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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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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abb Affair.
1956년 4월 20일, 영국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 사건이다.
2 크랩의 실종
라이오넬 크랩(Lionel Kenneth Philip Crabb)은[1] 영국의 퇴역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때 영국 해군의 폭탄 및 기뢰제거와 파괴공작을 담당한 스킨 다이버 전문가였다. 스킨 다이버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정평이 나있던 크랩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이탈리아군이 뿌린 기뢰를 제거했고 지중해에서는 적선에 대한 파괴공작에 일조해서 그 공로로 조지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군인들이 퇴역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현상을 보이는 것처럼, 크랩 역시 1953년 중령으로 퇴역한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군 시절을 그리워 한 나머지 술에 쩔어 살게 되었고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면서 비밀임무에 대한 사항까지 떠벌리고 다녔다고 한다. 한편으로 상당히 괴인이었다고 하는데 매일 잠수복을 일상복처럼 입고 다니고 잘 때도 잠수복을 입고 잤다고 한다.
그런 크랩에게 1956년,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1956년 4월 18일에 소련의 순양함 오르조니키지호가 두척의 구축함과 함께 영국의 포츠머스항에 입항했다. 오르조니키지호에는 정상회담을 위해 영국을 방문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타고 있었다. 흐루쇼프의 방문은 동서 냉전의 해빙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벤트라서 영국 수상 앤서니 이든은 SIS에 소련에서 손님이 왔으니 니들 맘대로 스파이짓 하면 죽는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보기관이 하지 말란다고 스파이 활동을 안할 리가 없었다.
SIS는 수상의 경고를 교묘하게 피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퇴역한 해군 중령 라이오넬 크랩이었다. 크랩은 정식 SIS 요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령 실패하더라도 SIS는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다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현역 해군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것도 실패하면 SIS의 책임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민간인 신분인 크랩에게 맡겼던 것이라 볼수 있다. 크랩의 입장에서도 현역 시절이 떠오르는 임무인데다가 돈도 궁했기 때문에 SIS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SIS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크랩을 접촉해 제안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크랩은 오르조니키지호가 입항하기 하루 전날인 4월 17일, 포츠머스의 섈리포트라는 호텔에 SIS소속 비밀요원인 버나드 시드니 스미스와 함께 투숙했다.
오르조니키지호가 포츠머스에 입항한후 흐루쇼프는 런던으로 향했고 그 사이에 크랩은 오르조니키지호 근처에서 시험 잠수를 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9일, 크랩은 잠수를 시도했으나 호흡 장치의 이상으로 금새 물위로 떠올랐다. 이후 산소통의 탄산 가스를 제거하고 크랩은 다시 잠수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대로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4월 29일 오르조니키지호를 타고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인 4월 30일, 영국 해군성은 라이오넬 크랩 퇴역 해군중령이 잠수기구를 시험하던 중에 사고로 사망한 것 같다.라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이 소식에 영국은 발칵 뒤집혔고 의회에서는 사건의 경위를 추궁하는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으나 영국 정부는 크랩이 정부의 허가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다가 사고로 죽었고, 그 이상 밝히면 국익에 위배된다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사건을 덮으려 애썼다.
3 크랩은 어떻게 되었나?
결국 영국 정부의 모르쇠로 사건의 진상은 더이상 밝혀지지 않고 묻혀버렸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과 소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크랩 실종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려고 SIS 비밀요원 스미스를 쫓아다니자 스미스는 잠적해버렸다.
그런데 크랩이 실종되고난 뒤 1년이 지난 1957년 6월 9일, 포츠머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치체스터의 어부들이 잠수복을 입은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머리와 손이 잘려져 없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잠수복을 입은 시체인지라 사람들은 이 시체가 크랩의 시체인지 주목했다. 치체스터 검시관은 크랩의 친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체를 조사했는데 시체는 머리와 손이 없어서 신원을 파악할 결정적 증거는 없었지만 다리 한쪽의 상처 위치, 굽은 기형의 발가락, 시체에 입혀진 이탈리아제 잠수복등이 크랩의 정황과 일치한다는 판단에 따라 검시관은 이 시체가 크랩의 시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두개골과 치아,지문 등이 없는터라 정말 이 시체가 크랩의 시체인지를 두고 사람들은 설왕설래했다.
사람들은 이 시체가 크랩의 것이라면 사고로 죽었다는 크랩이 왜 머리와 손이 잘려져 없어진 채로 발견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크랩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 소련쪽에서 나온 것이라는 소문들도 나돌았다. 소문 중의 하나는 크랩이 오르조니키지호 근처를 정탐하다가 오르조니키지호에 탑재된 특수 방어장치에 걸려든 나머지 익사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 다른 소문에는 반소련 세력들이 오르조니키지호 밑에 수중폭탄을 장착해두었는데 이를 발견한 크랩이 이것을 제거하려다 폭사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시체에 머리와 손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치체스터에서 발견된 시체는 크랩의 시체가 아니며, 크랩은 오르조니키지호 근처에서 소련군에게 붙들려서 소련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근거가 된 것은 한 소련의 군사잡지에 실린 소련 해군장교들의 사진들 때문이었다. 그 사진들중 하나인 수중작전교관 르보프 르포비치 코라블로프 중위가 소련으로 끌려간 크랩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크랩의 전 부인과 친구 한 명이 이 사진을 보고 그가 크랩이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진이 희미해서 명확하지가 않다는게 문제였다. 또한 크랩이 소련에 끌려가서 소련 군인이 되었다면 소련이 왜 그를 선전도구로 안 쓰는지도 의아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치체스터에서 발견된 시체가 크랩이 맞지만, 크랩을 죽인 자들은 소련군이 아니라 SIS나 영국의 국내보안을 책임지던 MI-5의 소행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주장에 의하면 SIS가 퇴역 해군을 이용해서 스파이 행위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다가 앤서니 이든 수상이 이를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작전을 포기하고 크랩을 살해한 뒤 머리와 손을 잘라 바다에 내던졌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상이 이 작전의 정보를 알게 되었고, 소련에게 약점을 잡힐까봐 우려한 나머지 MI-5에 지시하여 작전을 마치고 물에서 나오던 크랩을 납치해서 그대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주장이 나와서 설왕설래하던중, 2007년 영국의 데일리 미러지는 이 사건의 실상에 대해 충격적인 주장을 보도했다. 데일리 미러에 의하면 당시 오르조니키지호에 타고 있던 소련 군인의 증언이라면서 크랩이 오르조니키지호를 정탐하다가 붙잡혔고 소련군들이 크랩을 죽인 뒤에 머리와 손을 잘라 바다에 내다버렸다고 한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사건의 실상에 가장 부합하는 설명이라 볼수 있다. 다만 증언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치체스터에 떠내려온 시체는 크랩이 맞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게 지배적인 견해다. 다만 아직도 소련에 끌려갔을 것이라는 설도 나돌고 있기는 하다.
2012년 6월 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 일명 "버스터 크랩(Buster Crabb)"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