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봉쇄령

(대륙봉쇄령에서 넘어옴)

Europe_map_Napoleon_Blocus.png
연한 파랑색과 진한 파랑색은 당시 프랑스와 그 연합국이다. 회색은 영국과 그 연합국혹은 중립국.

Continental System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으로 내린 '대 영국 무역금지법'. 오늘날의 경제제재의 효시격인 정책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작이다.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사건. 1811년 4월 11일로 해제되었다.

1 배경

유럽 대륙의 정리를 끝낸 나폴레옹 1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저항하는 영국을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더구나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군사력 뿐 아니라 경제력으로도 유럽에서의 독점적 우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었다. 그러던 중 1806년 5월 16일, 영국은 프랑스와 나폴레옹 연합국 해안을 해군력으로 봉쇄한다. 당시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국은 재력이나 산업기초가 튼튼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폴레옹 1세는 영국 해군의 눈을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동원하여 유인한뒤 육군을 상륙시켜 영국을 정복하려 했으나 해군 전력이 너무 차이 나기 때문에 실패. 포기해야 했으며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인해 해군 함대가 일방적으로 전멸당했다. 이에 나폴레옹 1세는 해군력을 복구하려 노력함과 동시에 영국을 흔들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의 경제력에 타격을 주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이에 영국과 유럽대륙과의 무역을 중지시켜 영국의 경제를 인플레와 부채로 몰락시키는 기획을 세운다

2 계획과 실행

1806년 11월,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나폴레옹 1세는 베를린 칙령을 내려 유럽 대륙 전 국가들로 하여금 영국과의 무역을 전면금지시킨다. 이에 대해 영국은 '긴급명령 1807년'을 1807년 11월 11일에 발표, 프랑스와 연합국의 무역을 전면금지 시킴과 동시에 자국의 해군으로 하여금 프랑스와 연합국의 해안을 역봉쇄시키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 1세는 '밀라노 칙령 1807년'을 발표, 영국의 항구를 이용하거나 영국에 관세를 내는 중립국 상선은 영국적 상선으로 간주, 포획할 것이라고 맞받아친다.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볼 때, 섬나라인 영국을 유지하는 것은 교역이라는 것을 간파.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경제파탄이 일어나 쉽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모든 유럽 상선들은 프랑스 항에 1차적으로 정박, 영국과의 교역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받은 뒤 출항하게 했으며, 전 유럽국가들 및 프랑스 연합국에 대해 대 영국 교역을 전면금지 시켰고 특히 영국과의 교역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러시아도 금지를 강요당했고 어길 경우, 침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문제는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본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있었다는 것. 섬나라인 영국을 유지하는 것은 교역이고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면 경제파탄이 일어나리라는 것 까진 분명 정답이었으나, 자국의 해군력이 영국 반토막 이하라는 점을 간과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는 근대 유럽 시대였고 영국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딱히 나폴레옹에게 손 안 벌려도 당장 식민지 무역을 통해 급한 불 끄는 정도는 가능했으며 분명 대륙 봉쇄령의 영향으로 영국 경제가 잠깐 휘청이긴 했으나 이내 식민지 무역을 통해 어떻게든 휘청이지 않게 균형을 잡는 데는 성공했다.

3 결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해군력에서 영국에게 상대가 되질 못했던 프랑스는 오히려 영국에게 해상 봉쇄를 당한 꼴이었다. 셀프 봉쇄

당장 반나폴레옹 정책을 유지한 스웨덴은 거부했으나 러시아 제국을 이용 스웨덴을 굴복시켜 강제로 참여시켰다. 그럼에도 반대론은 끊이지 않았으며 아울러 포르투갈이 참가를 거부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에 파병을 결정했지만 그 결과로 스페인 전쟁에 개입하게 되어 이베리아 반도전쟁에 휘말려드는 생고생을 하는 비극을 겪었다. 특히 러시아는 영국과의 교역이 국가 경제의 상당수를 차지했는데다가 봉쇄령이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1810년 봉쇄령 협력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교역을 개시하자 노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강행했지만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과 혹독한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대패를 당해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게 된다.

4 평가

당장 나폴레옹은 유럽에서의 완벽한 패권을 이루기를 갈망했고 그 장애물이 바로 영국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은 이미 이때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이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대륙과 상당한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욕망으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지고 아울러 주요 식품 가격의 상승같은 부작용을 낳게된데다. 유럽 전역을 쥐락펴락 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욕에 진저리가 난 유럽국가들이 그의 대한 반감을 일으키는 역효과를 낳았고. 더구나 당시의 유럽 여러 국가들은 영국과의 교역이 없이는 생활이 어려워질 정도까지 되었다는 점을 나폴레옹은 간과했다. 정작 영국은 다른 대륙의 식민지에서 급한대로 물자를 얻을 여력이 있었고 오히려 아쉬운 쪽은 유럽이었던 것.

한마디로 의도는 좋았다라는 것.

5 기타

브라질이 커피 생산지가 된 계기가 되었다. 원래는 사탕수수가 주력 상품이었는데, 대륙봉쇄 때문에 수입을 할 수 없게 된 유럽에서 사탕수수를 쓰지 않고 사탕무에서 설탕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사탕수수 수출이 어려워지자 대신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