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 - 78)

1 개요

술라는 로마 공화국 말기의 장군으로 로마 공화국을 뒤엎은 것에 큰 영향을 준 장본인이다. 아래의 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전쟁에서 업적을 이뤄냈고 이 때문에 '행운의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로 유명했다. 술라 본인도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행운아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행운을 뜻하는 "Felix"를 성 앞에 붙이는 존칭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름 중간에 코르넬리우스라는 가문명이 붙은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그는 당시 로마공화국에서 몇 안되는 전통 명문 귀족 출신이다. 특히 코르넬리우스라는 가문은 발레리우스, 파비우스 가문과 함께 로마의 으뜸가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술라는 어릴적엔 비교적 가난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귀족 가문이 받을 수 있었 것과 동등한 수준의 좋은 교육을 받는다.[1] 공식적으로 5번 결혼했으며 그 외에도 남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2 주요 경력

2.1 유그르타 전쟁

기원전 107년 그는 31살의 나이에 재무관에 선출되어 유그르타 전쟁의 마리우스 밑에서 종사하게 된다. 이때 술라는 매우 큰 공을 세우는데 유그르타와 동맹관계인 보쿠스라는 왕을 설득하여 유그르타를 생포하게 한 것이었다. 이때 로마 포룸에 이를 기념하는 조각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조각에서는 유그르타를 잡은 술라만 묘사되어있고 마리우스는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와의 사이는 나빠진다.

2.2 게르만족의 침략

기원전 101년에 게르만족 킴브리와 튜토네스가 갈리아를 거쳐 이탈리아에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37살이었던 술라는 처음엔 마리우스 밑에서 일하다가 나중엔 다른 집정관인 카툴루스 밑으로 보내지는데 이를 본다면 마리우스하고 사이는 점점 나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카툴루스 휘하에서 그는 기병을 이끌게 되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맞붙은 베르셀라이 회전에서 그는 대단한 지휘솜씨로 이 게르만족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시민들에게 유명해진 술라는 기원전 97년 41살의 나이로 수석 법무관에 선출된다. 그는 다음해에 터키 서부 지역의 총독이 되어 1년 정도 일하다 로마로 귀국한다. 귀국한 뒤 그는 원로원 의원이 되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적대하는 옵티무스 파의 일원이 된다.

2.3 동맹시 전쟁

5년 뒤인 기원전 91년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내의 다른 도시들에게 수여하는 것을 반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2]와 더불어 로마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는데 그는 대단한 맹활약을 하여 동맹시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 짓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로 인해 술라는 기원전 88년에 50세의 나이로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2.4 1차 로마 진군

술라는 집정관이 된 뒤 동쪽 헬레니즘 제국 중 하나였던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그런데 이때 동맹시 전쟁이 막 끝난 상태였고 또한 동맹시들은 다들 로마 시민권을 수여받은 상태였다. 로마에선 이들에게 어떻게 선거구를 줄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는 이들에게 기존의 로마시민들이 갖고 있는 선거구를 웃도는 선거수를 줄 것을 원하였다. 원로원이 반대하자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그때 로마에 있었던 술라는 마리우스 집에 피해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그 뒤 술라가 자신의 군단병이 있던 놀라라는 도시로 빠져나가자 이들 폭동을 일으켰던 민중파는 민회를 소집해 술라가 가지고 있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마리우스에게 맡기기로 결정한다. 이는 민중파의 지나친 폭거였는데 그 이유는 군단 지휘권은 집정관이 이끄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이를 박탈한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빼앗은 지휘권을 아무런 직책이 없는 민간인 신분의 사람[3]에게 준다는 것 또한 전례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술라는 당연히 분개하였는데 마리우스에겐 불행하게도 이 놀라에 집결된 로마 군단병이 이미 술라에게 사병화 된 상태였다. 그 이유는 술라가 군단을 편성하면서 일선 지휘관들을 전부 자신들을 따라 동맹시 전쟁을 수행했던 장교들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선 술라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 로마에서 파견나온 사절들에게 돌팔매질을 해서 쫒아낸다. 그 뒤 술라는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마리우스와 민중파는 이러한 술라의 행동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직 집정관이 자신에게 주어진 군단을 이끌고 로마시를 공격한 일은 로마 건국 이래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술라는 민중파가 일으킨 폭거에 더 심한 폭거로 대항한 셈이었다. 따라서 마리우스와 그의 일파들은 로마시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자신의 군대를 이끌로 놀라로 되돌아가 미트리다테스 원정을 하러 떠난다.

술라가 떠난 뒤 다른 집정관이었던 킨나의 도움을 받은 마리우스가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귀국하여 로마에 입성한다.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그에게 추방형을 내린다. 그 뒤 마리우스는 7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나 이미 71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해에 죽고 만다.

2.5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는 놀라를 떠나 그리스에 도착한 뒤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로마의 군사력이 강한 것을 보고 로마에 붙기로 결심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술라에게 사절을 보내 협력하겠다고 하였고 술라는 이들을 모두 환영하였다. 술라는 아테네를 포위한 뒤 곡식을 철저히 차단하여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 뒤 북상하여 케로니아라는 곳에서 폰투스군을 맞아 싸운다. 이때 로마군은 4만여였고 폰투스 군은 12만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술라는 적이 언덕아래의 돌투성이의 곳에 진지를 구축한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놓치지 않고 즉각 싸움을 걸어간다. 즉 팔랑크스를 쓰기에 좋지 않고 로마군 아래 언덕에 폰투스 군이 포진한 것. 적 사령관이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고선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로마군은 무장과 훈련이 잘 된데다 지형적 유리함도 있어 싸움은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폰투스 장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로마군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하였으나 술라가 직접 군대를 끌고 지원하여 격퇴하였다. 곧 중앙과 우익에서도 폰투스 군이 격퇴되고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사료를 남긴 로마시대 역사가인 아리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폰투스 군은 11만이 죽었고 로마군의 전사자는 12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실 이 정도 손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현대전과 달리 고대전에서는 전투 중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전사자는 후퇴 중에 발생하고, 보통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병사는 전사자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군은 현장에서 즉사한 군인만 따로 집계하고 적군은 추정살상까지 포함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수치이기도 하고, 로마인들이 기록한 전투들의 사상자 비율이 실제보다 과장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통설이므로 이 수치 역시 제법 과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술라는 킨나가 파견한 정규 로마군과 조우한다. 로마 정규군은 마리우스가 죽고 대신 집정관이 된 플라쿠스가 이끌고 있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 군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에 합류토록 유혹케 하였다. 플라쿠스 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플라쿠스 군에서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는 대신 북상하여 미트리다테스와 싸우기로 하였고 술라는 이들 플라쿠스 군을 쫒는 대신 남하하고 있는 폰투스군을 맞아 오르코메노스 곳으로 이동하였다.

오르코메노스에서 술라는 폰투스 군을 상대로 한쪽엔 참호와 도랑을 파 놓고 다른 편에 군대를 보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한다. 한쪽은 호수인데다 참호와 도랑으로 압박을 당한 폰투스 군은 패주하였고 이로써 폰투스 군은 대패한다. 이때 참호를 파서 싸운 것은 전사 역사에서 최초로 참호에 병사를 둔 뒤 싸운 예라고 한다.

오르코메노스에서 폰투스가 동원한 군은 8만으로 알려졌는데 기록에 따른다면 12만 중 11만이 죽고서도 뒤이어 8만을 동원했다는 말이 된다. 동원력으로 친다면 폰투스는 중국의 거대한 왕조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폰투스의 영토는 아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이탈리아 반도보다 작았고, 또한 이미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시칠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던 강대국 로마가 동원한 병력이 5만여인 것을 비교한다면 이토록 로마군을 웃도는 병력을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잡병을 징집해서 죽창 들려 내보내는 거라면 8만이 아니라 80만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당장 북한이 최대 동원 가능한 병력이 900만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렇다면 술라가 폰투스 군을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으로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 설명이 가능하다.

녹색 부분이 폰투스 왕국, 단 미트라다테스는 저 밑의 아나톨리아(이스탄불 동쪽의 터키 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에 넣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대 로마에 비하면 한줌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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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투스 군은 패주한 뒤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철수하였고 북상중인 플라쿠스 군은 이들을 추격키로 결정한다. 그러나 플라쿠스 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는 플라쿠스는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폰투스 군을 맹추격하길 원하였고 그의 부하였던 핌브리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폰투스 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한 뒤 약탈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하는데 핌브리아는 이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은 따르는 병사들과 반란을 일으킨다. 플라쿠스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병사들 모두 핌브리아를 따라 약탈을 하기를 원했으므로 플라쿠스를 배신한다. 플라쿠스는 달아나다 붙잡혔고 핌브리아에 의해 처형된다.

이토록 술라 뒤이어 파견된 로마 정규군은 막장으로 치달았으나 술라는 이들을 내버려 두고 그리스 섬들을 점령하는데 전념한다. 핌브리아의 로마군은 터키지역에서 미트리다테스의 남은 병력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다.

핌브리아 군은 미트리다테스를 추격하여 그를 페르가눔이라는 도시에 몰아놓고 포위한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배를 타고 피타네라는 도시로 달아났고 핌브리아 군은 피타네를 다시 포위하였으나 미트리다테스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음을 안 핌브리아는 술라의 명령으로 해군을 편성했던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한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핌브리아의 요청을 거부하였고 이를 들은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배를 타고 또다시 달아났으며 곧 술라를 만나 강화를 맺는다. 이때 미트리다테스는 70여 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해군을 술라에게 넘기고 3000 탈렌트를 지불하는 것이다인 아주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핌브리아 군은 이러한 강화조약이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계속 터키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하였으며 술라는 따라서 이들과 맞서기 위해 터키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때 핌브리아는 술라와 싸우려 하였으나 핌브리아의 병사들은 핌브리아를 따라 집정관을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핌브리아에게 계속해서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었다. 또한 약탈을 이미 충분히 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술라 밑으로 붙기로 하였고 병사들에게 배신당한 핌브리아는 자결을 한다.

술라는 새로 붙은 병사들의 충성을 높히고 미트리다테스와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존 병사들을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터키 지역의 점령지에서 마음껏 약탈하게 허용한다. 이러면서 여러 신전들과 도시들에게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왔다.

한편 로마의 통치자였던 킨나는 술라와 맞서기 위한 군대를 모와 일리리아로 향해 행군하던 중 병사들에게 살해당한다. 킨나의 군대는 술라와 싸워봐야 전리품을 많이 얻을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싸우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가령 술라군의 경우 반란을 한 나라를 응징하는 것이었으므로 약탈할 기회가 많았다. 약탈은 병사들에게 있어 한 밑천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킨나의 군대는 술라군을 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겨봐야 약탈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병사들은 킨나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았는데 킨나의 상대인 술라는 마리우스 휘하에서 이미 유그르타 생포, 게르만 족 격파, 동맹시 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장 (이 때문에 옵티무스 파로 시민에게 인기없던 그가 집정관에 당선된 것이었다)이었고 미트라다테스 전쟁에서도 연이은 대승 등으로 당대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병사들은 킨나가 술라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전리품도 얻을 가능성도 별로 없는데다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싸워야하니 전쟁을 하러 가는게 상당히 내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킨나는 병사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애를 쓰기보단 오히려 그들에게 눈이 덮힌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병사들은 킨나에게 불만이 쌓은터에 킨나의 수행원이 보초를 서던 병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구타하자 분노하여 킨나와 그의 일행을 모두 살해한다.

2.6 2차 로마 진군

킨나가 죽자 더이상 로마에선 술라와 맞설만한 인물이 없었다. 술라는 따라서 전혀 방해받지 않은 채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로마에 진군한다. 로마에서는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카르보와 26세의 젊은 마리우스의 아들이 저항하나 워낙 술라에 비해 명성이 떨어진 데다 전투 재능에서의 차이도 역력하여 승부가 되지 않았다. 또한 술라가 이길 가능성이 높자 유력 귀족들 거의 전부가 술라 편에 섰으며 편성된 군대까지 속속 술라편으로 돌아서게 되자 술라에 대한 저항은 그냥 발버둥 쳐보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술라가 집권하면 죽을 목숨이 될 것이 뻔한 민중파는 사력을 다해 맞섰고 술라도 꽤 많은 희생끝에 이들의 저항을 분쇄한 뒤 로마를 점령하고 이들 저항한 민중파 멤버들을 살생부에 올려 모두 살해한다.

2.7 독재관

최종 승자가 된 술라는 기원전 81년 57세의 나이로 독재관이 된다. 원래 독재관은 6개월이라는 임기 제한이 있는데 술라는 임기가 아예 없었다. 따라서 종신 독재관이었던 셈. 이는 로마 원로원이 공화정이 생긴 이래 한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준 최초의 사례였고 이는 카이사르가 훗날 흉내내어 제정으로 가는 길을 터놓게 된다.

술라는 독재관이 된 뒤 살생부를 작성한 뒤 1500명의 명단을 공표하였는데 실제로 살해된 인물들은 무려 9천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민중파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는데 당시 300명의 정원인 원로원의 30배에 해당되는 수를 처형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씨도 남기지 않을 정도의 철저한 숙청이었다.

특히 이렇게 처형된 자의 재산은 몰수된 뒤에 술라의 측근들이 나눠가졌고 이때 크라수스와 같은 인물들은 재산을 엄청나게 불린다. 이 때문에 민중파로 조금이라도 알려졌거나 약간의 관련만 있어도 술라파 측에선 처형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었고 때문에 처형된 자들의 수가 과도하게 늘어난 것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민중파 인사들을 처형한 뒤 술라는 로마법 체계를 바꿔 자신이 속한 옵티무스 파의 권력을 강화시킨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수를 300에서 600으로 늘렸으며 또한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호민관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기사 계급과 (귀족이 아닌 자본가 계급) 원로원 의원들이 같이 배석하는 로마의 배심원을 전원 원로원 의원들로 채움으로써 귀족들이 사실상 면책 특권을 갖게금 만들어 놓았다.

또한 한 개인이 돌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술라는 로마의 명예로운 경력에 나이 제한을 둠으로써 한 유능한 개인이 돌출하는 것을 막게끔 하였다. 이렇듯 술라는 독재관을 하면서 철저하게 옵티무스의 권력을 강화하는 식으로 로마법을 고친다.

2.8 은퇴와 죽음

술라는 놀랍게도 종신 독재관을 단 2년만 하고 스스로 그만뒀는데 이는 과두정 옹호파인 옵티무스였던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으로 훌륭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술라의 권력 기반 자체가 옵티무스였고 또한 민중파를 공격한 뒤 학살, 그리고 뒤이어 한 개혁들을 한 명분이 이들이 공화정의 토대를 흔든다는 것이었으므로 술라가 일인 통치 체제인 독재관을 그만두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독재관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사저에 틀어박혀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는데 전념한다. 그는 회고록의 탈고를 무사히 마쳤으나 곧바로 급작스럽게 죽었는데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술라는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에 빠졌으며 이에 따른 급성 간경화 혹은 위출혈로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술라가 죽은 뒤, 그의 처우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한 집정관은 그를 국장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집정관은 장례식을 치를 명예조차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이 알려지자, 격분한 술라의 퇴역병들이 전 로마에서 몰려들었고 국장을 할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자기가 생각한 비문이 새겨졌는데,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3 술라의 개혁의 문제점

술라는 공화정을 강화시키려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로 인한 희생에 비해 개혁의 성과는 상당히 별볼일 없었다.

우선 그가 공화정을 강화시키려고 일방적으로 귀족층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민중파들의 권한을 철저히 축소시켰다. 따라서 민회가 법안을 가결하는 권한을 박탈하고 호민관의 거부권, 그리고 이들 호민관이 명예로운 경력의 다른 공직에 선출되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문제는 공화정이라는 것 자체가 이들 민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정부라는 것이다. 예를들어 아무리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켜놔도 여전히 명예로운 경력의 공직자들은 민중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로마 정부는 민중들의 민심에 기반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에서 민중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완벽한 모순이었다. 따라서 술라의 개혁이 전혀 효과가 있을 턱이 없었고 실제로 술라가 죽고 얼마 안있어 이러한 개혁들은 모두 폐지되고 원상복귀 된다.[4]

또한 술라는 민중파 인사들을 철저히 숙청하나 이것도 쓸데없는 노력이나 다름없다. 그 이유는 이러한 민중파 인사들이 그들의 선조로부터 민중파 하라는 유지를 대대로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이들은 그냥 민중들이 귀족들의 전횡에 맞서 그들의 대표로 내세운 인물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중파 인사들을 철저히 제거해 봤자 민중들은 다른 인물들을 대표로 내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한 다른 민중파 인사들이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 분명하였다. 즉 술라가 9천명이나 제거해서 얻은 것이라곤 그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민중파의 대표들이 나오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은 효과 정도에 불과하였고 따라서 로마 공화정을 강화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짓이었다.

이 때 민중파가 자꾸 위협적으로 성장한 것은 원로원의 전횡이 점차 심각해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로원 귀족들이 자꾸 정책을 그들에게 유리하고 로마 서민들에게는 불리한 것들만 입안을 시켰으므로 로마 민중들은 이러한 전횡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능력있는 정치가들에게 그들의 지지를 집중시킨 것이고 이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와 같은 원로원에 맞서는 강력한 정치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즉 강력한 민중파 인사가 등장하는 것의 근본적 원인은 로마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불만을 키웠던 원로원 의원들 탓이라고 볼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의 전횡에 좀더 자세히 다루자면 당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한 귀족들이 대농장을 경영하였고 그로 인해 로마 중산층은 점차 붕괴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로 인해 빈민층이 넘쳐 결국은 중산층으로 제대로 된 군단병을 구성할 수 없어서 군단병을 빈민층으로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사회가 점점 이 지경이 되었으나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이러한 것을 방관하였고 로마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강력한 호민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분배를 하기 위한 농지법을 추진하자 이들을 '원로원 최종권고'라면서 마구 죽이는 짓을 저지를 뿐이었다. 마리우스가 등장하여 무산자들인 군단병들에게 퇴직금으로 토지를 지급하겠다고 하자 원로원은 절대로 줄 수 없다라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즉 원로원 의원들은 대책없이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전쟁을 통해 획득한 넓은 영토를 자신들이 멋대로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일부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은 유력 정치가들을 죽이면서 맞서온 것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이러한 로마 원로원의 전횡에 맞서 능력있는 정치가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실어준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민중파의 실체였다. 따라서 근본적인 원인인 평민의 희생과 원로원의 로마의 부의 독점이라는 현상을 전혀 해결 안한 채 단지 눈앞에 보이는 민중파 인사를 죽이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를 막는다는 눈가리고 아웅식의 개혁으로 무슨 성과를 낼 수 있겠나?

또한 술라의 개혁 중 아주 심각한 부분은 군단 사령관들이 자신의 병사들을 멋대로 사병화 하는 것을 막을 만한 개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화정 말기에 로마에 자꾸 유혈사태가 일어났는데 이것의 가장 큰 요인은 로마 군단의 사병화였다. 이렇게 사병화가 진행된 이유로는 로마 군단병이 무산자들로 구성되면서 그들의 생계가 달린 봉급과 퇴직금 문제를 전적으로 그들의 군단 사령관에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즉 로마 군단병과 군 사령관의 관계는 용병단과 용병단장 비슷한 관계였다.[5]

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군단병 개인에 대한 봉급과 퇴직금을 명확히 규정하였고 사령관이 아닌 정부가 지급하게 함으로써 사병화되는 길을 막는다. 따라서 제정시대가 돌입되면서 더이상의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 같이 사병화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6] 술라의 개혁에선 이렇게 심각한 문제였던 로마 군단병에 대한 처우 문제가 빠졌고 그로 인해 술라가 물러난 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가 사병화된 군단을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7]

이렇듯 술라는 로마 공화정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긴 하였으나 근본적인 문제엔 전혀 접근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개혁은 사후 얼마 안있다가 모조리 묻혀버리고 만다. 따라서 술라가 남긴 것이라곤 미트리다테스를 진압한 군사적 업적과 로마 군단병으로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훗날 카이사르가 흉내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정도이다. 그의 개혁이 명분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전부 실패했다는 것은 그의 부하이자 위의 내전에서 한몫 단단히 챙겼던 크라수스폼페이우스 조차도 후에 민중파를 자처하면서 진짜 민중파였던 카이사르[8]삼두정치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거기에 공화정을 전복할 큰 요소었던 사병화[9]는 점점 가속화되어 원로원은 술라의 바람과는 달리 그 힘을 점점 잃어갔으며, 결국은 이를 바탕으로 한 프린키파투스[10]가 탄생하게 된다.
  1. 일설에는 주변의 창녀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학문을 이어갔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둘째치고 역시 기생의 도움을 받아 학문을 익혔다는 한신의 일화와 흡사하여 흥미롭다.
  2. 훗날 카이사르와 맞서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
  3. 마리우스는 당시 아무런 직책이 없던 상황이었다.
  4. 이것을 폐지한 정치가들은 다름아닌 술라밑에서 한몫 잡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5. 그리고 사실상 이 사병 문제도 결국은 위의 토지 분배 문제에 수렴된다. 부패한 원로원이 토지 분배를 막은 탓에 먹고 살 수 없게 된 병사들이 자신의 사령관에게 생계를 의지하게 된 것이므로.
  6. 다만 중앙정부의 수장인 황제가 암살당해서 일시적으로 황제자리가 공백상태가 빠지면 각 지역의 군사령관들이 황제지위를 노리고 내전에 빠지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외 수많은 군인황제들이 있다.
  7. 이는 술라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술라는 애초에 섬세한 지도자라기 보단 무골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병사에게 토지를 주기 위해 에투루리아 사람들에게서 영토를 몰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에투루리아는 로마 건국 때부터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로 이 때는 완전한 로마 시민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치하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시민들이며 따라서 이들에게 영토를 몰수한 것은 정치적 파장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었다.
  8. 마리우스의 친척이었으며 이혼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술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수차례 비판하는 등 민중파로써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물론 당시 정치적 명분이 여기에 있기도 했지만 반대파 탄압에 혈안이 되있던 술라와 원로원에 정면으로 맞선 것 자체가 꽤나 대범한 행적이다.
  9.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군대에는 빈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많은 비중을 가지게 되어서 민중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게 된다.
  10. 원수정, 실질적으로는 제정이나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은 어디까지나 특권 있는 로마 1시민인 프린켑스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