竇建德
(573~ 621)
중국 수나라 말기의 군웅.
수말당초 시대의 원소 격인 인물.
원래는 허베이성 출신으로, 마을 이장 수준의 인물이었으나, 수양제 대업 7년(611년)에 군에 들어가 출세하였다. 때는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였으며, 이에 고사달의 휘하로 들어가 장수가 되었다. 수양제가 죽자, 하간에서 왕종이 항복하였다.
617년, 고사달이 죽자 낙수에서 스스로를 장락왕(長樂王)이라고 칭했다. 10만 대군으로 설세웅을 격파하면서 하북을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일단 이밀의 수하를 자처했으며, 수양제를 죽인 우문화급이 소황후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자, 요성의 우문화급을 격파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목을 베었다.[1]
618년, 국호를 하나라(夏)로 정하고 연호를 오봉(五鳳)으로 정하며, 다음해 수도를 낙주로 옮겼다. 의외로 정치도 잘해서, 도적이 없이 백성들이 평안했다고 한다. 이런 군웅이 흔한 것은 아닌데 621년 3월, 당나라에서 정나라 황제를 칭하는 왕세충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순망치한의 논리로 그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호로관에서 막혀 발을 구르다가 이세민의 기습에 참패하였고, 5월 장안으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책사 능경(凌敬)과 부인 조씨(曹氏)가 지지한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원한다는 기습전략)를 무시하여, 산서를 치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의 패인이 되었다. 호뢰의 전투에서 3천명이 죽고, 5만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크게 슬퍼하였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받은 명군웅이었다. 좌복야 제선행과 조씨가 수백기를 수습해서 수도 낙주(하북성 한단)로 도망갔으나, 대세가 기울었다며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항복했다고 한다.
일찌기 당나라의 회안왕 이신통, 동안공주, 이세적 등을 붙잡았으나 후대하여 돌려보냈으나, 이세민의 행동은 그야말로 잔인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두려워할만한 군웅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이세민은 관료출신의 왕세충은 후대하였으나[2], 이장 출신의 두건덕과 그 휘하는 박대하였으므로, 휘하의 장수 유흑달이 623년까지 당나라에 계속 저항하였다.
한줄로 요약하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의협과 이의의 군웅. 중국에서 승자에게 괴멸당한 군웅 가운데 이런 호평을 듣는 군웅은 흔치 않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