았고 상호 간 군사상 적대 행위를 금지하면서 그 뒤로는 군사상 충돌이 없었다.[5] 그러다가 다음해 여름(1939년 5월)에 몽골 만주 국경에서 군단급으로 맞붙었다가 소련군 의 화력과 기갑부대에 말 그대로 박살이 난다. 이것이 바로 일본 측이 노몬한 사건이라고 일컫는 할힌골 전투이다.

이런 전투는 모두 대본영의 명령을 어기고 관동군이 제멋대로 일으킨 사건이었기에 패배를 문책해 관동군 사령관, 참모장, 사단장 여러 명이 예편되었는데도 관동군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독소전쟁이 개시되자 소련을 위협하고자 1941년 병력 1,000,000명을 동원한 "관동군 특종 연습"이라면서 무력을 이용해 시위하였다.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을 경계하던 소련의 동향을 볼 때 사소한 국경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관동군은 히틀러의 독소전쟁에 합세하여 소련 침공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에 책임을 덮어씌우면 완벽한 자위 전쟁. 만주사변 때나 중일전쟁 때도 이런 식으로 전쟁을 도발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행정부는 적어도 관동군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전쟁이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외무성의 장관 도요타 데이지로가 소련 측에 자세한 훈련 상황을 통보하여 별다른 충돌 없이 지나갔다.

1.4 최후

중국 영화인 퍼플 선셋의 한 장면. 소련군의 여타 군대를 압도하는 기갑 전력에 완전히 개발살나는 관동군의 모습이다.

GAZ-67 대신 Willys MB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랜드리스 받은 건가 보다.

1941년 12월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관동군은 우선 순위에서 처졌고 휘하 여러 정예부대가 중국 전선이나 남방 전선로 이동하게 되어 관동군은 거의 2선급 부대의 집합소가 되었다.[6]

전쟁 말기로 가면서 정예부대가 빠진 구멍을 메우느라 재만 일본 제국인을 동원, 머릿수는 여전히 750,000명이라는 상당한 수치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제는 소총 부족 현상을 비롯해 장비와 보급도 충실하지 못해서 단위 부대 전체가 칼과 창과 낫으로 무장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아 있던 정예부대도 일본 제국 본토를 방어하고자 소환되면서 관동군은 완벽히 껍데기가 된다.

게다가 관동군이 세운 방어 계획은 제이차세계대전의 교훈을 거의 반영하지 않고 마지노 선과 비슷한 요새소련군을 막는 동안 예비 병력으로 소련군이 뚫은 방어선의 구멍을 막겠다는 어이없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기동전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데다가 독소전쟁초기 독일군에게 전해들은 소련군의 추태만 반영하고 소련군을 얕잡아본 결과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사태였다.

결국 1945년 8월 9일, 소련만주 작전을 실시하여 소만 국경을 돌파해 들어왔다. 관동군은 체계 있는 반격이 불가능했고 개전 1주일만에 붕괴되었다. 그리고 관동군은 만주 지역의 일본 제국 군관민들을 포기한 채 패주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위의 영상에 나올 정도의 반격도 일부 부대에서만 개별로 행했지 대부분은 추풍낙엽으로 모조리 무너져 패주했다. 그 사이 소련군은 1주일만에 거의 1000km를 주파하는, 파죽지세로 공세를 펼쳤다. 개전 초기, 이미 소련군의 주공도 아니고 조공 병력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여 8월 15일에는 함경북도 중부인 나남까지 진출했을 지경이었다. 이미 종이 호랑이가 된 관동군이, 당대 세계 최강 독일군을 격파한 소련군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참고로 소련군의 작전 목표는 '관동군 세력의 괴멸'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일본 제국군 대본영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북을 관동군 위수지로, 이남을 17방면군 위수지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의 조공이 북한 지역으로 설정되었던 것.

결국 일본 제국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 후인 1945년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도 무조건 항복. 만주에서 사로잡힌 관동군 600,000명은 1955년까지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일대 등 소련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가 석방되어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1.5 특징

한마디로 군대 자체가 계급에 상관없이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만 훈련하는 부대이다. 이 때문에 장교가 장교로서 제대로 훈련받는 병과는 보병 병과밖에 없었으며 기갑이나 포병도 장교들이 지휘를 훈련받긴 했으나 보병에 비하면 그 비중이 떨어졌는데 비전투병과 장교는 참모부 업무만 철저히 훈련시켜서 계급이 높아도 병과로 서열이 갈리는 때가 잦았고 심할 때는 비전투병과 대좌가 보병 소위에게 지휘받는 극도에 도달한 사태까지 발생했다.막장[7]

할힌골 전투를 분석한 책인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를 보면, 관동군의 특성은 바로 하극상(Gekokujo)라고 한다.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나 전쟁 대학의 교육 과정은 소대와 중대 같은 소규모 단위부대를 지휘하는 능력보다는 사단급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 배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런 교육을 이수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들은 자신이 소규모 부대 지휘관이더라도 대규모 부대를 운용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경거망동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참모 장교로 많이 활동하던 좌관급 장교단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했고 츠지 마사노부가 일개 소좌인데도 관동군 참모단 내에서 그 깽판을 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던 이유다. 심지어 할힌골 전투 당시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서명을 날조해 전투를 일으키는 빼도박도 못할 하극상을 일으킨 작자이다.

1.6 관련자

  • 우에다 겐키치 - 할힌골 전투 당시 관동군 사령관. 할힌골 전투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정예부대가 아닌 신병 위주로 구성된 사단에 설욕전을 벌이라고 강요하여 패배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다리 한 쪽을 잃었다.
  • 기시 노부스케 - 전후 일본 현대사에서도 총리로서 꽤나 비중 있었던 인물. 근데 전범이다(...).
  • 이시이 시로 - 731 부대의 수장이자 동양판 요제프 멩겔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세지마 류조 - 기시에보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만주군 내 일본 제국 장교 커넥션의 중요한 인사. 다만 처음부터 관동군은 아니고 내지 대본영으로 입대한 것이었으나 만주로 전출되다시피 한 것이다.
  • 츠지 마사노부 - 관동군 작전 참모 시절 출세욕에 불타 상또라이짓을 감행한다. 항목 참조.
  • 후나사카 히로시 - 제 14사단 59연대 1대대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의 전황 악화로 자신이 속한 대대와 제2연대와 제15연대와 함께 팔라우 제도로 배치되고 제2연대와 제15연대는 펠레리우 전투를, 본인과 제59연대 1대대는 앙가우르 전투를 치르게 된다.

2 관동군(關東軍)

삼국시대의 반동탁연합군, 18로 제후군이라고도 한다. 함곡관의 동쪽인 관동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관동군이란 이름이 붙기도 한다. 용어 자체는 당연히 1의 항목과는 관계없으며(...) 인지도도 역사 삼국지 매니아 외에는 아득히 1에 미치지 못한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1.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바야시 히데오가 쓴 "만철:일본제국의 싱크탱크 " 참조.
  2.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의미하기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반도 일대를 러시아가 관동주라고 명명했고 일본 제국은 답습했을 뿐이다. 그 면적은 3,462 제곱 킬로미터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여순과 무역항 대련이다.
  3. 공교롭게도 강원도의 별칭도 관동이다(...)
  4. 그런데 현재 교차검증을 한 결과 장쉐량의 실책이 더 큰 걸로 판명됐다. 당장 무저항 명령도 장쉐량 본인이 내린 것이다.
  5. 단 엄밀히 말해, 하산 호 전투에서 전투에 직접 참가한 일본 제국 측 주력부대는 관동군 소속이 아니라 조선 주둔군 중 하나인 일본군 제19사단이었다.
  6. 여기에 더 병크는 이런 정예부대들의 장비들은 혹한에 대비된 것이었기에 열대 지방인 남방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부터가 실전과는 거리가 있는 기병 학교장 출신이었다.
  7. 소련군도 직책이 계급보다 우선시되므로 중위 중대장에게 지휘받는 대위 소대장 같은 게 존재했지만, 관동군은 걍 보병이 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