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회스

나치 독일의 부총통에 대해서는 루돌프 헤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원.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의 책임자이다.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루돌프 헤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2 어린시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직자의 길을 접는데 회스 본인 주장에 따르면 13세때 김나지움에서 친구를 계단에서 밀어 다치게한 일은 신부에게 고백했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회스에게 벌을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스는 고해 신부가 고해성사를 자기 아버지에게 일렀다고 생각하고 신부가 되기로 한 마음을 접는다.(출처 루돌프 회스, 고백록) 그 뒤 성직자가 되기를 요구하던 아버지마저 14세때 돌아가시면서 성직자의 길을 완전히 접는다.

3 1차대전

1차대전이 벌어지자 아직 미성년자였던 회스는 만하임에서 적십자 보조원으로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한다. 여기서 본인도 부상병의 고통에 충격을 먹었다고 본인이 직접밝혔는데 무슨약을 빨았는지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때 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당연히 미성년자 나부랭이가 전쟁터에 가는 것에 회스의 어머니는 물론 주변 어른들도 모조리 반대했고, 병영기차에 몰래 탔다가 헌병에게 들켜서 집으로 보내진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다 결국 1916년 15세의 나이에 어떤 기병대위 덕에 21 용기병 연대에 입대한다.

이후 회스는 오스만 투르크 전선에 배치되어 이스탄불과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싸운다. 1917년에 회스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회스는 그럭저럭 생존해서 17세의 나이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부사관이 된다.처음 서부전선에 들어갔으면 정신좀 차렸으려나 그렇게 기병 소대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다마스쿠스에서 종전을 맞고, 독일에 돌아온다.

4 정치깡패 시절

독일에 돌아온 직후 큰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가출, 이후 북 독일에서 자신들을 의용군으로 부르던 정치 깡패집단에서 활동한다. 회스가 쓴 이력서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 프로이센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로스바흐(Roßbach) 의용군에 들어가 이후 메르렌부르크, 루트, 률리지엔 등지를 돌아다니며 국경경비 및 의용활동이라 자칭하면서 조폭 짓거리를 벌인다.(출처: 루돌프 회스, 1936년 6월 19일 다하우 SS 인사부에 제출한 이력서 중) 그리고 그 와중에 1822년 11월 뮌헨에서 어느 전직 상병 나부랭이의 연설을 듣고 그 인간이 있던 작고 똘기넘치는 단체에 가입을 한다. 당시 회스의 입당 번호 3240번으로 나치당에 입당한다.

회스는 조폭짓을 하면서 비밀재판(vehmgericht)이라 불리는 린치 활동을 많이 벌였는데, 한번은 파르힘 지방에서 어떤 증인을 살해한다. 그 증인은 알버트 슐라게터(Albert Schlageter)라는 독일 테러범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준 증인으로, 슐라게터는 당시 프랑스가 점령했던 루트 지역에서 테러를 벌여서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는 상황이었는데, 회스와 그 일당은 해당 증인을 독일의 배반자라는 이유를 붙여서 비밀재판을 통해 살해한다. 그리고 이 살인사건이 알려지면서 1923년 6월 28일 체포된다. 그리고 재판 과정중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자신은 해방되거나 가벼운 형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것 때문인지 사람을 살해해놓고는 겨우 징역 10년이라는 로또급 형량을 받는다.(물론 회스는 회고록에서 이런 형량에도 징징거리고 있다) 거기에 덤으로 1928년 7월 14일에 대사면이 발표되면서 겨우 5년만에 감옥에서 석방된다

  • 여담으로 회스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살인사건의 주범이 아니였지만 슐라게터의 우정과 동료가 무죄로 풀려나게 해주려고 으리 있게 죄를 대신 뒤집어 썻다고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그 다음 문단에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서 피해자를 살해 했다고 아주 주범이라고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5 SS와 수용소 근무

출소한 회스는 출소한 뒤에는 농업지원청년운동이라는 단체에 가입하고 얼마뒤에는 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지는 등 평범한 삶을 산다. 그러던 중 1933년 9월 SS에 가입한다. 후보자로 있다가 1934년 4월 1일 정식 SS 돌격대원이 된다. 그리고 힘러의 요청으로 1934년 11월 부터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회스 본인은 회고록에서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반인륜적 처벌을 혐오하고 피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수용소장이던 로리츠는 힘러에게 회스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그덕인지 SS 병사였던 회스는 단 2년만에 SS 장교계급인 Untersturmführer까지 진급한다. 반인륜 범죄를 회피했다고 보기에는 이 진급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 회스의 회고록에는 1934년 6월에 히믈러가 직접 찾아와 슈츠슈타펠에 가입을 요청했고 자신은 순진한 군사조직 같은거라 여기고 가입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SS기록에 따르면 회스는 이미 1933년 9월 20일에 SS에 후보자(Anwärter)로 가입해서 1934년 4월 1일에는 정식계급인 Mann 계급을 같은 달 20일에는 Sturmmann까지 진급한다. 거기에 체포된 이후 1946년 3월 14일 영국군 담당관에게 진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회스는29년 부터 34년까지 포메른에서 농업관련 기구에서 일하고 있었고 SS를 위한 기병대 조직을 만들던 중 그 지역을 담당하던 힘러의 관심을 사서 거기서 강제수용소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공식기록을 생각해보면 후자가 더 신빙성이 높다.

이후 1938년 8월 1일부터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부소장으로 근무한다.

6 아우슈비츠

1940년 5월 회스는 아우슈비츠의 신실되는 강제수용소 완성후에는 비르케나우라 불리는 수용소의 소장을 맡게 된다. 여기서 회스는 소련군 포로를 혹사시켜서 수용소를 짓는데 식량과 보급품이 모자라서 1만명이 넘는 포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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