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man Knight
1 개요
노르만 기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선 노르만족과 노르망디 공국, 그리고 바이킹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문서를 참조하라. 모험가 롤로를 필두로 한 바이킹 집단이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을 열심히 털어먹다 못해 점령하고 눌러앉아있자, 프랑크의 단순왕 샤를이 그들과 조약을 맺고 노르망디 지역을 아예 봉토로 줘버렸다. 이로써 바이킹 일족은 일단 지위와 명예를 얻은 건 좋은데 이걸 살리기 위해서는 중세 유럽의 사회에 편입될 필요를 느꼈다. 늦게 든 바람이 무섭다고, 이들은 기사도와 카톨릭에 심취했다.
이들이 기사도와 카톨릭에 심취했다고 해도 바이킹 특유의 공격성과 정복욕, 약탈성애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 윌리엄 1세가 노르만 공작일 때였다. 이 때만 하더라도 노르만 공작은 아직 프랑크 왕국의 신하였고, 주인을 칠 수는 없으니 바다 건너의 그레이트 브리튼에 공격성을 폭발시킨 것이다. 당시 앵글로 색슨을 비롯한 브리튼족이 지배하고 있던 그레이트 브리튼은 한창 북쪽의 하이랜더들과 덴마크 왕, 노르웨이 왕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앵글로 색슨의 해럴드가 왕위에 즉위하자 자신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교황청에 로비를 해 지원을 약속받고 사람과 물자를 모았다. 허울 좋은 작위만 있었던 노르만 기사들에게 봉토를 약속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 때의 전투에 대해서는 해럴드 2세와 윌리엄 1세를 참조하라.
브리튼족과 노르만족의 싸움은 노르만족의 승리로 끝났지만, 노르만 기사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노르만 기사들은 스스로 봉토를 쟁취해야 했다. 노르만 기사들이 만족할 만한 각자의 봉토를 확보했을 때, 2천명이 넘던 앵글로색슨 영주들은 자신의 땅을 포기하거나 살해당했고 그 자리를 300여명의 노르만 기사들이 대신 채웠다. 봉토를 얻은 기사들은 영주로 클래스 체인지를 해서 잘 살았지만, 모든 노르만 기사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르만 기사들의 광신적 신앙심이 폭발한 계기가 바로 동로마에서 날아온 한 장의 편지였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다. 노르만 기사들은 가서, 하던 대로 했다. 죽이고, 승리하고, 점령했다. 그 칼날은 결국 비잔틴 제국에게까지 미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세우기까지 하기에 이른다. 사실 여기에는 베네치아라는 흑막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청구할 채무를 탕감하는 조건으로 노르만 기사들을 사들인 것. 이 때문에 노르만 기사를 용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르만 기사가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것은 여기까지지만, 기사를 자칭하는 바이킹들의 후예는 계속해서 싸웠다. 노르만족 특유의 적응성은 그들의 고유성을 훼손시키고 주변에 동화하도록 만들어 결국 역사의 용광로에 녹아 사라졌지만 기사의 시대는 파비아 전투로 완전히 명맥이 끊기기 전까지 이어졌다.
2 무장
역사적으로 유명한 병종으로 구글 이미지 검색에 Norman Knight라고 쳐 넣으면 풍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특징은 역시 눈물 모양의 큰 방패인 카이트 실드. 그리고 중세 기사하면 떠오르는 플레이트 아머가 아닌 사슬갑옷이 인상적이다. 얼굴만 드러낸 채 머리 전체에 사슬을 천처럼 두르고 단단한 골무형식 철갑 헬멧을 위에 얹었다. 이 헬멧을 노르만 헬멧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골무 부분만 있었던 것이 십자군 전쟁을 거치고 후기로 갈 수록 얼굴을 많이 가리게 되며 결국 다른 국가의 기사들의 풀 헬름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노르만 기사가 어떻게 다른 문화 속에 녹아 없어졌는지도 알 수 있는 부분.
대부분의 자료에서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지만 누가 바이킹 혈통 아니랄까봐 개인무장으로 도끼를 사용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창기병의 시대 전이라 랜스를 들지는 않고 2m 정도 되는 창을 사용하는데, 대대적인 랜스차지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각개전투용 무기였다. 이 창이 부러지면 도끼를 들고, 여차하면 칼을 뽑아 들어서 싸웠을 것이다.
사실 이건 전형적인 무장일 뿐이고 실제로는 태생 자체가 해럴드 2세가 자기 휘하의 기사만 끌고 간 게 아니라 사방에서 병력을 모아다가 브리튼 섬으로 건너간 거라 개인 차는 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