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레넥톤
1 단문 배경
레넥톤은 한때 고대 슈리마의 충직한 수문장이었지만 번성하던 왕국이 무너진 후론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분노에 휩싸인 야수가 된 레넥톤은 이 광기가 자신의 형 나서스 때문이라며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
2 장문 배경
"피, 그리고 복수." 불길에 그을린 슈리마 사막에서 다시 일어선 무시무시한 분노의 초월체, 레넥톤. 한 때 그는 슈리마 최고의 전사로서 무수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슈리마의 몰락과 함께 사막 아래 무덤 속에 갇혔고, 강산이 변하는 억겁의 세월을 어둠 속에서 보내면서 서서히 광기에 굴복해 갔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레넥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을 가둔 형에 대한 복수뿐이다. 레넥톤은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유년 시절 레넥톤은 싸움을 몰고 다녔다. 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고, 나이 많은 형들에게도 기죽지 않았다. 그 어떤 모욕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덕분이었다. 한 번 밖에 나갔다 하면 새로운 상처와 멍이 생긴 채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공부벌레 형은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레넥톤은 싸움을 즐겼다. 나서스가 명문 ‘태양의 신학교’ 입학생으로 발탁되어 집을 떠난 뒤, 레넥톤의 폭력 행위는 형의 부재 속에서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가끔 고향을 찾을 때마다 나서스는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하고 피를 흘리며 귀가하는 동생을 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레넥톤의 폭력성이 감옥살이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하여 레넥톤이 슈리마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레넥톤은 군인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나서스의 영향력 덕분에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입대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의 훈련과 조직생활은 레넥톤에겐 축복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슈리마에서 가장 무섭고 유능한 전쟁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 몇 번이고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는 거칠고 사나운 만큼, 신의 있고 용감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나서스는 장군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 훈장을 받았고, 두 형제는 수많은 전쟁에서 함께 싸우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기질의 차이와 잦은 의견 대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서스는 전략, 군수, 역사 분야에, 레넥톤은 교전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나서스가 전략을 짜면 레넥톤은 실전에 나아가 승리를 일궈내었다. 레넥톤은 슈리마 국경의 산길에서 벌어진 불리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슈리마의 수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침략군은 남쪽 해안으로 침투해 외딴 도시 주레타를 공격하려 했다. 바로 저지하지 않으면 주레타는 함락하고 시민들은 학살될 것이 분명했다. 레넥톤과 몇 안 되는 병사들은 백성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열 배나 많은 적군과 대치했다. 승리는커녕 아무도 레넥톤이 살아 돌아오리라 생각지 못했던 전투였다. 하지만 레넥톤은 하루 밤낮 동안 끈질기게 고지를 사수했고, 나서스가 이끄는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전원이 부상을 입고, 살아 서 있는 병사의 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었다. 레넥톤은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레넥톤은 수십 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존재만으로 아군에게 귀감이 되었고, 적군에겐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연이은 승리로 레넥톤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그가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적국이 항복을 선언하여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일도 왕왕 생겨났다. 무수한 전투로 굳은 살이 배기고 중년에 접어들어 머리가 희끗할 무렵, 레넥톤은 형의 병중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 다시 만난 형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어 있었다. 먼 옛날 귀족의 씨를 말렸다고 전해지는 부패의 저주와 같은 불치의 병환이었다. 그러나 나서스의 위대한 업적만큼은 바래지 않은 채로 온 나라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기도 했지만 대도서관의 관장이자 슈리마 최고의 문학가이기도 했다. 태양의 신은 나서스를 위한 초월 의식을 진행하라고 사제단을 통해 뜻을 밝혔다. 초월 의식을 보기 위해 도시 전체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병이 깊어진 나서스는 초월의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을 끝까지 올라갈 힘이 없었다. 레넥톤은 사랑하는 형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태양 원판의 신성한 에너지로 인해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알면서도, 두 팔로 형을 들어 안고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형이 살 수만 있다면 목숨 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레넥톤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결국 군인일 뿐이었고, 형은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장군이었다. 레넥톤은 슈리마에 나서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넥톤은 파괴되지 않았다. 태양 원판의 눈부신 빛 속으로 두 형제가 모두 떠올라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빛이 가셨을 때, 군중의 눈 앞에는 장대한 두 초월체가 서 있었다. 나서스는 단단한 몸에 자칼 형상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레넥톤은 거대한 악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형제 모두 어울리는 형상이었다. 자칼은 가장 영리하고 총명한 짐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악어의 대담한 공격 방식은 레넥톤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슈리마는 이 두 반인반수가 제국의 새로운 수호자가 된 것에 감사를 올렸다. 훌륭한 전쟁 영웅이었던 레넥톤은 초월체가 된 후, 필멸자로선 상상도 못할 새로운 힘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는 그 어떤 보통의 존재보다 강하고 빨랐으며 고통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초월체는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지만 수명이 매우 길어 수백 년 동안 제국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레넥톤이 총사령관을 맡은 슈리마군은 무적의 군대가 되었다. 그는 원래도 무자비한 지휘관이자 포악한 전사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초월 의식 이후엔 가공할 위력을 갖게 되었다. 레넥톤의 지휘 아래 슈리마군은 수많은 유혈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단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상대로부터 자비를 바라는 법이 없었다. 레넥톤의 전설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 널리 퍼져나갔고, 적군들은 그를 ‘사막의 도살자’라 칭했다. 레넥톤이 듣기에도 싫지 않은 별명이었다. 나서스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초월체가 된 레넥톤의 인간성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레넥톤은 해가 갈수록 잔인해져 살육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그가 저지른 갖가지 잔혹행위를 놓고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레넥톤은 슈리마의 충실한 수호자였고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안보와 번영을 지키며 여러 대의 황제를 섬겼다. 아지르 황제의 재위 기간 중 어느 날, 마력의 불덩이가 지하 감옥 안 마법 석관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불덩이는 한 마을을 초토화시킨 뒤 사막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도주했다. 레넥톤과 나서스는 이 전설의 괴물을 포획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두 형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젊은 황제 아지르는 마법사 제라스의 계략에 넘어가 초월 의식을 치렀다. 결과는 참혹했다. 레넥톤과 나서스는 수도에서 하루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황제의 초월 의식이 불발되었을 때 그 충격의 여파를 느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고 서둘러 돌아갔을 때 슈리마의 찬란한 수도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지르가 죽고, 도시의 백성들도 거의 모두 목숨을 잃은 후였다. 힘을 빼앗긴 태양의 원판도 추락하고 있었다. 잔해의 한가운데에서 두 형제는 사악한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된 제라스를 발견했다. 두 형제는 고대의 불덩이를 잡아 두었던 마법 석관에 제라스를 가두려 했다. 하루 밤낮을 꼬박 싸웠지만 제라스의 위력을 압도할 순 없었다. 제라스는 석관을 부수고, 태양 원판에서 빨아들인 힘으로 마법 공격을 가해 왔다.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태양 원판은 땅으로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제라스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넥톤은 깊고 깊은 ‘황제의 능’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간 뒤 형에게 고분을 영원히 봉인해 달라고 외쳤다. 제라스를 막을 다른 묘안이 없음을 알고 나서스는 마지 못해 동생의 뜻을 따랐다. 레넥톤과 제라스가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동안 나서스는 무덤이 다시는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봉했다. 제라스와 레넥톤은 어둠 속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그들의 기나긴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바깥 세상에서는 슈리마의 거대 문명이 붕괴되어 모래 먼지와 함께 흩어졌다. 제라스는 사악한 거짓말을 속삭였고, 그의 악의와 영겁의 어둠은 수세기에 걸쳐 레넥톤의 영혼을 잠식해 갔다. “네 형은 네 성공을 시기했지. 초월도 함께 하고 싶지 않아 했어. 네 형은 널 일부러 가둔 거야.” 레넥톤의 정신에 시나브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라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점점 더 깊이 쐐기를 박았다. 광기에 굴복한 레넥톤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 후, 용병 시비르가 ‘황제의 능’을 발견하여 봉인을 해제했고, 레넥톤과 제라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레넥톤은 분노로 포효하며 형의 냄새를 찾아 슈리마 사막 위를 질주했다. 레넥톤은 자신을 버린 배반자 나서스를 처치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막을 떠돌기 시작했다. 지난 날 의기양양하던 명예로운 영웅의 모습이 엿보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할 뿐, 이제 레넥톤은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혀 피와 복수를 갈구하는 미친 야수와 다를 바가 없다. |
3 어둠의 속삭임
‘나는 신인가?’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한때는 신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저 위대한 일만 기둥의 궁전 꼭대기에 태양의 원판이 황금처럼 빛나던 시절에는. 그때 레넥톤은 다 죽어가던 고대인 한 명을 품에 붙든 채 햇빛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고, 둘이서 함께 빛 속에서 모든 상처와 고통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 기억은 레넥톤 자신의 것이 맞나? 그가 필멸자였을 때 겪었던 일일까? 아마도 그런 듯했지만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로 뒤죽박죽이었다. 사막의 공기에 뿌옇게 들끓는 파리떼처럼 기억들이 웅웅거리며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현실인가? 지금 나는 무엇인가?’ 지금 레넥톤은 사막의 지하 동굴에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맞을까? 아마도 그런 듯했지만 자신의 감각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레넥톤은 한없이 오랫동안 장막 같은 어둠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어둠이 흩어지면서 그는 빛의 세계로 내던져졌다. 마구 쏟아지는 모래를 헤치며 정신 없이 밖으로 빠져나가고 보니, 땅이 살아 움직이듯 요동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하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가 지표면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석상들이 모래를 뚫고 솟아나왔다. 괴물 같은 머리가 달린 전사들의 형상이었는데, 고대의 신들을 묘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뒤이어 악의를 품은 유령들이 지하에서 속속 올라와 레넥톤을 덮쳐왔다. 사방에서 빛이 번뜩이고 하늘의 달들과 별들이 빙빙 도는 가운데, 그는 부활하는 고대의 도시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다가 사막 한복판에서 비틀거리며 멈춰섰을 때는 눈앞에 온갖 환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수많은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으리으리한 궁전과 황금빛 신전, 살육과 배신의 현장이 보였다. 그리고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이 고작 한 사람의 허영심과 자만심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광경도... 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넥톤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공포만큼은 너무나 생생했다. 예전에는 빛이 그의 몸을 치유해 주었는데, 이제는 빛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홀로 사막을 방황하다 보니 눈부신 뙤약볕에 살갗이 그을릴 뿐 아니라 영혼까지 타들어가는 듯했다. 자꾸만 북받치는 증오심이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햇빛을 피해 이 지하 동굴로 피신했는데, 여기 웅크려 앉아 울고 있으니 이번에는 귓가에 웬 속삭임이 들려왔다.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레넥톤을 에워싸고 수군거리면서 그의 서러움을 부추겨대는 것이었다. 레넥톤은 갈고리 모양의 검은 손톱이 달린 길고 울퉁불퉁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누르며 자기 자신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어둠 속에 도사린 그 속삭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했다. 그 속삭임은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레넥톤이 어떤 일에 실패하는 바람에 수 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마음 한편에서는 그 이야기가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레넥톤의 구미에 맞게끔 꾸며지고 왜곡된 허구인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이제는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모조리 헷갈렸다.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자신이 어둠 속에 갇혔던 순간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빛이 사라지던 광경도, 그 빛 너머에서 레넥톤을 내려다보던 한 자칼의 얼굴도... 그 자칼이 바로 레넥톤을 영겁의 어둠 속에 처박은 배신자였다. 불현듯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레넥톤은 분에 받쳐 눈물을 문질러 닦아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은 레넥톤의 정신으로 침입하는 모든 통로를 훤히 아는 것 같았다. 한때 확고했던 신념도, 미덕도 모두 그 속삭임 때문에 망가져버린 것 같았다. 슈리마?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름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광기의 베일에 싸인 채 신기루처럼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한때는 꿰뚫어보는 듯 날카롭고 형형했던 그의 눈동자는 억겁의 시간에 걸친 어둠 속에서 뿌옇게 흐려져버렸다. 단련된 구리처럼 매끄럽고 튼튼했던 그의 피부는 이제 둔탁해지고 여기저기가 갈라져버렸다. 사형 집행인의 모래시계 속에서 모래가 떨어지듯, 그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에서 먼지가 풀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는다고 해도 별 유감은 없었다. 이미 너무 오래 살았고, 소멸될까 봐 두려워 떨며 지낸 세월도 너무 길었다. 그런데 자신이 과연 죽을 수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레넥톤은 자신의 앞에 놓인, 손잡이가 없는 초승달 모양의 도끼 한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이케시아의 전사 왕이 쓰던 것이었다. 레넥톤이 그 왕의 군대를 격파했을 때 이 도끼의 자루도 함께 부서졌던 것이 언뜻 기억났다. 그래서 레넥톤이 자루를 다시 만들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걸로 자결해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둠 속의 속삭임은 레넥톤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복수를 해야 한다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그게 레넥톤의 운명이라고. 그를 어둠의 구렁텅이에 처박았던 자칼의 얼굴이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자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동굴 벽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들이 별안간 흩어지면서 벽화가 드러났다. 아득히 먼 옛날 필멸자들이 그려놓은 조잡한 낙서들이었다. 여기저기 벗겨지고 빛이 바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지만, 예전에 레넥톤이 보았던 그 사막 도시의 전성기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기둥들이 늘어선 수로를 따라 맑고 차가운 강물이 흐르고, 햇빛을 듬뿍 받은 비옥한 토양이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 높다랗게 우뚝 선 궁전 꼭대기에는 독수리 모양의 투구를 쓴 왕이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짙은 빛깔의 로브를 뒤집어쓴 형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의 아래에는 전쟁용 갑옷으로 무장한 거인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초승달 모양의 도끼를 들고 구부정히 몸을 구부린 악어 같은 외모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전사이자 학자의 풍모를 갖춘 자칼이었다. 레넥톤은 악어 거인 쪽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 벽화를 그린 필멸자가 초월자인 레넥톤에게 느꼈던 경외심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그림이었다. 그 옆의 자칼은 분명 레넥톤을 배신한 그자일 것이다. 레넥톤은 자칼의 형상 아래에 새겨진, 다 지워져가는 희미한 글자를 읽어보았다. “나서스... 형.” 그 이름을 본 순간, 먹구름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듯 자신의 정체가 기억났다. “나는 사막의 도살자, 레넥톤이다.” 레넥톤은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며 초승달 도끼를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자 오랜 세월 몸에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해묵은 상처들이 치유되고, 찢어진 피부가 재생되고, 살가죽에 본래의 옥색 빛깔이 되돌아오고 탄력이 살아났다. 레넥톤은 비로소 자신의 소임을 찾았다. 한때 그는 빛을 통해 소생했지만, 지금은 어둠이 그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막강한 육체에 어마어마한 힘이 넘쳐흐르고, 근육이 팽창하고, 눈은 나서스에 대한 증오로 붉게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또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레넥톤은 이제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도끼날을 어루만지며 자칼 전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은 나를 배신하고 어둠 속에 혼자 버려뒀지. 그 대가는 죽음으로 치르게 해주겠어.” |
4 구 배경
슈리마 출신으로 변경되기 전의 설정이다.
레넥톤은 룬테라와 아득히 떨어진 이세계에서 종족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수인족 수호자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 나서스는 고대의 지식과 윤회사상의 가르침이 보관된 대서고를 관리하고 있었고, 레넥톤은 서고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안을 가진 레넥톤은 서고를 방문하는 이들의 모든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불순하거나 사악한 의도를 가진 자가 발각되면 그 즉시 내쫓는 일을 도맡아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레넥톤은 지속적으로 사악한 기운에 노출되었고 부정적인 기운에 그만 동화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악한 마음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증오심은 결국 레넥톤을 광기의 심연으로 빠뜨리고 만다. 그러던 도중 레넥톤은 악한 이들을 처단하면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도살자의 분노'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레넥톤은 이제 분노의 불씨를 형에게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오로지 형 나서스만이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그를 당해낼 수 없었던 레넥톤은 점점 더 뒤틀린 적개심이 축적되어갔다. 이윽고 그의 세계에 내전이 발발하고 레넥톤은 형의 반대 세력에 동참하게 된다. 나서스는 분노의 족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레넥톤을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설득해보려 노력했지만, 동생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나서스는 마음이 아팠지만, 동생 레넥톤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레넥톤 역시 죽음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들이 형을 소환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레넥톤 자신도 형처럼 어디론가 소환되고 있었다. 강력한 마법에 사로잡힌 레넥톤은 수많은 시공간이 마구 뒤섞인 현실 사이를 수백 년은 되는 듯한 시간 동안 굴러떨어졌다. 마침내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악취와 연기가 가득 들어찬 자운의 하수도였다. 레넥톤은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상황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결국에는 광기가 그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수도의 메케한 냄새 사이로 어렴풋이 피어오르는 친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이 익숙한 향기를 좇아가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형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는 이제 형 나서스를 찾아 전쟁학회로 향했다. "나의 형제는 공허한 존재가 되었다.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속은 텅 빈……." - 사막의 관리자 나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