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 흐루쇼프

역대 소련 최고권력자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
레닌스탈린말렌코프흐루쇼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역대 소련 서기장
1대2대3대4대5대6대
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 ,스탈린의 후임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서기장의 위치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쇼프가 서기장 직위를 맡은 뒤 제1서기라는 직위로 개명했다,
< 195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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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충격이 그만큼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6 - 헝가리의 자유 투사니키타 흐루쇼프1958 - 샤를 드 골

파일:Attachment/니키타 흐루쇼프/Хрущёв.jpg

1894년 4월 17일 ~ 1971년 9월 11일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1 이름의 번역에 관해

영어권에서 이름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크루시체프로 널리 알려졌으며[1] 러시아 전문가가 거의 없던 대한민국에서는 냉전 시절에 일본어 표기(フルシチョフ)의 영향인지 흐루시초프라고 불렸다. 때문에 후에 영어로 된 책이 번역될 때, 이 사람과 별개의 인물인 양 크루체프라는 이름으로 오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러시아어 원어 발음은 흐루쇼프([xrʊˈɕɕof])에 가깝다. 러시아어의 щ는 로마자로 옮기면 shch지만 발음은 '슈치([ʃtʃ])' 발음이 아닌 '시시([ɕɕ])' 정도의 발음이며 외래어 표기법 상으로는 '시'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후술하지만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 태생이 아니고 러시아 태생이다. 만약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면 (ё가 우크라이나어에 없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흐루시쵸프로 쓰는게 맞을 것이다.

2 생애

2.1 초기이력

2.1.1 젊은 시절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이 강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오랜기간 살았기에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겨질수있겠지만 사실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러시아인이며 어린시절도 러시아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1908년에 우크라이나로 이사왔고 이후로 우크라이나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공산당에 입당하여 기반을 닦게 된다. 어쨌든 우크라이나에서 정치를 시작한 인물이고 실제 정치적 행보도 우크라이나인 소리가 위화감 없을 정도로 우크라이나 친화적이었다보니 우크라이나에서는 실제 우크라이나 출신인 후임 서기장보다도 평가가 좋은 편.

여담으로 문맹이었다고 한다. 사실 학교에 안 다녔던건 아니였는데 가정형편때문에 학교에 잘 다니지 못하다보니까 문맹이나 다름없던 상태가 되었던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글을 완전히 깨우치게 되었는데 이때가 20대 후반이었다고 한다. 인간승리! 그러나 대단한 지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정적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겉보기랑 다르다 그럼에도 결국 반문맹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자신이 직접 글을 쓸 수준까진 도달하지 못하였고 기껏 자신의 이름자 정도만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인이 그렇게 공을 들였던 회고록도 제 손으로 직접 작성하지 못하고 구술 형태로 남길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이것.

광산 기술자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이 면제되었다. 1차 세계대전중에 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 공산주의자로써의 활동을 하여 10월 혁명 후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에 들어가 백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당에 들어가 광산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주목받는 리더쉽을 발휘했다.

출신 성분과 능력 모두 우수했기 때문에 공산당에서 젊었을 적부터 장래가 촉망받던 인재였으며, 우크라이나모스크바의 공산당 고위간부로 일했으며, 그의 상관인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눈에 들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승승장구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건설 쪽에 관심을 가졌는지 스탈린 공업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하게 되고, 이때 이오시프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2]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애칭 나디아)와 같이 공부를 하게 되어 스탈린의 귀에 그의 존재가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를 감독하게 되면서 레닌 훈장을 받은 뒤, 스탈린의 집무실과 별장 등으로 개인적으로 호출을 받으며 친분을 쌓게 된다.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 동안 흐루쇼프와 일하던 동료 대부분이 숙청을 당하는데, 그 와중에 그는 대숙청에 일조하기도 했고[3], 이 와중에 그 자신 또한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능숙하게 처신하고 스탈린과 직접 대면하여 살아남게 된다. 나중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수장으로 임명된 그는 거기서도 숙청을 담당하게 되는데, 거의 모든 정부요직과 군 간부들을 숙청하고 거의 예외없이 사형시켰다고 한다. 당시 흐루쇼프가 자신이 숙청한 인물들 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던 것은 확실하고, 1939년에는 "인민의 적들을 찾아내 제거해야 하지만, 무고한 한 명의 인민이라도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1.2 제2차 세계대전

흐루쇼프는 소련군폴란드 침공 당시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에 진주하는 소련군을 따라가면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참고로 소련 붕괴 후 기밀해제된 카틴 학살 관련 서류에는 흐루쇼프의 사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실상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숙청을 관리 및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그는 키예프에 있었는데, 키예프 방어를 위해 군과 협력하였으나 키예프의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고, 1942년 초에 하르코프 방면에서 스탈린의 무모한 공격명령을 수행하던 도중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고 그가 정치장교로 있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26만 7천 명이 전사하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를 겪는다(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그로 인해 숙청당할 위기에 몰렸으나,[4] 스탈린은 그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보내 종군하게 한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등장하는 대머리 정치위원이 바로 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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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절로 추정되는 흐루쇼프의 사진.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승리를 거뒀으나, 그 직후 5월에 개인적으로 큰 사건을 겪게 되는데, 공군 전투기 조종사이던 그의 아들 레오니트 흐루쇼프가 적기에 격추당한 뒤 실종당한 것이다. 레오니트 흐루쇼프는 꽤나 망나니여서 술에 취하면 빌헬름 텔 흉내를 내서 부하 머리에 맥주병을 올려놓고 사격술을 시험하곤 했는데, 그가 명사수가 아닌지라 사람이 죽었고 결과적으로 최전선으로 좌천된 것이었다.[5]

아들의 비행기와 유해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음모론이 생겨났으며,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서 흐루쇼프는 며느리를 굴라그에 보내버리게 된다. 며느리는 5년 뒤 석방되었지만 스탈린 사후까지 자식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하지도 않았고 커서도 자신들의 어머니가 반역자라고 배워왔던 흐루쇼프의 손자들은 친모와의 사이가 죽을 때까지도 데면데면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 사건을 결정적인 계기로 이후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레오니트 흐루쇼프의 사체는 1990년대에 산골짜기에서 발견된다. 검시 결과 전투 중 사망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스탈린 앞에만 가면 재롱둥이(…)가 되어 춤[6]추고 노래하며 대머리를 농담삼아 딸랑딸랑 귀여움 받는 등 꽤나 수모를 당했다고… 흐루시초프: 서기장 동지, 떠오르는 해 (반질반질) 스탈린,베리야: ㅋㅋㅋㅋ 흐루시초프: 이번엔 지는 해

2.1.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3년 말에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그는 우크라이나를 복구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 와중에 반소련 게릴라[7]들의 준동에 대항해 싸우는 한편,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식량의 대부분이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 수송되고 있음을 알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식량을 요청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마침내 분노한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비행기를 타고 찾아가 대면해서야 약간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으나, 이를 고깝게 본 스탈린에 의해 그의 상관인 카가노비치가 우크라이나로 날아오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도 약간 타격받게 된다. 그러나 1947년에는 다시 복권된다.

2.2 지도자로 등극하다

2.2.1 스탈린 사망 직후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내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6개월 만에 서기장에서 사임하였다.[8] 이 과정에서 스탈린의 충복인 라브렌티 베리야와 권력다툼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게오르기 주코프, 비아체슬라프 몰로토프 등의 지지를 얻어 결국 베리야를 반역죄로 처단하고 서기장에 등극한다.

지나칠 정도로 주의깊고, 어찌보면 소심할 정도인 스탈린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과격하고 앞뒤를 재지 않는 호쾌한 성격을 자랑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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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회의장에서 연설할 때 구두를 벗어 연단을 치면서 연설했다는 사진이 있으나, 조작된 사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일어났다고 하며, 필리핀의 UN 대변인인 로렌조 스믈로그가 소련을 비방하는 연설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구두를 벗어 자신이 앉아있던 책상을 내려찍었다고 한다. 다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소리나 사진자료 등은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히 어느 타이밍에 일어났는지도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10][11]분명히 EBS보고 이 항목을 찾아온 자가 있을 것이다[12]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해서 스탈린 체제의 억압성을 수정하려 한 것은 높게 평가받지만, 반대로 이것이 그의 권력기반을 약화시켰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흐루쇼프의 통치시기는 소련 역사상 몇 안 되는 해빙기의 하나로, 이 당시의 젊은이 세대가 나중에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의 주축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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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잘 나가던 때의 흐루쇼프. 왠지 뒤에 넘어져 있는 사람을 패고 오는 것 같다

피가 피를 부르던 소련 정치를 순화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만 해도 권력투쟁에서 패한 경우는 대부분 처형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연쇄 강간마 베리야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등)을 당에서 추방만 했을 뿐, 처형이나 감금 같은 물리적인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적들은 비록 권력을 잃고 야인이 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고액을 받는 연금생활자로 지내거나 혹은 지방의 한적한 기관으로 좌천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방침은 후임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흐루쇼프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야인이 된 후에도 고액 연금수령자로서 수혜를 입었다.

2.2.2 스탈린 격하운동

그가 서기장 자리에 막 앉았을 당시에는 누가 뭐래도 흐루쇼프는 스탈린주의자로 보였으며, 스탈린의 신적인 우상화는 아직까지도 소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그를 신적인 위치에서 독재자로 끌어내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스탈린 격하운동은 스탈린의 충복이었던 베리야가 먼저 시작하였다. 베리아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억압적 정책을 대부분 폐지했고 고문방지 법안을 내고 굴라그에 끌려갔던 이들을 석방시켰다. 이런 베리야의 자유화 정책은 다른 정적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흐루쇼프, 말렌코프등 여러 정적들이 베리야를 "국가를 흔든다"는 명목으로 잡아 처형했다. 이것으로 다시 스탈린 시대로 정책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흐루쇼프는 한 술 더 떠서,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소련 전역과 전 세계 공산주의 국가에서 모인 대표단을 앞에 두고 무려 5시간에 걸쳐 '개인숭배와 그의 결과에 대하여'라고 이름이 붙은 비공개 연설을 행했다. 여기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여러 비행들을 나열하고,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는 레닌의 유언장, 스탈린의 키로프 암살 사주, 독소전쟁 당시 스탈린의 여러 병크 등을 나열하면서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독일을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겼다"[13][14], "스탈린은 천하의 악당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독재자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 연설을 들은 소련 공산당 고위 당직자들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으며,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후에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후문에 의하면 흐루쇼프가 연설을 마치자 오랫동안 청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가, 이윽고 사람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이 연설에서 착안한 공산주의 유머가 있는데 전당대회에서 졸던 당직자 한 사람이 자다가 깨서 놀란 나머지 "흐루쇼프! 이 더러운 반동!"이라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왜냐고? 잠결에 21차 전당대회가 열렸다고 착각하고 흐루쇼프의 후임이 흐루쇼프를 격하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소련의 체제도 많이 순화되었고, 많은 정치범들이 석방되었으며, KGB는 반정부인사를 체포하거나 처형하는 역할보다는 감시하는 역할로 바꾸었고, 반역자로 처형된 여러 명이 복권되었다.

비단 소련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공산주의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특히 마오쩌둥 통치하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를 고수하던 중국과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수정주의 논쟁으로 번지며 두 국가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중국은 소련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가정한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며 1970년대에 이를 간파한 미국이 전격적으로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또한 동유럽에도 일시적으로 자유와 해방의 물결이 퍼져나가면서 폴란드에서 포즈난 항쟁에서의 학살극을 벌인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서 고무우카가 집권하였으며, 헝가리에서 반소무장봉기가 일어나서 임레 너지가 집권하게 되나, 흐루쇼프는 폴란드에 대한 대응과는 다르게 헝가리의 반소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한다.[15]

여담으로 위의 그 스탈린 까는 연설을 할 때 연설 중간에 한 사람이 '당신은 스탈린의 최측근이었소.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왜 그를 막지 않았소?'라고 야유를 보내자 흐루쇼프는 '방금 누가 말했소?!?!!!!!'라고 사자후(...)패왕색를 내뿜었다. 바로 모두 다 아닥을 하여 조용한 정적이 몇 초간 흐른 뒤, 흐루쇼프가 천천히 입을 떼며 말하길 바로 이래서 내가 저지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자신에 대한 공격을 자질구레한 말로 반론하여 비겁한 변명으로밖에 들리게 하지 않는 길보단, 독재자의 분노를 면전에서 접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함으로써 행동으로 보여준 것으로 흐루쇼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리고 이 일화는 공산주의 유머에 그대로 추가되었다.

2.2.3 미국과의 대결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대결만큼은 그도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미군의 항공력이 너무 강해 핵폭탄이 있어도 그걸 운반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련의 베르너 폰 브라운이라 할 수 있는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그의 거대 로켓 R-7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소련에서 미국까지 단 20분 만에 핵폭탄을 날릴 수 있는 로켓이 가한 충격은 대단하였으며, R-7의 페이로드를 이용해 스푸트니크 위성 시리즈를 연달아 발사, 미국의 체면을 박살내는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국민을 안정시키려던 아이젠하워 정권은 그야말로 지지도가 급락했고, 다급하게 미국의 인공위성을 쏘기 위해 강행한 미해군뱅가드 로켓 계획도 전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보는 앞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쪽박을 제대로 뒤집어썼다.

그나마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와 육군 미사일 팀이 익스플로러 1호를 쏘면서 간신히 미국의 체면은 유지했고, 그 뒤로 미국은 "다시는 빨갱이에게 지지 않겠다!"며 NASA를 설립하고 과학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등 이후 미국의 우주정책이 쾌속질주할 수 있도록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리고 결과물은 아폴로 계획 착륙이라는 괴물.[16][17]

게다가 미국은 미니트맨 ICBM을 딱 2년 만에 600기 이상 배치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소련과의 탄도탄 전력차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18] 당시 소련은 전후복구에 중점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본격적인 핵무기 생산 경쟁을 할만한 사정은 아니었고, 결국 전후복구가 마무리된 이후인 1960년대 후반부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탄도탄 전력을 엄청나게 증강시켜 1970년대 말에는 소련이 미국을 추월한다.

이런 미사일 만능주의 정책, 그리고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관련 정책[19] 등이 얽히면서 재임 중에 전 세계가 전면적인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몰렸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20]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이때 '이 영감, 안 되겠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해서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위에서 열거했듯이,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 누구보다도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위치에 여러번 있었고,[21] 당장 자신의 아들도 전쟁 중에 실종되어 사망했으리라 여겨지고 있었으며, 자신 역시도 스탈린 정권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까지 미국에서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전쟁은 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고, 미국 역시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핵전쟁만은 최후의 선택으로 여기고 피하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결국 양측이 합의하는데 성공하는 뒷배경도 있었다. 실제로 겉으로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서로 부하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루트가 여러개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신중한 사람.[22]

2.2.4 종교탄압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기에 종교면에서는 스탈린보다 더 탄압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부흥을 허가하고, 정교회 모스크바 대주교를 국가행사에 초청하던 스탈린과는 달리[23] 흐루쇼프는 러시아 정교회를 박해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24] 결국 정교회 수도승들은 강제로 짐을 싸고 수도원과 교회를 떠나야 했고, 스탈린 시기에 문을 열었던 많은 교회들과 수도원들이 다시 문을 닫았다.

사실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 정교회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정교회는 기본적으로 차르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며(동방정교회에서는 왕이 곧 신의 대리인이라는 일종의 제정일치 제도였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은 모스크바 대주교가 아니라 차르였다),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는 일종의 또다른 강제적인 세금이었다. 물론 스탈린과의 유착은 당연한 일이고. 이런 십일조를 가지고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은 "뾰족한 바늘에는 천사가 몇명이 서 있을 수 있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신학적 토론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후일 러시아 정교회를 밟아버린 것도 이런 데 대한 민중들의 분노를 반영한 측면이 강하다. 그로 인해 일부 러시아 정교회 교파들은 스탈린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반면[25], 흐루쇼프는 "악마의 자식", "사탄의 제자"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죽어서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던 걸 보면 정교회 측에서도 그가 종교를 탄압한 것과 별도로 인간적인 면에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인정한 것 같다.

2.2.5 주택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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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러시아의 흐루숍카.

깨알같은 라다 오카

한편 당시 소련은 독소전쟁 후에 수많은 주거지가 파괴된데다가 도시화로 인한 주택난이 가중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량의 아파트를 빠른 기간내에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소형 아파트가 주요 도시지역에 대량으로 건축되었고, 이 아파트를 무상으로 공급하면서 당시 소련의 주거난 해소에 기여했다. 이러한 소형 아파트들은 흐루숍카(Хрущёвская квартира)라고 불린다. 이 아파트는 애초에 값싸게 대량으로 건축된 만큼 외관이 후지고 층간소음도 심했으며 주방도 좁았고 천장이 낮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공용아파트나 판자집 따위에 거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에 소련 서민층에게 선망이 대상이 되었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상당수의 흐루숍카가 여전히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다. 그래도 스탈린카(스탈린 집권기에 건축된 고급 아파트)에 비하면 훨씬 후지긴 했기 때문에 개집이나 판자촌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나... 그리고 소련에서 일반인들에게 별장(다챠)이 보급된 것도 이 시기로 그 이전에 고위층이나 일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 등 일부에게만 나누어주었던 별장을 불특정 다수에게도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주면서 별장이 일반화되었다.

2.3 몰락

2.3.1 군사교리 수정과 군부의 반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자 다시 부활한 종심작전 이론에 의해서 서방보다 거대한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여 전쟁억지력을 갖추려고 했다. 이는 독소전쟁의 전훈에 의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미국은 나치 독일보다도 훨씬 거대한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재래식 전력을 갖춘다는 것은 미국의 경제에 미치지 못하는 소련의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와 ICBM 등 전략무기를 확충하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고 했는데[26], 이는 독소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흐루쇼프의 집권을 돕기도 했던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고 흐루쇼프는 1957년 주코프가 외유를 하고 돌아오는 시점에 그를 해임해버렸다. 주코프는 꼼짝없이 그대로 야인으로 내려갔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흐루쇼프는 사후 출판된 회고록에서 주코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주코프를 해임한 후 흐루쇼프는 자신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절부터 친했던 로디온 말리놉스키를 국방장관으로 내세웠고,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의 생각대로 군을 개편했다. 그래서 소련 육군 교리도 핵과 미사일 중심으로 바뀌면서 BMP 보병전투차량의 등장 및 오비옉트 775번 미사일 전차 연구가 이 당시에 이루어졌다.

여담이지만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의 심복이었지만, 흐루쇼프의 실각때 수수방관함으로써 흐루쇼프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문민통제의 입장에서는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게 한 말리놉스키의 행동은 합당한 것이지만, 으리로 보면 입장에서는 그는... 믿는 도끼에 발등찍은...

2.3.2 농업정책 대 실패

파일:Attachment/니키타 흐루쇼프/hruschev.jpg
마시쪙?

위에서 설명한 냉온탕을 오가는 대외정책과 군부의 반발뿐만 아니라, 농업정책의 실패도 흐루쇼프의 몰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흐루쇼프는 소련에 있는 광대한 미개척지를 개간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실시한 게 미개척지 개간 사업인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처녀지개간메달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그가 개간하려는 미개척지의 대부분이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같은 곳이었던지라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춥고 메말라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농사 시작하면 망하기 딱 좋은 땅이라는 말.

하지만 그는 스탈린도 구워 삶았던 트로핌 리센코의 '춘화이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리센코의 춘화이론을 대충 요약하자면, 종자를 냉각시키는 춘화처리를 하면 추위를 이기는 품종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근데 이것은 1대에 그치는 형질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황우석처럼 실험데이터 조작도 서슴치 않았고, 언플도 상당했는지 공산당 고위관리조차 낚아서 많은 연구비를 타내기도 했다.

어쨌든 이것은 용불용설의 변형으로 대부분의 소련 생물학자는 이를 유사과학이라고 주장했으나, 흐루쇼프는 무학이었기 때문에 리센코 이론이 공산주의 원리에 맞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으로 종자에 춘화 처리를 실시했다. 다만 당시 리센코는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생물학 지식이 별 볼일 없던 여러 공산당 고관들을 낚았으므로, 흐루쇼프가 무식해서 리센코를 추종했다기보단 어쩔 수 없이 리센코를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소련 생물학회에선 1930년대까지만 해도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필두로 한 유전자설[27]이 대세였고 바빌로프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돌아다니며 무려 40,000개의 품종을 들여오는 등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이 양반은 심지어는 종자를 찾아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 찾아왔고 1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니 흠좀무.

그러나 대숙청 당시 스탈린과 친분이 두터웠던 리센코와 달리 인맥이 없던 바빌로프는 고작 5분 동안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끌려갔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련 인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연구를 빙자하여 국고를 축내며 해외여행이나 다닌 반동'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러 과학자들이 스탈린에 탄원하여 사형은 간신히 면하고 종신형으로 대체되었으나 3년 후 형무소에서 굶어죽고 만다.

그 후 리센코는 소련 생물학회, 아니 소련 과학계를 지배하게 됐으니 흐루쇼프가 설령 지식인 출신이라 해도 이건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리센코는 DNA가 발견된 후인 1960년대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에서 쫒겨났으며 바빌로프는 복권되었다. 이미 그는 굶어죽었지만...

뭐가 어찌되었든 결과는? 소련 농업은 망했어요.[28] 안 그래도 집단농장체제의 비효율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되었는데, 춘화 처리한 종자의 제2세대가 1세대의 획득성질을 상속받았다고 생각하여 황무지에 대거 심었다가 제대로 수확을 못내서 농업생산량이 급감하였다. 때문에 적국인 미국이나 타 서방국가들로부터 대규모의 식량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흠집을 냈다. 처녀지개간메달 문서에 이때의 참상이 잘 나타나 있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공산국가에서는 한 독재자가 이에 질세라,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모토로 농업증산을 실시했다가 비슷하게 농업을 말아먹었다. 다만 흐루쇼프는 잘못을 인정하고 재빨리 부족한 곡물을 수입해서 대규모 기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감추고 우리 풍년이 들었다며, 외국에 곡물수출을 계속하다가 수천만이 굶어죽게 된다. 이런 것을 보면 공산국가 지도자들이 자주 벌이는 현지지도라는 게 얼마나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독재자아무 의미없이 한 말이나, 흐루쇼프처럼 과학에 대해 잘 모르고 한 말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29]

그래도 흐루쇼프는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받았다. 뭐 자기가 집권하고 있었으니까

2.3.3 실각과 그 이후

흐루쇼프가 너무 막 나간 탓에 권력 기반이 악화되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당 내 원로 보수 인사들은 음모를 꾸몄다. 처음에는 스탈린이 그렇듯이 반혁명 반당 음모사건을 조작해서 흐루쇼프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결국 당 내 비밀회의에서 공격을 통해서 실각을 모의한다.

휴가 중 "농업발전 협의"로 급거 소환된 흐루쇼프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의 공격에 못 이겨 결국 무능을 이유로 자진 사임하게 되었고 사실상의 쿠데타 혐의로 별장에 감금된다. 소련은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을 이어받음으로써 보수화된다. 흐루쇼프 본인도 어느 정도 낌새는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낌새를 눈치챘음에도 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순순히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연금, 여생을 보낼 주거에 대한 부분을 협의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연금액을 100루블에서 80루블로 깎은 것 말고는 다른 조건은 다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한다.

흐루쇼프가 이렇게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 가능한데, 일단 그 자신의 건강 상태도 너무 안 좋았다는 점, 적백내전과 스탈린 통치를 겪었던 그가 또 다른 분열을 일으킬 자신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흐루쇼프의 건강 문제는 의외로 심각해서, 흐루쇼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CIA가 몰래 그가 사용한 화장실에서 남긴 걸로 채변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 사람 아직까지도 살아있는게 신기하네."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과음으로 사망하고 있으며, 여담이지만 아직까지도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0대에 불과하다.

실각 상태에서 연금과 아파트, 그리고 별장을 받은 흐루쇼프는 강요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실각 전날 측근에게 말했듯이 스탈린 시절이면 물기 하나 안 남기고 증발했을 것이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감시 상태지만 외국 인사들이나 예술가들의 방문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흐루쇼프의 아들의 회고에 의하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자주 울곤 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흐루쇼프 실각 후에 당의 공식 역사에서 흐루쇼프의 공로는 모두 삭제된다. 방대한 분량의 '소련 대백과 사전'에서 그의 공로들이 모조리 삭제된 건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던 리처드 닉슨[30]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했는데, 하필이면 흐루쇼프가 별장에 간 사이에 아파트에 방문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흐루쇼프가 남긴 말들 중 "내가 한 일들 중 의미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사형당하지 않고 그저 유배되게 소련을 변화시킨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의 경제정책 자체는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부정당했지만 흐루쇼프가 시행했던 정책 중 상당수는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폐지되지 않고 시행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탈 스탈린화 정책 덕택에 소련을 말 한번 잘못했거나 태업했다하면 굴라그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해야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사회분위기를 지닌 나라에서 어느 정도 느슨한 분위기를 지닌 국가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흐루쇼프가 소련에 남긴 유산은 의외로 크다.

2.4 사망

197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감시는 심했지만 나름대로 거창한 장례식을 치뤘지만, 크렘린 궁 묘역에는 묻히지 못하였다. 지금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보리스 옐친과 함께 묻혀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나름대로 명망 있는 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크렘린에 비하면...또 전직 서기장임에도 러시아에서는 신문 한 줄로 사망소식이 언급되었고 서방에서만 그의 사망이 큰 이슈가 된다. 실각했음에도 아들 세르게이는 고위공무원으로 살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 미국 브라운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가 된다.

3 회고록

은둔생활 후 회고록 작성에 착수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회고록을 위한 구술녹음자료[31]를 만들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복사본이 유출돼서 서방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KGB에서는 녹취자료를 관리 중인 흐루쇼프의 아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 원본을 입수, 보관하게 되고 이 원본은 소련 붕괴 전후에 공개된다. 서방에서 유출된 회고록이 출판되자 소련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그것은 CIA의 작품임을 언명하고 흐루쇼프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회고록의 내용을 부정한다. 사실 이 라디오 방송 출연은 실각 후 그가 유일하게 공식석상에 나온 때이다. 당연히 회고록이 조작이라는 것 자체가 강요된 거짓말. 하지만 CIA가 여러모로 개입한 것은 맞으며, 특히, 번역과정에서 의도적인 오역으로 소련체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한 사실도 있다.

흐루쇼프 회고록은 격동의 소련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겪은 스탈린 시대의 불합리성 및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며[32],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사건에서 소련이 보인 반응에 대한 훌륭한 연구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에도 논쟁 중이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 김일성이 스탈린을 방문해서 남침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답을 받았다는 증언인데, 종래의 내전설, 남침 유도설, 소련 명령설[33]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료였다.

4 일화

왜인지 몰라도 옥수수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 본인이 공산진영 지도자답지 않게 팝콘도 즐겨 먹는 등 옥수수를 좋아했으며 1959년 방미시에 본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대농장에 감명을 받아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에 대신 개량형 옥수수를 심기도 했으나 기후에 맞지 않아 똥망하면서 소련 전역에 유혈사태식량 위기가 찾아왔고 결국 이는 5년 뒤에 그가 실각하는 단초가 되었다.(…) 순순히 사퇴한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34]

참고로 미국에선 "소련에서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흐루쇼프는 바보다!'를 외치다가 체포돼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국가 서기장 모독죄로 3년에, 국가 기밀 누설죄로 20년을 더한 것이라더라"는 농담이 존재한다는데, 이 농담을 만든 사람이 '흐루쇼프' 본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셀프 디스?[35] 브레즈네프 관련 농담이란 말도 있다. 하도 확대 재생산이 많이 돼서…다만 이정도 유머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흐루쇼프 시절 소련이 개방화된 것은 흐루쇼프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 시절 저랬다가는 본인의 처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조시대처럼 3족이 멸해질 정도였으니...

흐루쇼프가 학력이 낮고 좀 멍청해보이는 이미지이긴 했지만, 위의 경력들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흐루쇼프는 막가파 이미지나 농업 생산력 증대 관련으로 놀림받으면 받았지 바보 이미지로 놀림받진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애시당초 소련 서기장 자리는 고스톱으로 따는 자리가 아니다.

펩시를 세계 굴지의 음료회사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1959년 모스크바 엑스포 당시 미국에서 펩시콜라 담당자도 소련으로 왔었는데 펩시콜라 담당자가 느닷없이 흐루쇼프에게 콜라를 권하자 흐루쇼프는 기꺼이 받아마셨고, 닉슨과 같이 건배도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기꺼이 콜라를 받아마신 사진이 세계 각 언론을 통해 전파되면서 펩시콜라의 판매량은 급속하게 늘어나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고, 브레즈네프 시기에 펩시가 소련에 진출하면서 1986년에 코카콜라가 소련에 진출하기 이전까지 소련의 콜라시장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사족으로 집권 중에 러시아 소속이었던 크림 반도를 고향인 우크라이나에 넘겨버렸다. 왜냐하면 그가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경력과 인맥 관리가 중요했기에 우크라이나에게 세바스토폴이라는 괜찮은 항구도시 하나 주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그 시절에야 단순한 행정구역 변경 정도였겠지만... 이는 수십년 뒤 2014년 크림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결국 크림 반도는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이 때 소련 최고회의는 아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 거수기 역할에 그쳤고 훗날 이 결정은 당시 헌법 기준으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휘하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1959년 유명한 이른바 '주방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라는 발언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 그의 또 다른 농담 및 어록
    • 흐루쇼프가 협동농장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돼지들이 '흐루...흐루...' 하며 울고 있었다(러시아어로 돼지 우는 소리가 'хру хру'이기 때문. 흐루쇼프의 철자는 Хрущёв.). 그러자 흐루쇼프가 말하길, "돼지들이 발음을 똑바로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잘 시키시오."
    • "정치인들이란 다 똑같다. 개울도 없는데 다리를 놔주겠다고 공약을 하니 말이다."
    •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게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
    • 1960년대에 흐루쇼프를 취재하던 한 이집트 기자가 시가를 피우자 흐루쇼프는 시가를 빼앗아 재떨이에 문질러 꺼버렸다. 기자가 왜 그러냐고 하자 "이건 자본주의의 상징이오. 당신은 나세르의 친구이니 시가를 피울 수 없소"라고 강하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쿠바 혁명이 일어난 후, 그 기자가 다시 흐루쇼프와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흐루쇼프가 웃으면서 시가 한 상자를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기자가 놀라서 "놀랍습니다, 각하. 지난번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물론이오. 그러나 카스트로 동지가 혁명을 이룩한 이후로 이 시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가가 되었다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오 쾌남 오오
    • <냉전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마오쩌둥에게 "베를린은 서방의 아킬레스건이오. 그것은 '물집이 생겨 통증을 주는, 유럽에 놓인 미국의 발'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마찬가지 <냉전의 역사>에 따르면 "베를린은 서방의 고환이다. 서방세계가 아파서 소리지르게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베를린을 꽉 움켜쥔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서기장 양반, 내가 고자라니!
    • 스탈린 사후, 국제혁명의 노선 문제와 당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의 입장 차이라는 핑계의 국경분쟁으로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사이에서 영토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갈등을 봉합하고 형제 사회주의 국가의 연대와 우애를 유지하기 위한 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때 중국대표로 회담에 참여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한참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어졌지만 양국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열받은 흐루쇼프는 저우언라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부르주아 지식인 계급 출신인 당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소!".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심각한 계급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요. 자신의 출신계급을 배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회담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흐루쇼프는 대인배(?)스럽게 손님인 저우언라이에게 행렬의 선두 자리를 양보했고, 국제혁명의 영도자인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두고 어떻게 내가 선두에 서겠느냐는 저우언라이의 사양에 대해 "당신을 내 뒤에 두면 그 지팡이로 내 머리를 후려칠까봐 무섭소."라고 대답함으로써 복수했다. 이것만 보면 뭔가 째째한데

5 대중매체에서의 흐루쇼프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카메오(?) 출연한다. 자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볼긴 대령을 암살해줄 것을 미국 쪽에 은근히 요구하는 역할이다. 스네이크제로 소령과 무전연락을 할 수 있는 것도 서기장 권한으로 위성채널을 빌려줬기 때문이며, 작전지역 내에 조력자를 심어둔 것도 그의 밀명이다. 어떤 의미로는 스네이크의 스폰서 되시겠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는 밥 호스킨스가 흐루쇼프 역을 맡았는데, 웃기는 것은 10여 년 전에 제작된 이너 서클에서는 이 사람이 흐루쇼프가 처형하는 베리야 역을 맡은 것이다. 같은 문어머리이기 때문에 ..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배경이기 때문에 짧게 등장한다.

SD세계대전에서 영웅유닛으로 등장한다.(하지만 영웅같지 않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선 초상화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퀸(밴드)의 노래 Killer Queen에 "Khurchev and Kennedy"라는 가사가 나온다.
  1. е 위에 부호(ё)가 빠진 채로 읽은 것이다. 이 글자는 원래 1917년 이후의 러시아어에 도입되었고, 이전에는 발음은 다르지만 е와 구분 없이 쓰였다. 발음을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변형해서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러시아어 교재나 저학년용 교과서를 빼고는 저 부호 붙은 ё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나마 정확성이 중요한 TV 뉴스에서는 지켜서 쓰는 편. 그 외의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잘 안 쓰는 경우도 많다.
  2. 일부다처였던 것은 아니고, 첫째 아내가 전염병으로 일찍 죽어서 재혼한 거다.
  3.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일하던 당시 직접 스탈린에게 보고한 사형수 숫자만 8500명이라고 한다. 서기장 동무, 딸랑딸랑
  4. 스탈린이 몸소 그의 대머리에 담뱃재를 털면서 "로마에서는 패장에게 재를 뿌리는 풍습이 있었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은 부지했으니...
  5. 그래도 둘째 아들은 미사일 설계사로 근무했고, 손녀는 미국에서 교수직을 지내고 있으니, 첫째 아들 전사, 둘째 아들 망나니, 막내 딸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스탈린 일가에 비하면….
  6. 그것도 다른 춤이 아니라 춤추기 힘든 걸로 악명높은 우크라이나 전통춤 고팍. 코사크 사람들이 털모자 쓰고 펄쩍펄쩍 뛰는 그 춤 맞다.
  7. 우크라이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스탈린의 학정에 고통받고 죽은 우크라이나인들 때문에 소련의 통치에 반대하는 민심이 절대적이었다.
  8. 말렌코프는 서기장 사임 후에도 정치국에 잔류하다가 니콜라이 불가닌 등과 함께 1957년 흐루쇼프를 실각시키려는 시도가 발각되어 지방수력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다.
  9. 아래의 경우도, 호쾌한 기분파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부분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0. 우리 상식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괴상한 행동이지만, 러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제스처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당시의 사진을 분석해본 결과 흐루쇼프는 양쪽 발 모두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
  11. 이 에피소드는 EBS 인터넷수능 영어지문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지문엔 "흐루쇼프가 서양사람들이 정치적 논쟁을 매우 좋아해서 그들이 원하는걸 연설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행위를 했다."라고 아들이 증언하는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러 추측을 사실인것 마냥 썼을 수도.
  12. 2016학년도 수능을 치루기 위해 공부한 사람들은 인터넷수능 영어영역에서 이와 관련된 글을 읽었을 것이다. 어차피 다 까먹었을건데 왜 저 드립을 친거지
  13. 물론 스탈린의 초고속 공업화 정책이 없었더라면 소련은 절대로 독소전쟁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전쟁 전 대숙청과 전쟁 초기 지휘 삽질로 위험한 수준까지 전력을 까먹은 것도 사실이니 그런 평이 나오는 것도 무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숙청이 없었다면 스탈린이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스탈린급의 인사와 정적 숙청이 없었다면 무에서 쌓아올린 초고속 공업화 계획은 비현실적이며 인민을 너무 갈아 넣는다는 이유로 그의 정적들에게 끈임없이 공격받아 계획 자체가 진행이 불가능했을것이다. 전쟁 초에나 중기까지는 스탈린이 군사에 너무 깊게 개입해 망친 작전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군대에 금발 게르만이 많아야한다! 검은 복장을 입혀라! 이래가며 군을 망치던 히틀러와는 달리 SVT-40 반자동 소총 계획을 추진하거나, KV-1KV-2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 전차들의 설계도를 밤낮으로 설계자들과 살펴보거나, 공장 설비를 개혁하고 식량 배급을 공무원들과 머리를 맡대고 회의하는등 붉은군대의 쾌속 진격을 위해 보급과 무장에 깊게 관여했으며 대조국 전쟁 전에나 후에나 소련의 후방을 든든히 했다. 스탈린의 중공업화 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와 보급계획 수립등 그가 없었다면 사실상 소련이 초강대국이 될 수도,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대표되는 제 2세계의 철벽 구성이 그토록 빠르게 될 수도 없었다.
  14. 그러나 스탈린이 아니었으면 심지어 트로츠키가 권력을 잡았어도 공산주의가 이토록 잔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그런 주장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물론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트로츠키는 반역자 취급이지만
  15. 사실 원래는 임레 너지가 스탈린주의파와 대립했다가 쫓겨나는 경험이 있던만큼 흐루쇼프와는 정치적인 성향은 비슷했기에 초기에 임레 너지 정권을 승인하려했지만 임레 너지가 집권한 이후에 헝가리가 유고슬라비아처럼 WTO를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하려고 하는 등 소련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자 망설이다가 태도를 바꾸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임레 너지 정권을 뒤엎게 된다. 반대로 고무우카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WTO에 잔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6. 그러나 미국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NASA의 예산은 끊임없이 줄어들었으며, 그 결과 지금은 지구에는 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로켓이 없다. 오죽하면 2003년 중국인 우주비행사 양리웨이가 3번째로 우주 유인을 나가자 이걸 빌미로 미국 우주선 관련 예산이 늘지 않을까 기대를 했을 지경이다. 사실 오리온 계획이라고 달 착륙 및 유인 화성우주선까지 통합하는 계획을 진행하기는 했는데, 2008~2009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예산이 안녕하신지 심히 우려되는 상태.
  17. 사실 아폴로 계획은 당시에도 가히 엄청난 비용을 들인 프로젝트라 다시 실행하는 것부터가 매우 힘들다. 또 그렇게 비용을 들여서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나 성과가 없는 것도 문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달에 대해 조사하려 했다면 차라리 로봇을 보내는게 인간보다 훨씬 나았다. '인간 달착륙'에 악을 쓴 것은 실질적인 성과가 따라와서가 아니라 그저 소련과의 자존심 대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18. 1964년 당시 미국이 실전배치한 탄도탄 전력은 아틀라스 ICBM 113기, 타이탄 I 108기, 미니트맨 600기, 폴라리스 224기였는데 반해 소련의 탄도탄 전력은 R-7A 6기, R-16 172기, R-9A 11기 수준으로 미국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19. 스푸트니크가 가한 충격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미 의회는 ICBM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당시 생산가능한 중거리 미사일을 엄청난 속도로 만들도록 강요하였으며, 이들은 사정거리 문제로 인하여 미군은 이 미사일들을 서독과 터키에 대량으로 배치했고 냉전시기 최전방국가였던 서독과 터키에 대한 핵우산 정책으로 활용되었다. 소련이 똑같은 짓을 쿠바에 하려다 일어난 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 참고로 남한 역시 랜스 미사일과 같은 단거리 탄도탄이 배치된 적이 있다.
  20. 물론 핵전쟁으로 번지면 100% 확률로 소련은 멸망했을 것이다. 62년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핵전력 격차는 안드로메다급으로 차이가 나던 수준. 소련은 갖고 있던 66기의 ICBM/SLBM을 다 쏘고 나면 미군이 때리는 대로 맞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참고로 이때 미군이 본토에서 소련으로 발사 가능한 핵전력은 탄도탄 170여 기에 B-52 전략폭격기 555기로 투하가능한 전략핵탄두 1830기. 여기에 서유럽에 배치된 중거리 핵전력을 따지면…답이 안 나온다. 이럴 땐 캐리어 가야죠!!
  21. 자기 목숨도 왔다갔다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22.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에 보면 흐루쇼프가 정치인/외교관/군인들이 개입된 공식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2차대전에 참전했던 자신의 어릴적 고향친구를 밀사로 파견해서 백악관측과 비밀협상에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도 자신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해서 최종협상에 내보낸다. 실제역사에서는 피그만 침공을 계기로 이미 양측이 서로 밀사를 보내면서 직접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23. 참고로 스탈린은 조지아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러시아 뿐만아니라 서구에서는 가난한집 수재들은 학비가 면제되기 때문에 신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긴했다.
  24. 어찌보면 흐루쇼프가 공산주의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 이라는 관념을 지키다보니 그런 것이기도 하다
  25. 성인으로까지 추대하려고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26. 후에 1960년대 중국, 그리고 1990년대의 북한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재래식 무기를 대규모로 확충할 돈이 없을 때, 핵무기를 개발해 전쟁억지력을 갖추는 것은 오히려 싸게 먹힐 수도 있다.
  27. 당시엔 설이었다. DNA는 50년대에 와서야 발견된다.
  28.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외로 초기 몇년간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삽질들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망하게 된것.
  29. 보다 정확히는 현지 지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치와 시스템의 차이다. 특정인, 특정집단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체제에선 실무자들의 솔직한 의견개진과 보고가 힘들다. 잘못하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나는데 가능하겠냐. 따라서 광범위한 정보수집과 이에 기반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안 된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속전속결로 추진되는 듯 보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말도 안되는 개삽질인 경우가 태반이다. 독재 특유의 비효율이다.
  30. 물론 그는 화려하게 재기해서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퇴임 크리
  31. 생애의 젊은 시절 항목에서 이미 설명됐지만 흐루쇼프는 사실상 반문맹 상태였다. 글을 읽을 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글을 쓰진 못 했으며 기껏해야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수준에 그쳤다.
  32. 물론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이 관여한 여러 범죄나 병크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33. 한때는 김일성은 싫다고 징징거렸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서 남침했다는 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34. 그러나 흐루쇼프 자신이 우크라이나 출신인 만큼,(정확하게는 러시아에서 출생한 러시아인이기는 했지만 출생지 자체가 우크라이나와 가까워서 우크라이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어린시절부터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우크라이나에 나름대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옥수수 건도 식량난을 뭔가 획기적으로 개선해보려다가 실패한 경우이다. 이후 소련에서 옥수수는 동물사료로 사용된다.
  35. 사족으로 전두환 시리즈 중 거기에서 나온 것이 있다. 흐루쇼프에서 전두환으로 바꾸고 형량만 바꾸면 한창 유행했던 전두환 유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