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뱅크스


gordonbanks2.jpg

gordon-banks-01.jpg
영광스러운 선수 시절

pg-66-banks-getty.jpg
노년기 모습. 오른쪽 눈이 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름고든 뱅크스(Gorden Banks)
생년월일1937년 12월 30일
국적잉글랜드(England)
출신지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주 셰필드
(Sheffield, South Yorkshire county, England)
포지션골키퍼
신체 조건185cm
소속 팀체스터필드 FC(1958~1959)
레스터 시티 FC(1959~1967)
스토크 시티 FC(1967~1972)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1972)
클리블랜드 스토커즈(1977~1978)
헬레닉 FC(1971)
세인트 패트릭스 애슬레틱 FC(1977)
국가 대표73경기

1 개요

1999년 월드 사커 매거진 선정 20세기의 위대한 축구 선수 32위, 위대한 골키퍼 2위[1]
1972년 FWA 올해의 축구 선수

잉글랜드 축구 역대 최고의 골키퍼라 추앙받는 골키퍼이지만, 전성기를 맞고 있을 당시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눈을 잃어버린 비운의 선수이다. 많은 팬들이 그가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잃지 않았더라면 A매치 100경기 이상은 가뿐히 기록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한다.

뱅크스는 석탄 광부 또는 벽돌공 등으로 일했는데, 어느 아마추어 경기에서 결원을 메우기 위해 대신 뛰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지역 팀에서 뛰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체스터필드에서 파트 타임 프로 선수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1년 후 그의 팀은 FA 유스 컵 결승에 올랐는데 보비 찰턴이 군림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팀에게 4-3으로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뱅크스는 3부 리그의 체스터필드와 전속 프로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불과 23경기만에 레스터 시티가 이적료 7000파운드를 지불하고 그를 데려갔다. 입단 첫 시즌 만에 주전으로 자리를 굳힌 뱅크스는[2] 1960-61 시즌에 레스터 시티를 FA 컵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리그 챔피언이었던 토트넘 핫스퍼에게 패배하면서 더블 우승을 헌납하고 말았다.

뱅크스는 알프 램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63년 4월 6일 스코틀랜드전에서 국가 대표 데뷔를 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는 또 다시 FA 컵 결승에 올랐으나, 이번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3-1로 패하고 말았다.

1964년이 돼서야 비로소 뱅크스는 리그 컵에서 스토크 시티를 꺾으며 첫 우승을 안았다. 1965년에는 첼시에게 패했으며, 또 하나의 레전드 골키퍼인 피터 실턴이 빛을 보기 시작한다. 피터 실턴이 뱅크스가 발견한 선수란 걸 보면 참 아이러니.

뱅크스는 레스터 시티에서 293경기를 뛰었고, 리버풀이 그를 영입하고자 했으나 놀랍게도 스토크 시티가 52000파운드로 뱅크스를 영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뱅크스는 전설이 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했지만 1972년 10월 22일, 어깨 부상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운전하던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3] 이렇게 모두가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축구 인생이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축구를 하게 된다. 팬들은 이런 그에게 많은 찬사를 보냈으며 1977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한쪽 눈은 잃어도 축구만은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눈을 하나 잃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예전과 같은 기량은 보여주지 못했다. 근데 그런 상태에서도 최우수 골키퍼를 수상했으니,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을 이끈 골키퍼이기도 하며, 레스터 시티와 스토크 시티에서 많은 트로피를 들어 두 팀에서 전설로 추앙받는다. 특히 스토크 시티는 그가 맹활약했던 1972년 이후로 메이저 트로피가 없기 때문에 뱅크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고든 뱅크스가 뛴 A매치 73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단 9패밖에 하지 않았고, 경기당 실점율이 겨우 0.78이었다. 펠레도 뱅크스와 맞대결한 뒤 '인간의 플레이가 아니다'라고 그를 치켜세웠고, 자신이 선정한 위대한 선수들 100인 안에 넣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기 때문에 고든 뱅크스가 월드컵 무대에서 활약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고, 잉글랜드 최고의 캡틴 보비 무어가 부진했던 74년, 78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다.

위의 서술로는 그가 어떤 선수인지 감이 안 올지도 모르지만, 고든 뱅크스의 전성기 적 모습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라는 칭호도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특히 아래 서술 할 1970 멕시코 월드컵은 그야말로 레전설.

2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1970 멕시코 월드컵

article-0-190A0678000005DC-476_964x664.jpg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세이브
잉글랜드의 우승과 선전을 이끈 방패이자 수호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비록 개최국인 잉글랜드의 편파 판정 수혜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 월드컵이긴 하지만,[4] 어쨌든 잉글랜드가 결승까지 올라가 서독을 4:2로 격파하면서 고든 뱅크스는 월드컵 우승을 달성한 골키퍼가 되었다.

특히나 월드컵이 시작된 후, 준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의 슈퍼 스타 에우제비우에게 실점하기 전까지 443분 동안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443분 무실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왈테르 젱가(517분)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무려 24년 동안 지속됐다.


1966년 월드컵에서도 역시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그의 최고의 활약을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라고 본다. 특히나 조별 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누가 봐도 구석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골이 될 만한 펠레의 헤더를 세이브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아쉽게도 0:1로 잉글랜드가 지고 말았으나,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펠레와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 제르손이 군림한 세계 최고의 팀이었고 축구 역사상 최강팀을 뽑을 때 1위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팀이다. 본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만나는 팀마다 3:0, 4:0 정도로 승리를 거뒀으며 예선 전승과 본선 전승 우승이라는 정신 나간 기록을 세웠다.

잉글랜드는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면서 1966년 월드컵과 달리 별다른 논란 없이 좋은 성적을 확보했지만, 식중독에 의하여 고든 뱅크스가 결장하게 되면서 서독에게 3:2로 패하여 탈락하게 된다.

3 축구 황제 펠레와의 관계

article-1227864-00B2BDDE1000044C-239_468x350.jpg
펠레와 고든 뱅크스의 어깨동무. 정겨워 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의 세이브.

펠레(자신의 헤더를 막은 고든 뱅크스에 대한 칭찬)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 순간에 대해 물어온다. 월드컵을 대표하는 장면이라며! 물론 과정이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사실을 잘 안다. 자이르지뉴의 굉장한 드리블과 크로스, 이어진 헤딩이 멋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 선수 생활을 통틀어 그렇게 잘 맞은 헤딩도 없었다. 나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ㅡ 펠레
잉글랜드의 골 문은 은행 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ㅡ 펠레(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후 고든 뱅크스에 대한 평가)
펠레는 공보다 높이 점프하여 구석을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것은 완벽한 헤딩이었다. 나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날렸으며 공이 골라인 바로 앞에서 땅에 닿은 후 튕겨 올라가는 순간 오른손으로 공을 살짝 건드렸다.

ㅡ 고든 뱅크스(자신의 자서전에 서술)

4 여담

  • 1937년 셰필드에서 태어난 뱅크스는 어려서부터 골키퍼에 매력을 느끼고 학교에서 골키퍼로 뛰었지만 당시엔 축구를 직업으로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 그가 사고로 눈을 잃어버리자 한 열혈 팬이 뱅크스에게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지만 뱅크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선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눈을 잃고 한 동안 스토크 시티와 포트 베일에서 스카우트와 코치로 일하다가 5년 뒤 북미 축구 리그의 포트 러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서 선수로 뛰게 된다. 위에 서술했듯이 그는 시력 장애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한다.
  • 2001년에는 자신의 월드컵 메달을 경매에 붙여 124,750파운드에 팔기도 했다. 이유는 자식들이 그의 사망 후에 메달을 놓고 고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대표팀에서 쌓은 입지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레스터 시티 시절에는 피터 쉴튼[5]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뱅크스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음에도 실턴은 주전 자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프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1967년 레스터 시티는 뱅크스를 스토크 시티로 이적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뱅크스가 리차드 3세 초등학교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다가 당시 13세였던 피터 실턴을 보고 구단의 코치인 조지 데위스에게 '저 아이는 정말 잘하는군.'이라고 말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피터 실턴을 직접 본 데위스는 "저 아이가 곧 너를 1군에서 밀어내겠는 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3년 후 실턴은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주전 자리에 오르며 불과 몇 개월 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고든 뱅크스를 이적하게 만들었다. 흠좀무.
  • 덴마크와 맨유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피터 슈마이켈의 우상이라고 한다. 피터 슈마이켈은 뱅크스의 칭찬을 듣고 그저 예의바른 칭찬일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것만 해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환상적이라고 표현했다.
  • 같은 팀이었던 스탠리 매튜스에게 잉글랜드 축구가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극찬을 했다. 같은 팀이어서 살짝 과장된 칭찬을 했을 수 있지만 그만큼 스탠리 매튜스가 잘하긴 했다.
  • 뱅크스는 에버튼 FC의 레전드인 앨런 볼이 "우리가 아무리 슛을 날려도 그는 모두 막아내곤 했다. 결국 우리는 그에게 이러다가는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잃을 것 같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앞에 선 자는 아무리 좋은 슈팅을 갖고 있다 해도 결코 '득점'에 도달할 일은 없다!
  • 2002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다.
  • 2010년 1월 영국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잉글랜드 대표팀의 골키퍼들은 기복이 너무 심하다."라며 대표팀에 마땅한 주전 골키퍼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뱅크스는 이렇게 된 원인을 자국 프로 리그에서 찾았다. "프리미어 리그는 전부 외국인 골키퍼들이 장악했다. 감독이 뽑을 선수가 없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6] 지금의 상황에 대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결론을 짓기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까지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골키퍼가 선택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 2010년 월드컵의 골키퍼 기용에 대해 "경험이 없는 조 하트보다 폴 로빈슨을 기용하는게 나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조 하트 또한 "뱅크스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전설적인 선수이다. 나에게도 영웅인 선수이다"라며 큰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이어 "비록 그를 존경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의견을 마음 속에 담고 있지 않는다. 월드컵 대표팀에 소집되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의미를 준다. 이제 나가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라며 자신이 월드컵 대표팀에 속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 2013-2014 시즌, FC 바르셀로나 소속 선수였던 빅토르 발데스레알 베티스전에서 나온 세이브가 고든 뱅크스의 펠레의 헤딩 슛을 막은 것과 비교되자 “매우 기쁘다. 그러나 고든 뱅크스의 선방이 더 의미 깊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비교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란 의견을 밝혔다.
  1. 1위는 바로 그 레프 야신. 대체로 올타임 넘버원으로 야신을 꼽지만, 아주 가끔씩 영국 버프로 1위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2. 골키퍼가 첫 시즌에 주전으로 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3. 얼굴을 200바늘, 안와는 미세하게 100바늘을 꿰매야 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4.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논란이 많은 월드컵이었다.
  5. 실턴 또한 잉글랜드의 레전드 골리 중 하나이다.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 경기를 소화한 선수인데(1374경기), 보통 축구 팬들에게는 86년 월드컵 8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농락당한(...) 골키퍼라고 하면 알 것이다.
  6. 2015년인 현재도 EPL은 자국인 슈퍼 스타 플레이어보다 외국인 슈퍼 스타 플레이어가 많다는 평가가 우세하다는 것을 본다면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