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루이 12세 | ← | 프랑수아 1세 | → | 앙리 2세 |
이름 | 프랑수아 1세 (François Ier / Francis Ⅰ) |
생몰년도 | 1494년 9월 12일 ~ 1547년 3월 31일 |
재위기간 | 1515년 1월 1일 ~ 1547년 3월 31일 |
프랑스 왕국의 왕.
경쟁 가문인 합스부르크가 기형적인 주걱턱을 가졌던 반면 이 사람은 크고 아름다운 코를 소유하고 있고 부르봉 왕조 창시자인 앙리 4세도 마찬가지이다.
1 개요
선왕 루이 12세의 사촌이었던 샤를 당굴렘의 아들이었으며 루이 12세의 오촌 조카에 해당한다. 루이 12세가 후계자가 없던 발루아 본가의 루이 11세의 딸 잔과 결혼하여 루이 11세의 사위이자 샤를 8세의 매형으로 뒤를 이었듯이, 그도 후사가 없던 사촌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와 결혼하여 루이 12세의 사위로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즉위했다. 그 이전 청년기에는 왕족으로서 군생활을 지내며 방탕함을 몸에 익히고[1] 잘 생긴 외모와 당당한 체격을 갖춘 남자로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왕으로서 그의 삶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으로서 당시 합스부르크 최강기를 구사하던 카를 5세와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처음엔 선왕이 실패했던 이탈리아 침공에 나서 초기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대를 물리쳤으나 곧 에스파냐 군에 밀려 패퇴했고, 동맹자였던 클레멘스 7세의 로마 교황청은 독일 용병단에 의해 쑥밭이 되고 교황은 카를로스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탈리아의 패권 역시 에스파냐 휘하에 들어갔다. 그 후의 전쟁에서도 밀려,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해 한때 포로로 잡히는수모를 겪었다.[2][3]
이처럼 그는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와 같이 "전쟁에서도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군주"였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라이벌 카를 5세에게 관광당하고 생포되는 등 씻기 어려운 치욕을 겪었고, 말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와 대립했지만 결국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밀려나고 만다. 카를 5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한 때문인지 이슬람 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카를 5세에게 대항하려 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유럽 국가들의 비난만 샀다. 특히 악명 높은 오스만의 해적 겸 해군 제독인 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파샤가 이끄는 함대가 프랑스 남부에 정박하고 이탈리아 해안등을 공격하자 유럽 각국에서 교황에게 프랑수아 1세를 파문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 쳤다.[4] 다만 오늘날에는 기독교 유럽 국가가 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은 군사동맹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중.
스페인에 질 수 없다는 듯 신대륙에도 관심을 가져 카르티에를 파견해 캐나다를 탐험하게 하기도 했다.
잦은 원정과 실패, 건축, 배상금 등으로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고, 왕은 관직매매를 통해 임시변통을 했을 뿐이었다. 앙시엥 레짐의 병폐 중 하나인 관직매매와 징세권 매매는 이시기에 악화되었다.
대외정치와 재정 쪽으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인격적으로는 호탕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예술의 후원자이자 인간적이고 너그러웠던 유쾌한 왕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 또 프랑스 궁정에서 평민 출신으로 푸대접을 받던 며느리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항상 염려하고 챙겨주었다고 한다. 문화적인 공적도 있는데, 이탈리아 문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문화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그 아들인 앙리 2세 대에는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공로로 프랑스의 문화가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년을 위한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궁정 역시 정비되어, 기존의 거친 궁정을 대신하는 세련된 궁정이 도입되었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의 위치를 확립했던 것도 이시기이다.
1519 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출마했었는데, 선거 자금으로 30 만 굴덴을 뿌렸으나 경쟁후보였던 카를 5세가 당시 독일 최고의 금융 가문으로 통하던 푸거 가문과 벨저 가문의 힘을 빌려 85 만 굴덴을 뿌린 결과 패배하였다.
1547년 병사했는데, 그의 사인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매독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는 남의 아내를 NTR하는 바람에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이 확대된 것인데(…) 자세한건 매독 참고.
2 가족
바람기가 상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왕위에 오르기전 선왕인 루이12세가 상태가 좋지 않을때 루이12세의 3번째 왕비로 오게된 영국의 메리공주[5]의 침실근처에서 어찌 해 볼까 하고 어슬렁거리자 프랑수아의 어머니인 샤보이의 루이즈가 식겁했다고 한다.[6]
2.1 프랑스의 클로드
프랑수아의 첫번째 왕비. 선왕 루이12세의 딸로 루이12세의 두번째 왕비인 안 드 브르타뉴의 딸.[7] 어머니인 안 드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여 후계자가 되었다. 프랑스의 왕 샤를8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먹을 생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과 대리혼까지 마친 안을 낼름 빼앗아 와서 자신의 왕비로 삼아버렸다. 당시 막시밀리안의 딸인 마르가레테가 왕비가 되기 위하여 어린 나이부터 프랑스 궁정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샤를8세가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딸이 모두 닭쫒던 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치사하게 결혼한 안과의 사이에 살아남은 남성 후계자가 없었다. 이후 샤를8세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12세는 선왕의 왕비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딸이 클로드이다. 부모는 총 9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것은 클로드와 막내 여동생인 르네뿐이다. 프랑스의 공주이자 어머니의 후계자로 브르타뉴 공국까지 가지고, 왕비가 된 클로드로 권력을 누릴만 했지만 대단하신 시어머니 샤보이의 루이즈와 시누이인 나바르의 왕비 마르그리트에게 밀려서 영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헨리8세의 두번쨰 왕비이자 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어머니가 되는 앤 블린이 그녀의 시녀로 프랑스 궁정에 있기도 했었다.[8] 2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는데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고 총 7명의 자녀를 낳았다.
클로드의 자녀
- 루이즈(딸) : 신성로아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약혼을 하지만 3살의 나이로 사망
- 샤를로트(딸) : 언니가 사망한 이후 역시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약혼을 하하지만 9살의 나이로 사망
- 프랑수아(아들) : 어머니가 상속받은 브르타뉴를 상속받지만 결혼도, 자녀도 없이 19살의 나이로 사망. 아버지가 객기부리는 바람에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5세에게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프랑수아가 돌아가는 조건으로 아들들을 잡아둔다. 이때 프랑수아와 동생 앙리가 카를5세에게 끌려갔었다. 영국의 메리1세와 혼담이 있었지만 결혼은 안함.
- 앙리 2세(아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됨. 이탈리아의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 결혼을 함. 본디 상인가문이라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좀 딸렸는데 위로 형이 있어서 왕비가 될 줄 모르고 왕자의 아내일 줄 알고 들였는데 왕비가 됨.
- 마들렌(딸) : 스코틀랜드의 제임스5세와 결혼하였다. 마들렌이 자녀 없이 17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제임스5세는 역시나 프랑스 출신의 2번째 왕비를 들이는데 그녀가 마리 드 기즈로 마리의 딸은 엘리자베스1세에게 감금되었다가 목잘려 죽은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이다.
- 샤를(아들) : 오를레앙 공작위를 받았다. 자녀 없이 2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마르가레테(딸) : 샤보이 공작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 함. 아들 1명 낳음.
2.2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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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의 두번째 왕비. 합스부르크 가문의 딸로 턱이 특별히 아름답다. 미남왕 필립과 그의 부인인 카스티야의 여왕 후아나 사이에 태어난 첫번째 딸이다. 어머니인 후아나는 아버지 필립이 사망한 이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형제들은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모인 마르가레테[9]에게서 양육을 받게 된다. 엘레오노르는 두 번이나 이모부였던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1세의 세번째 부인이 되는데, 그 사이에서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딸인 인판타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고 50대에 사망한다.[10] 첫번째 남편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20대 초반의 엘레오노르는 다시 남동생인 카를5세가 있는 궁정으로 딸과 함께 돌아오게 된다. 황제의 큰누나인 엘레오노르는 좋은 정략 결혼 상대였기 때문에 카를5세는 간을 봤고, 결국 10년 후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마드리에 잡혀와 있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1세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프랑수아의 어머니인 샤보이의 루이즈와 어린시절 프랑스 왕실에서 미래의 왕비로 지냈던 엘레오노르의 고모인 마르가레테[11] 의 협약으로 혼인이 결정되었고, 이것을 귀부인들의 협약이라고 한다.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딸을 두고 프랑스로 가게 되는데 자존심이 강했던 프랑수아는 굴욕적인 혼인에 매우 기분이 상했고 결혼 생활 내내 왕비를 푸대접한다.[12] 하지만 왕비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하며 의붓아들인 앙리2세와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결혼에도 참석을 했었다고 한다. 결국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고 프랑스의 궁정에서 후계자가 없는 왕비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외롭게 살다가 남편 프랑수아가 사망한 이후 다시 동생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후 어린시절 두고온 딸 인판타 마리아에게 함께 살자고 했지만 어머니 없이 오래살았던 딸은 어머니와 동거 하기를 거부했고 딸을 만나고 오는길에 사망하게 된다.
- ↑ 실은 사위가 못마땅했던 루이 12세가 군무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엄격함을 체득해 보라고 국경지대의 군부대로 보낸 것이지만, 도리어 군대에서 방탕함을 배운 것이다.
- ↑ 그 후 카를 5세의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둘을 볼모로 보낸 조건으로 프랑스로 돌아온 후 프랑스와 스페인은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두 아들들을 돌려받고 ,카를 5세가 부르고뉴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소유지와 아르투아 지방,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또한 배상금 200만크라운을 지불했는데 1차분으로 넘긴 120만크라운을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배상금으로 스페인은 금화로 넘친 반면 프랑스는 초긴축 기조를 강요 받았다..
- ↑ 여담으로 이 캉브레 조약은 마담들의 평화라는 이명으로 불리는데 프랑수아의 어머니 사보이의 루이즈와 카를5세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그리트가 협상을 벌였기 때문이다.
- ↑ 사실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던 신성로마제국 역시 동맹까지는 아니지만 사파비 왕조와 나름대로 접촉하며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 했다.
- ↑ 헨리8세의 여동생으로 당시 유럽에서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며, 이후 신하인 찰스 브래든과 결혼해서 예쁜 여동생을 결혼시장에서 써먹으려던 오빠를 분노하게 한다
- ↑ 괜히 왕비와 추문이 나서 왕위고 뭐고 날아갈까봐...
- ↑ 어머니에게는 3번째 남편
- ↑ 당시 프랑스는 유럽 문화의 최첨단이고 영국은 불모지였는데 프랑스에서 세련된 매너를 배워간 앤 블린의 인기가 대단했다나 뭐라나...
- ↑ 이 고모는 위에 나왔던 샤를8세와 약혼 했던 그 마르가레테이다. 닭쫒던 개
- ↑ 인판타 마리아는 혼인적령기 당시 가장 부유한 신부였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결혼은 하지 않았다
- ↑ 역시나 위에 말했던 닭쫒던 개
- ↑ 왕비가 처음 궁으로 오는날 애첩이랑 테라스에서 히히덕 거리면서 본다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