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연안의 헬레니즘 제국의 하나인 비티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
기원전 94년 아버지 니코메데스 3세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니코메데스 4세가 되었다. 몇 년간 그냥저냥 잘 살았지만 폰투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세력을 키워서 비티니아를 공격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니토메데스 4세의 형제인 소크라테스를 부추겨서 거병을 시키고, 소크라테스가 니코메데스 4세를 격파했다.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로 달아났다.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았지만, 이번에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직접 군대를 끌고 비티니아로 진군해와서 다시 로마로 도망쳐야 했다. 로마에서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사령관이 돼서 비티니아를 도와 폰투스를 공격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니코메데스 4세의 왕위 복귀를 인정했다.
기원전 84년 니코메데스 4세는 비티니아의 왕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비티니아는 로마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해지게 된다.
기원전 81년, 아시아 총독의 부관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특사로서 비티니아에 파견되었다.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4세의 궁전에 오래 머물렀는데, 나중에 이것 때문에 니코메데스 4세와 카이사르가 동성애 관계였다는 스캔들이 벌어졌다. 고대 로마에서 동성애는 윤리적으로 금기되지는 않았지만, '삽입 당하는' 행위는 남자답지 못하는 것으로 폄하당했다. 당시 카이사르와 니코메데스 4세의 나이 차이를 볼 때, 카이사르가 '당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서 더더욱 스캔들이 커진 것. 이 때문에 카이사르에게는 '비티니아 왕비'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오죽하면 카이사르의 개선 행사 때 개선장군을 놀려먹는 전통에 따라 병사들이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니코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정복했다!"고 소리칠 지경. 물론 카이사르는 동성애가 사실이 아니라며 반박했지만, 로마 시민들에겐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원전 74년에 사망. 유언으로 비티니아 왕국을 통째로 로마에 증여해버렸으며, 원로원은 비티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트리다테스 6세가 유언에 이의를 제기하며 아르메니아 왕국과 함께 로마에 싸움을 걸어 또 전쟁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