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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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州旗)주장(州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 위치
국가독일
시간대(UTC+1/+2)
주도(州都)슈베린

1 개요

Land Mecklenburg-Vorpommern,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독일 동북부에 자리 잡은 주로, 역사상으로는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른 별개의 두 지역이었으나 2차 대전 이후 포메른 주의 영토가 베를린의 항구 기능을 담당했던 최대 도시인 슈체친을 포함하여 대부분 폴란드로 넘어가면서, 독일에 남아 있는 포메른 주 영역과 브란덴부르크 북부 일부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었다.[1] 주도는 슈베린(Schwerin)이나 최대 도시는 로스토크(Rostock)이다. 동독이 세워진 뒤인 1952년에는 동독 측의 행정구역 개편 작업에 따라 6개 구로 해체되었으나, 독일 통일 후인 1990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름이 긴 탓인지 보통 앞 글자를 따서 MV라고 부르거나 Meckpomm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2 역사

전통적으로 분리되어있던 지역인 만큼,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른 지역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2.1 메클렌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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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 문장

12세기 무렵까지는 슬라브족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었지만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에 의해 점령된 이후 기독교 전파 및 게르만족이주에 힘입어 서서히 게르만화가 이루어진다. 이 지역에 살던 슬라브 부족인 아보드리텐의 부족장 니클롯(Niklot)은 30년동안이나 저항하기도 했다. 니클롯이 죽고 그의 아들 프리비슬라브(Pribislav)는 결국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인리히의 제후가 되는 것에 동의하면서 메클렌부르크의 영주가 되었다.

비스마르는 1229년에 처음으로 도시 지위를 얻은 후 1301년에 메클렌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뤼베크나 로스토크와 연합하며 메클렌부르크 영주와 힘다루기를 했고 한자 동맹에도 가입한다.

메클렌부르크는 1347년에 공작위로 승급되었다. 17세기 30년 전쟁이 끝난 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북부 영토 일부가 스웨덴에 귀속되기도 했다. 1701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과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국으로 양분되었으며 18세기에 귀스트로 공국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재편성된다.

1815년 빈 회의를 통하여 양 공국은 모두 대공국으로 지위가 상승했으며 최소한의 자치권은 유지한 채로 북독일 연방독일 제국에 편입된다. 다만 척박한 토지와 중세적 봉건 구조가 잔재[2] 한 관계로 독일 제국 시기 제국 안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였다.[3]

두 공국은 1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다른 제국 내 왕/공국과 마찬가지로 폐지된 채 공화정으로 변신하고, 여전히 분리된 채로 주의 하나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한다.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1934년 나치에 의해서이다. 이후 2차대전의 패배와 더불어 소련군이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하게 된다.[4]

2.2 포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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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메른 문장

포메른 지역에는 원래 포메른 족[5]이라는 민족이 고대부터 거주하고 있었다. 12세기 게르만족의 정복/이주 및 기독교 전파로 이 지역에도 게르만화가 이루어지고 원주민이었던 포메른 족은 게르만 족에게 흡수된다.

독일화된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했으나, 폴란드 왕가의 후예인 그리핀스(Griffins, 독일어 Greifen/폴란드어 Gryfici) 공작들이 다스리는 포메른 공국이었다. 보기스와프 14세(Bogislaw XIV)는 여럿으로 나뉘어진 포메른 공국을 통일했으나,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1637년에 죽었다. 그러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포어포메른은 스웨덴에, 힌터포메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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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의 포메른 지도. 주황색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하늘색이 스웨덴령.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후신인 프로이센 왕국은 스웨덴으로부터 1720년 슈테틴 지역을, 마지막으로 1815년에는 슈트랄준트와 뤼겐 지역을 흡수하여 같은 해 포메른 주(Provinz Pommern)를 설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독일에 남아있는 포메른 지방은 독일의 모태인 프로이센이 가장 늦게 먹은 땅이다.

포메른 주 지역은 이미 확고한 독일 문화권으로 자리 잡았으나,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한 포메른 동부 지역은 중세를 거치면서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 밑의 자치국가인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에게 흡수되었고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 폴란드가 분할되면서 서프로이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방은 포젠 지역과 함께 폴란드인들이 여전히 다수로 남아 있어서, 독일인들은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독일화시켜 나가려고 시도했다. 가령 폴란드어를 사용 금지했으며, 폴란드 인이 믿는 가톨릭을 탄압했고 독일인들을 적극적으로 이 곳으로 이주 및 정착 시키려고 프로이센 정착위원회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노력하며 독일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민족적 대립이 커져 갔다. 이 지방은 훗날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포모제 주(Pomorskie Voivodeship: 포메른의 폴란드어 표현)'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며 포메른의 이름을 부활시킨다.

아무튼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포메른도 예외가 아니어서 슈체친을 중심으로 각종 공업 지대가 형성된다. 다만 그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은 여전히 융커 계층이 운영하는 농장지역이었기에 많은 포메른 주민들은 일거리를 찾아 베를린과 루르 지방의 공업지대, 또는 멀리 미대륙으로 이주해나간다.[6]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했지만 포메른 주(Provinz Pommern)는 털린 땅이 없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또다시 패배하고 포메른 지방은 소련군이 점령하게 된다. 한편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자신들이 점령한 옛 폴란드의 동부 지방 영토를 소련에 편입 시키는 대신에 독일의 동부 지방 영토를 폴란드에게 넘겨 주고 동프로이센과 더불어 포메른 지역의 대부분이 폴란드의 영토로 귀속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독일인들이 강제 추방 당하고 독일인들이 남긴 유산들이 파괴된 것은 물론이다.

2.3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른의 통합 이후

소련군 측은 종전 직후인 1945년 7월 메클렌부르크와 독일에 남아 있었던 포메른, 브란덴부르크 북부 일부[7]를 하나로 합쳐 메클렌부르크-포메른 주를 신설했다. 포메른 주의 대부분이 폴란드에게 넘어가 사실상 하나의 주로 자리잡기에는 규모가 작았다. 1952년 동독 정권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모든 주가 사라졌다. 이후 1990년 독일의 재통일 이후에야 메클렌부르크-포메른 주는 다시 등장하게 된다.

현재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기는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른 그리고 브란덴부르크의 문장을 합친 것이다.

3 사회

3.1 정치

통일 초기에는 기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통일 이후 등장한 각종 부작용에 따른 헬무트 콜 내각에 대한 실망 탓으로 최근에는 사민당이 1998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주 정부에서 여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쥘비아 브렛슈나이더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주의회 의장으로 활동 중이다.[8] 또한 구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좌파당도 만만찮은 지지를 보여주고 있다. 통상 사민당이 40% 정도의 지지를 획득하며 기민당이 20% 초반, 좌파당이 10% 후반의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앙겔라 메르켈 현 독일 총리의 지역구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는 작센주와 함께 최근 NPD이 지지율이 높은 지역이다. 2006년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회 선거에서 7.3%의 득표율로 의석 6개를 얻어 처음으로 원내 진입 하였으며, 2011년 주 선거에서는 6% 지지율을 얻어 5개 석을 얻어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가 다른 독일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낙후된 느낌이 있긴 하지만, 발전이 특히 더 디딘 동부 포어포메른 지역에서 NPD 지지율이 높다. 주 의회에 입성한 NPD 의원들도 모두 이 쪽에서 당선된 자들. 슈트랄준트나 뤼겐 섬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NPD 지지자들 때문에 내외국인들의 기피 지역이 되는 바람에 관광업에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NPD도 60년대엔 서독의 경제 취약지역에서 반짝 지지율로 7~10% 지지율로 주 의회에 입성했던 적이 몇 번 있었으나, 2기도 채 넘기지 못하고 아웃오브안중이 되었고 통일 후 동독의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절차를 밟았다. 다만 AfD의 부상으로 극우 표가 분산되었으나 최신(16년 4월) 여론조사에서도 NPD 지지율이 4% 정도 나오고 있어서 찝찝하긴 하다. 지지율 4%면 의석 획득선 아래지만 그렇다고 의석 획득이 불가능하다 단정지을 수 있을 정도도 아니기에...

참고로 독일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에겐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가 어느 정도 악명이 있는 것이, 1992년에 벌어졌던 로스토크 해바라기 아파트 사건 때문이다. 주로 베트남 이주민들이 살던 해바라기 아파트에 극우주의자들 수백명이 몰려가 지역 주민의 방관 및 응원 하에 방화한 사건으로, 다행히 거주민 중 아무도 죽거나 다치진 않았지만, 독일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체포된 370여명 중 1년 금고형을 받은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10대 후반이라 10여명만 가벼운 벌금형을 받고 나머지는 다 풀려났다.

3.2 경제

독일 내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다. 원래도 별다른 산업 지구가 없었던 곳인데 공산주의 정권 40년과 통일의 부작용을 겪으면서 완전히 황폐화됐다. 인구 밀도도 독일 내에서 가장 낮은 반면 실업률은 2012년 기준으로 11% 정도로 독일 내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이다.[9] 무서운 것은 이것이 최근 15년 동안 가장 낮은 수치라는 것(...)[10] 최근에는 정부 차원에서 각종 ITBT 산업을 이 곳에 유치시켜 주면서 서서히 경제가 성장하고 있기는 하다. 다만 현재까지는 공업보다는 발트해라는 지리 조건을 이용한 관광업이 주된 돈벌이 수단이다. 주민들의 75%가 서비스업을 직장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이니..

물가는 독일의 타 지역보다 좀 싼 느낌이 있다. 식당만 가도 체감 가능.

3.3 언어

전통적으로 저지 독일어의 영역에 들어가는 곳이었지만 2차 대전 후 소련군을 피해서 온 피난민과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등지에서 쫓겨난 추방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사투리는 상당부분 사라지고 표준 독일어가 우세를 점하고 있다.[11]

과거 슬라브족들이 살던 땅이였던 탓에 지명에는 여전히 슬라브 어원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 가령 슈베린(Schwerin)은 폴라비아어[12]에서 장소를 뜻하는 어미 -in과 동물(가축 또는 말)이 많다는 뜻의 zver가 합쳐진 단어에서 유례하였다. Zverin->Swerin->Schwerin이 된 것.[13] 그 외에도 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아 이 지역 지명의 모음 뒤에 오는 w는 장음을 뜻한다. 가령 귀스트로(Güstrow)는 귀스트로프로 읽는 게 아니라 귀스트로- 이다.

3.4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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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린 성

통일 이후 이 곳의 지역 공영 방송은 북독일방송(NDR)에서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니더작센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와 함께 저지독일/북독일 문화권적 동일성은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과거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지역도 있고 독일인들이 진출하기 전에는 슬라브 족들의 땅이었기 때문에 지명에서도 슬라브 어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이다.

위의 외국인 혐오와 관련된 몇몇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 지역에도 볼거리는 매우 많다. 하지만 아직은 대외적으로 널리 홍보하지 못해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은 이미 널리 유명한 슈베린과 비스마르, 로스토크, 귀스트로, 슈트랄준트 정도. 대부분은 독일인 관광객들이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은 역사 및 문화 유적을 중점으로 여행을 해도 좋으며, 발트해 연안에 펼쳐진 해변과 유명 리조트들에서 장기 숙박을 하며 해수욕, 낚시 등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북쪽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라 불리는 슈베린 성이다.[14] 본래 메클렌부르크 대공작이 살던 성으로 원래는 방어 목적으로 973년 슈베린 호수에 있는 섬에 위에 지어졌다. 이후 증축과 여러 르네상스 및 바로크 개축을 거쳐 지금의 로맨틱 양식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독 시절 때 관리가 영 안되었던 걸 통일 이후 복원을 하였고 지금도 일부 복원 작업 중. 성 자체도 매우 특출나지만, 넓직한 정원과 호수를 비롯한 주변 경관도 매우 아름답다. 현재는 성의 일부가 주 의회의 의사당으로 쓰이고 일부는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어있다. 메클렌부르크 대공작과 그 가족들이 살던 방들과 왕좌실도 관람 가능.

슈베린 성 정문 바로 앞 다리 건너에는 17, 18세기 10만여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주립 박물관이 있다. 본래 1882년 프레데릭 프란시스 3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 설립한 것으로, 지금은 슈베린 성, 루트비히스루스트 궁, 귀스트로 성과 주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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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 시내

비스마르와 로스토크, 슈트랄준트는 한자동맹 시대부터 유명한 항구 도시이다. 비스마르와 슈트랄준트는 구시가지 시내의 정비와 관리가 잘되어있고, 특히 비스마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로스토크는 공업화가 많이 이루어졌던 도시라 2차세계대전 때 폭격을 심하게 받아 역사적 의미의 구시가지는 일부밖에 보존되지 못하였다.

귀스트로는메클렌부르크 공작령이 두 지역으로 분할 되는 과정에서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작령의 수도가 되었다. 그 당시에 공작의 궁전으로 쓰인 귀스트로 성 규모가 상당히 크다. 북독일의 바로크-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과 넓직한 정원이 인상적.

슈베린 남쪽 30km에 위치한 루트비히스루스트는 18세기 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이 잠시 천도를 했던 곳으로, 공작이 살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의 루트비히스루스트 궁전이 위치해있다. 본래 매우 조그만 다른 이름의 마을이였으나 천도와 함께 계획적으로 도시를 설계하고 짓기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루트비히스루스트 궁은 2016년 현재 대대적인 내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나 복원된 일부 방과 화려한 연회홀은 입장하여 관람할 수 있다.

슈베린과 비스마르는 함부르크 광역권으로 분류될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 때문에 여행을 할 계획이라면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녀와도 충분하다. 그 외의 지역은 로스토크를 거점으로 삼던가, 함부르크에서 로스트크를 거쳐 베를린으로 간다는 계획으로 여행하며 거쳐갈 수도 있다.

3.5 종교

대다수 구 동독 지역들이 그렇듯이 공산 정권의 영향으로 주민들 다수가 무종교이다. 통계에 따르면 주민들 중 80%가 무교이며 대략 17%가 개신교[15], 3%는 가톨릭 신자.

4 여담

발트해와 마주하고 있어서 각종 휴양지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휴양 도시인 위커뮌데는 베를린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1. 일단 이 곳 주민들은 자신의 출신에 따라 메클렌부르크면 메클렌부르크, 포메른이면 포메른이라고 잘라서 말하지 절대 두 지역을 합쳐서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2. 가령 20세기 초반까지도 이곳 농민들에게는 거주 이전 및 결혼의 자유가 없었다고 한다. 거주 이전 및 결혼을 하려면 영주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다고(...)
  3. 사실 지금도 독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4. 종전 당시에는 서방측이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했으나 포츠담 회담의 합의 사항에 따라 소련군에게 이 지역을 인계했다.
  5. 보통 슬라브족의 한 계열로 추측된다.
  6. 전후 폴란드 땅이 되면서 사실상 소멸한 포메른 방언이, 브라질로 이민간 독일인의 후예들 일부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
  7. 가령 노이브란덴부르크라는 도시는 브란덴부르크가 아닌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에 있다.
  8. NPD 소속의 한 의원이 연설을 한답시고 증오 발언을 일삼자 입닥치라며 강제로 내려가게 만든 여장부
  9. 참고로 2012년 독일 전체의 실업률은 5.3~5.5%였으며, 잘사는 바이에른 등지의 실업률은 3%대였다.
  10. 실제로 독일 경제가 최악의 불황을 겪던 2000년대 초반에는 20%를 넘기도 했다.(...)
  11. 사실 이는 단순히 이 지역뿐만이 아니라 독일 대다수 지역이 2차 대전 전후로 피난 및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한 외부민 유입으로 인해 겪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바이에른 지역을 빼면 사투리를 잘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 드물 정도.
  12. 슬라브어족의 일파.
  13. 참고로 베를린도 슬라브어에서 왔다. 호수가 많다는 뜻의 Brlo와 어미 -in이 합쳐져서 변형된 지명. 곰을 뜻하는 독일어 Bär와는 관계도 없지만 후세에 발음이 같게 들리니 자연스레 곰이 베를린의 상징이 되었다.
  14. 물론 이런 별명은 현대에 붙어진 것이다. 슈베린 성은 실제로 10세기 이후로 공작 가문 대대로 거주하고 통치하던 성이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9세기에 무리하게 과시용으로 짓다가 완공도 못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백조의 성이 매우 유명해졌고 슈베린 성은 통일 후 뒤늦게 세계에 다시 알리려다보니 이런식으로 불리는 것. 역사와 미술사적으로 본다면야 슈베린 성이 더 으뜸이다.
  15. 개신교 중에서도 루터교가 다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