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kolaus Harnoncourt (1929.12.6 ~ 2016.3.5)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시대악기, 역사주의 연주를 처음 시작한 사람 중 하나로 클래식 음악 연주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휘자이다.
말레리안이 이 항목을 싫어합니다.[1]
2 생애
1929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곧 오스트리아 그라츠로 가서 거기서 자랐다. 빈 국립음악대학에서 기악 학사 학위를 받았고 첼리스트로 활동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치에게 재산 및 성채가 압류 당했지만 워낙에 금수저라 큰 생계 문제는 없었다. 1952년에는 카라얀이 이끌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들어갔고 1969년까지 활동했다.
아르농쿠르라는 프랑스계 성을 가지고 있는데, 부친은 벨기에쪽 혈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 어머니 쪽으로 구 오스트리아 황실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이어져 있다.[2] 이런 화려한 집안 배경은 아르농쿠르가 보수적인 빈에서 성공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3]
2015년 12월 6일 건강문제로 은퇴선언을 하였다.
2016년 3월 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서쪽에 있는 상트제오르겐 임 아테르가우에서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1 고음악, 원전연주
빈 음악 대학에서는 원전연주 실습이 있었고 그 음악을 들은 그는 고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빈의 악기점에서 비올라 다 감바를 발견해 연주하기 시작했고 1953년 부인인 알리스 아르농쿠르와 함께 최초의 시대악기 연주악단 중 하나인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창단했다.
그는 자신의 악단을 사용해 바흐에서 모차르트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연주했다. 연주하지 않는 시간에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원전연주 보급에 압장섰는데, 때로는 너무 공격적이고 급진적이고, 단편적 사실에 집착한 발언을 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전연주 이외에는 모두 그릇된 방식이라는 비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본인 스스로가 자신이 스스로 했던 말에 위배되는 행동을 많이 했다.
베토벤 교향곡 연주에 있어서 그는 고악기로 연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현대악기를 사용하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에 트럼펫과 팀파니만 원전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했다. 그는 현대 악기로도 고악기의 소리를 내게 연주했다고 항변했는데, 같은 시기에 브뤼헨, 가디너, 노링턴, 호그우드 등 여러 지휘자들이 100% 원전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다는 점에서 아르농쿠르의 절충적인 행동은 정당성을 얻기 힘들고 또 과거 자신이 했던 발언과 위배되는 행동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점점 명성이 쌓이자 본인이 과거에 했던 발언들과는 무색하게 점점 현대 오케스트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80년대에도 빈 필이나 로열 콘세르트 헤보우를 지휘한 적이 있지만 90년대부터는 베를린 필과 빈 필을 비롯하여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RCA에서 다양한 레파토리의 곡들을 녹음했는데, 의외라고도 볼 수 있는 바르톡과 거쉰이 포함되었다. 거쉰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경우는 기존의 미국 음악을 강조하던 해석에서 좀 더 보편성을 추구했다는 평가인데, 그 호불호는 갈리는 편이다.사실 이전에 베르디의 아이다, 레퀴엠 등을 녹음했을 때에도 썩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2010년을 전후하여 자신의 지휘 인생을 결산하는 의미인지, DHM에서 주요 종교곡들을 녹음하였다. 특히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와 녹음한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들이 호평을 받고 있다.
2015년에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슈베르트 교향곡 전곡 음반이 베를린 필 자체 레이블에서 발매되었고, 2015년 하반기부터 빈에서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실황으로 녹음 중이었으나, 은퇴를 선언하게 되면서 4, 5번 교향곡만 출반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이 호전되었는지 일부 공연은 본인이 지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결국 3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 ↑ 아르농쿠르는 대놓고 '말러의 곡들은 다른 곡들과는 달리 지극히 사적인 고민을 쓴 곡들이라 연주하기 싫다'는 투로 얘기한 적이 있다.
- ↑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의 13번째 아들 요한 대공의 외아들 메란 백작 프란츠의 아들인 메란 백작 요한 슈테판이 외할아버지이다. 즉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레오폴트 2세의 외고손자가 된다. (참고로 요한 대공이 평민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 아들인 프란츠는 귀천상혼에 의해 대공이 되지 못하고 백작으로 격하되었다.)
- ↑ 비슷한 예로 아르농쿠르처럼 모친의 집안이 오스트리아 황실 가문이었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도 지휘 실력과 상관없이 집안 배경의 후광으로 빈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사랑을 누렸다. 덕분에 크라우스는 평범한 지휘 실력에도 불구하고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당시 재정난을 겪고 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크라우스의 음악성에 한계를 느낀 빈 필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했지만, 크라우스는 이에 반발했고, 결국 빈 필 단원들은 아예 상임지휘자직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빈 필의 상임지휘자직 폐지는 크라우스를 끌어내리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지만 세계경제공황과 2차 세계대전 등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연이어 겪으면서 상임지휘자직의 공석이 장기화되었고, 결국 전통으로 고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