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시절)
(2012년의 모습)
이름 | 드라간 자이치 (Dragan Džajić)[1] |
생년월일 | 1946년 5월 30일 |
국적 | 세르비아 |
출신지 | 우브 |
포지션 | 윙어 |
신체조건 | 174cm |
선수 경력 |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63-1975) SC 바스티아(1975-1977)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77-1978) |
국가대표 | 85경기, 23골 |
1968 Ballond'or | ||
수상 조지 베스트 | 2위 보비 찰턴 | 3위 드라간 자이치 |
"자이치는 발칸 반도가 낳은 기적입니다. 진정한 마법사죠. 그가 브라질리안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는 제가 이제껏 보아온 선수 중 가장 자연스럽게 축구하는 사나이에요."ㅡ 펠레
"1968년 발롱도르는 누가 뭐래도 드라간 자이치의 것이었습니다.조지에게는 미안하지만, 1968년은 자이치의 해였어요. 그는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줬죠."ㅡ 베켄바우어
"매직 드라간이 나타났다!"ㅡ 잉글랜드 언론(1968년 유럽 선수권 대회 4강전에서 드라간 자이치에게 실점하며 탈락한 직후. 당시 잉글랜드의 골키퍼는 역대 최고의 골키퍼중 한명이자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고든 뱅크스
1 설명
발칸 반도의 마법사
세르비아 역대 최고의 선수. 범위를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아니 발칸 반도 전체로 확장해도 역대 최고라는 평을 들을 수 있는 선수. 주 포지션은 왼쪽 윙어로, 역대 최고급의 크로스를 포함해 빠른 속도, 드리블, 프리킥, 테크닉, 패싱 센스 등 축구사에서도 정상급의 윙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득점력 역시 준수한 편으로, 2경기 당 1골을 넣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주로 활동한 무대가 변방인지라 저평가 당하는 선수 중 하나이다.
2 클럽
1963년 자신의 17번째 생일이 지난이 일주일이 조금 넘어서 데뷔했다. 자이치의 본래 포지션은 레프트백이었으나 윙어로 포지션을 바꾸었고 죄측면에서 양질의 크로스를 올림과 동시에 득점까지 책임지는 선수가 되었다. 그는 2시즌을 제외하고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만 현역 생활을 했고 5회의 리그 우승과 4회의 컵 대회 우승 등을 들어올렸다. 츠르베나에서 자이치는 615경기 370골을 기록했다. 이는 득점과 출장 횟수 구단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이 업적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경신하지 못하고 있다.
1975년 부터 1977년까지 프랑스의 SC 바스티아에서 활약한 것이 유일한 해외 경험인데, 그 이유인 즉슨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권 국가였고 선수들의 해외 이적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3 국가대표
1964년부터 1978년까지 85경기 23골을 기록했다. 월드컵보다는 유로 대회에서 강력한 임팩트를 남겼다. 메이저 대회로는 유로 1968, 74년 월드컵, 유로 1976에 참가했다.
유로 1968에서 자이치는 2골(...)로 득점왕에 올랐다.[2] 첫 경기에서는 월드컵 우승팀인 잉글랜드를 상대로 경기 막판 결승골을 득점했고 결승전인 이탈리아를 상대로는 선취골을 득점했다. 그러나 도멘기니가 동점골을 넣어버리면서 이틀 뒤 재경기를 치루게 되었고 리바와 아나스타시의 연속골로 패배했다. 자이치는 이 대회에서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자이치는 1968년 발롱도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4년 월드컵에도 참가했는데, 자이르를 상대로 9-0이라는 기록적인 승리를 거둘 때 프리킥으로 팀의 2번째 골을 득점했다. 1차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한 유고슬라비아는 2차 조별리그에서 서독, 스웨덴, 폴란드와 한 조가 되었는데, 3전 3패로 탈락했다.
자국에서 열린 유로 1976에서는 서독과의 경기에서도 패배하고 3,4위 결정전인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도 패했으나, 자이치는 2경기 모두 득점을 올렸고,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