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2세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 Duke of Urbino
(1492. 9. 12 ~ 1519. 5. 4)

우르비노의 공작으로 조부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의 구분을 위해 통칭 로렌초 2세라고 불린다.

1512년에 숙부 레오 10세스페인의 신성동맹을 등에 업으면서 스위스의 군대로 메디치 가문의 복권과 피에로 소데리니의 사임을 요구해 그 조건이 성사되자 레오 10세의 대리인으로 파겨되어 피렌체에 갔다가 숙부 자코포 살비아티, 피에로 리돌피 등에게 위임해 로마를 방문해 피렌체 공화국 총사령관의 직위를 허락받아 돌아와서 그 직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위원회 모임을 정부의 공공 장소가 아닌 메디치 궁에서 하면서 온건하고 경험있는 시민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하며, 1515년 레오 10세가 피렌체에 올 때 리돌피와 함께 교황을 위한 화려한 영접을 준비하기 위해 기다리게 했다가 11월 30일에 맞이했으며, 교황을 맞이한 후에는 볼로냐로 가서 메디치 가의 권력을 강화했다.

1516년에 레오 10세가 우르비노 공작에게 5년 전에 라벤나의 한 거리에서 원수였던 추기경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를 살해한 사건을 추궁하면서 우르비노 공작이 로마로 오는 것을 거부하여 로렌초는 우르비노를 취하기 위해 피렌체를 떠났다가 공작이 만토바에서 도망치자 5월에 도착해 우르비노 공작과 페사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1517년에 우르비노 공작이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오자 우르비노의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화승총에 맞아 크게 부상을 당했다. 당초 스페인 군대는 우르비노의 험준한 지세에 유격전으로 맞서는 로렌초 2세애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는데 로렌초 2세는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전방을 시찰하다 스페인 정찰대의 총격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불리한 조건으로 정전을 했으니 로렌츠 2세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결과일 수도,

1518년 3월에는 스페인의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사촌 마들랭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 결혼했으며 두사람 사이에 딸이 태어났고 그딸이 훗날 프랑스의 왕비이자 권모술수에 능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였다. 이 결혼 동맹 덕분에 메디치 가문의 지배력은 굳건해 졌다. 말년에 몇 달 동안 피스토이아 출신의 비서와 평판이 나빴던 남자 애인과 카레지와 포지오 아 카이아노 별장에서 보내다가 1519년에 결핵과 매독이 겹쳐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