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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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1]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2]한글[3]
영어[4]
프랑스어[5]
국가·위치폴란드 오시비엥침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79년
등재기준(vi)[6]
지정번호31
파일:Attachment/aus-6.jpg
Arbeit[7] macht Frei-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직역: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 제1아우슈비츠 정문의 표어

1 개요

Das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KZ Auschwitz)

나치 독일의 악행과 홀로코스트를 대표하는 상징물.
생지옥

독일어로 아우슈비츠(Auschwitz). 폴란드어 지명은 오시비엥침(Oświęcim).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지만, 1919년 이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폴란드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이지만, 홀로코스트를 수행한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유명하다.[8]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네스코가 등재한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즉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브제진카(Oświęcim-Brzezinka)) 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전쟁 당시에는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사이에는 건물 한 채 없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은 아우슈비츠 말고도 폴란드에 트레블린카(Treblinka), 바르샤바(Warszawa), 베우제츠(Bełżec), 헤움노(Chełmno),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or) 수용소 등을, 독일 본토에 부헨발트(Buchenwald), 다하우(Dachau), 베르겐-벨젠(Bergen-Belsen), 그로스-로젠(Gross-Rosen) 플로센뷔르크(Flossenbürg), 마우트하우젠-구젠(Mauthausen-Gusen),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수용소 등을 세웠다. 위의 예시들 외에도 나치 독일은 독일 전역 및 점령국 곳곳에 수많은 수용소들을 세웠다.

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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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지도 노란색 부분이 수용소 부지, 보라색이 공장과 SS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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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마인크래프트로 복원한(!) 조감도
위 지도 왼쪽의 커다란 노란색 부분으로. 현재는 정문과 철로만 남아있다.

1940년 4월 27일 하인리히 힘러의 유대인 학살 명령 아래 SS가 첫 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제1아우슈비츠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1941년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아우슈비츠는 절멸수용소로 개조, 확장이 결정된다. 제2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가 만들어진다. 이때 바르바로사 작전때 잡힌 소련군 포로로 비르케나우를 건설했는데 식량이고 보급품이고 모두 모자라서 굶어죽는건 다반사고 인육으로 생존해야 할정도로 처절한 상황이었다. 결국 41년 부터 42년 까지 비르케나우를 짓는 동안 1만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는 겨우 수백명이 살아남았다.(출처:루돌프 회스, 회스의 고백록)

전쟁이 지속되자 이게파르벤[9]는 이곳에 화학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이를 위해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가 건설된다. 이게파르벤은 독일의 전쟁수행을 적극 도왔던 전범기업이다. 전후 합병전의 6개사[10]로 다시 해체되었고 당연히 이 회사들에게는 흑역사이다.

수용소마다 수감인원과 구조가 조금씩 달랐다. 우리가 잘 아는 살인공장은 제2 수용소(비르케나우)로, 이곳에는 여성과 노인등 노동능력이 떨어저 곧 제거될 인원으로 충당되었고, 때문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시체처리실이 가장 컸다. 상대적으로 노동능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1, 3, 수용소에서 수용 후 강제노역을 통해서 서서히 말려 죽여갔다(물론 제1수용소에도 가스실은 있었다).

화학공장이라 유독 화학품에 대한 위험이 높았으나 여기에 대한 안전장치는 전무해서, 노출된 많은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 과정에서 사망했다. 애초에 생존 가능성이 0%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생산이 돌아가던 굴라그와는 달리 노동 의욕이 매우 낮아 생산성이 아주 낮았다고 한다.

수용소 건립 초기에는 SS 각 사단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직접 교도관 등의 역할을 위해 근무했으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젊은 장병들의 숫자가 부족해지자 이들은 대부분 일선으로 보내지고 독일 국방군육군공군(루프트바페)에서 주로 3~50대의 중장년층 예비역들을 파견받아와 투입했다.

2.1 기차역

독일 점령지와 추축국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들은 처음에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기차역으로 모두 모여서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을 나눈 후, 다시 군의관이 약식으로 성인 남녀 중 노동 가능/불가능자를 나눈다.[11] 이때 구분 기준은 지멋대로라 수용소의 남은 자리에 따라, 가끔은 정리하는 놈의 기분에 따라서 지멋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분류 작업을 거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수용소에 남는 자리가 없으니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분류 작업은 SS 군의관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분류 작업은 Sonderkommando(특수직무반)라 불리는 남성 유대인 수감자들이 담당했다.

이렇게 노동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들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이 불가능한 성인들은 정리 후 즉시 가스실로 직행하게 된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등록되지 않은 희생자수를 집계하는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차역에서 어린이 몇 명을 데려가 특별대우해주는 SS가 1명 있었는데, 다른 수용인들이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SS는 희대의 인간쓰레기 요제프 멩겔레 박사로, 이렇게 선별된 멩겔레의 아이들은 상당수가 인체실험으로 끔살당했다.

Auschwitz-tattoo.jpg
이 분류 과정이 끝나야만 비로소 등록의 과정을 거친다. 수감자들의 사진을 찍고[12] 개인 수감번호를 부여하는데, 대부분의 유대인 수용소를 포함한 수용소는 수감번호는 옷에 새겨넣는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수감자의 왼팔뚝에 숫자 문신을 새기게끔 했다. 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새 수감자와 아픈자, 죽은 자의 신원을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 1942년에 시범 도입되었으며, 다음해인 1943년에는 도입 이전 수감된 인원과 여성 수감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일련번호 문신을 부여했다. 유대인의 경우 일련번호 아래 역삼각 도형이 추가로 새겨졌다.

2.2 정문

제1수용소 입구의 유명한 표어인 '노동이 자유를 가져온다(Arbeit macht Frei. 직역하면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는 수용소장 회스 중령의 좌우명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이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 말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다른 의미로의 자유. 수감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기는커녕 강제노동을 하다가 허약해지면 가스실에서 학살당하고 시신은 화장터에서 소각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정문을 자세히 보면 ARBEIT(노동) 중 유독 B가 이상하게 거꾸로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이 표어를 만들던 사람들의 최대한의 저항이었다고 한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현실은 반대다." 즉 "거꾸로다" 라는 의미로 뒤집어 붙였다고 한다.

원래 이 말 자체는 독일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평범한 격언이였다. 1872년에 로렌츠 디펜바흐라는 사람이 소설 제목으로 쓴 것을 시작으로 독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1차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공사업 슬로건으로 내걸 정도로 대중화된 격언이였다. 하지만 골수 나치인 회스 중령이 나치즘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의 정문에 박아 넣는 바람에 대우가 비참해진 말이다. 덕분에 독일에서는 이 말 자체가 금기시된다. 실제로 독일에서 방송 도중 한 여성 아나운서가 시청자에게 이 말을 했다가, 방송이 바로 중지되고 아나운서는 퇴출됐다.

여담으로 2009년에는 저 문을 고물상에 팔겠다고 (…) 한밤중에 싸그리 떼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후로 표어 부분은 레플리카로 교체했다고.

2.3 가스실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치클론 B를 이용한 처형 실험 직후 회스 중령의 고백록-

아우슈비츠 11번 구역 사진

최초의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 살해도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는데,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치클론 B를 투약했다.(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었고 미친 나치들은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값에 살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날뛰었다. 이후 실험을 했던 11번 구역은 몇가지 개조를 거친 뒤 가스실로 사용했지만 규모가 작아서 대량학살을 원했던 나치들은 1942년 부터 비르케나우에 빨간집이라 불리는 벙커 1과 하얀집으로 불리던 벙커 2에서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에 나치는 기존에 있던 2번 화장장(Crematorium 2)를 개조해서 가스실로 활용했고 단 반년만에 비슷한 구조의 가스실을 3개 더 만들어 이곳에서 대량학살을 벌였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작은 공장처럼 생겼고 지하에는 샤워실처럼 꾸며진 가스실이 있었다. 나치는 가스실을 샤워실처럼 꾸미고 희생자들에게 지금부터 샤워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스스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치는 철저할 정도로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했는데, 수감자들의 죄수복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누군가 죽으면 그 죄수복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 신규 입소자에게 지급되었다. 배기가스로 죽이던 처음에는 일일히 수용소 기간병들이나 카포들이 옷을 벗겼지만, 알다시피 이건 대단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다. 그런데 희생양이 스스로 죄수복을 벗고 잘 개켜서 한 곳에 모아준다면? 매우 효율적이고 일사천리로 작업은 진행될 것이다. 나치의 썩은 아이디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이 썩은 아이디어는 게토에서 이주시킬 때 모든 짐을 싸들고 나오게 만들어 수거하는 과정에서도 써먹었다. 이렇게 하면 굳이 남은 물건 수집하러 게토를 뒤질 필요가 없다. 게토 소개시 짐을 싸게 한 다음 가방에 이름을 쓰게 했고, 그 짐들은 별도의 열차로 옮길 테니 두고 가라고 한 다음, 카포들을 시켜 분류해 털어갔다. 의류의 경우 전시 경제 체제로 인해 의류 공급에 제약을 받던 민간인들을 위한 중고 의류 수요를 채우거나, 개조 등을 통해 군용 피복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탈의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면 고체 치클론B를 굴뚝을 통해 주입해서 살해했는데, 농도와 인원에 따라 5분에서 30분정도 걸렸다고… 증언에 따르면 시체는 주로 유일한 탈출구인 문 앞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위에는 힘센 남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팔이 탈구되어 자기 키만큼 팔이 늘어난 시체도 있었다'에서는 말한다. 살갗이 그만큼 늘어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너무 끔찍해서 더 이상의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듯 하다

학살이 끝난 후 당연하게도 유대인들의 시체를 독일인이 만지기는 싫었으므로 뒤처리는 위에서 언급된 유대인 특수직무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 시신은 머리카락과 금니 같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뺀 후 처리했는데, 처음에는 매장했으나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은폐하기 위해 소각로에 넣어 화장했다. 일부 매장된 시신도 결국 다시 파내어 소각하는 경우가 많았다.[13] 그나마도 화덕으로 화장을 하는 방법은 나치가 그나마 덜 죽일때 이야기이고 전쟁 말기에 이탈리아와 헝가리 유태인을 대량학살할 때는 화덕이 모자라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넣어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 전쟁 후반기에는 독일의 친구들인 헝가리이탈리아에서 대량의 유대인들이 잡혀왔는데 특히 헝가리는 1944년까지 유대인 학살을 하지 않았고, 같은 추축국이라 전쟁중인 소련이나 영국으로 탈출하는것 보다는 수십배는 탈출하기 쉬워서 많은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탈출했지만 없는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쫓겨나고 골수 나치빠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한 44년 부터는 헝가리도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이렇게 잡혀온 헝가리 유대인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영화. 결국 아우슈비츠의 수용인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실려들어왔고,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 상황에 수용소를 운영할 물적, 심적 여유가 부족했던 나치는 거의 대부분의 입소자를 바로바로 처리했다. 이를 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거대한 규모의 샤워실을 빙자한 가스실이 여러개 증축되었으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도 전쟁 초반에는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14]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고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립되어 독일군이 진주한 이후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바로 이 일을 소재로 한 영화다.

3 수용대상

이 수용소에서는 유대인만 수용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폴란드인, 집시, 러시아인, 프랑스인, 체코인, 네덜란드인 등 독일로부터 미개 인종으로 분류된 약 30여 개국 인종이 수용되었다. 또한 독일인 수용자도 상당수 있었는데 주로 범죄자, 나치에 반대하던 독일인, 정신장애인, 혼혈아[15],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등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순혈주의에서 낙오자라고 판단되는 독일인들이었다.[16] 심지어 본인은 전혀 숙청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가족을 위해 자진해서 이 지옥행을 자처한 위대한 가족애도 있었다. 어느 독일인 여성은 집시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남편과 자녀들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자 자진해서 함께 떠났다고 한다. SS들이 몇 번이나 그녀를 꺼내 주려고 하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부해서 소용이 없었고 결국 그녀는 가스실에서 자녀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그러므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만이 대상이었다는 부분은 왜곡이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유대인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피해자⊃유대인이란 말이다.[17].


특별 감시가 필요한 수감자[18]의 경우 위 표와 같은 삼각형 패치를 죄수복에 달고 다니게끔 했다. 현재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분홍색 역삼각형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인종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독일인들은 피수용자 중에서는 비교적 좋은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인 같은 경우에는 적십자에서 소포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비교적 좋은 처우' 의 예를 들자면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다카우 수용소의 일이긴 하지만) 독일인 수용자의 주검에서 가죽을 벗기는 것이 금지된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다른 인종들 중 깨끗한 등과 가슴을 가진 자, 특히 문신을 한 자는 독극물로 죽여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 친위대원들이 자기 장갑이나 실내화, 말 안장을 만들어 쓰거나 핸드백을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하거나 했다.[19]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친위대원은 가죽을 벗겨 악기를 만들기도 했다. 다만 사람가죽으로 만든 제품에 대한 내용은 설화 비슷하게 퍼져나간 경향성이 있다. 특히 전등갓이나 유대인 비누같이 나치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는 이야기들은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가 많다.

소련군이 접근하자 독일 측은 6만여 명의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끝내 이동시키지 못한 수용자들도 있었으며 6,00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20]

소련 측은 이 수용 시설을 접수 후 한동안 감옥으로 사용했다. 아주 운이 나쁜 사람들은 나치에게 수용당한 건물에서 스메르시(소련 방첩대)에게 심문 받은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3.1 존더코만도

아우슈비츠에는 유대인 수용자로 이루어진 학살 보조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특수직무반이라는 의미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라고 불렀다[21]. 존다코만도의 주요 업무는 희생자의 처리로 우리가 잘아는 시신처리같은 학살 보조 업무 그 외의 SS 업무 중 지들이 하기 싫은 업무를 해야했던 집단이다. 존다 코만도들은 시신처리라는 중노동을 해야했고, 이들이 저항을 했다가는 아우슈비츠 업무자체가 마비되는지라 SS는 약간의 혜택를 해주는데 그 혜택라는게 톱밥이 덜섞인 빵을 준다던가, 담배를 좀 더 많이준다든가, 혹은 의료품을 좀 더 주는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수명은 결코 길지 못했는데 나치는 지들이 벌이는 짓이 악행이라는 것은 인지했는지이런 악행을 그만 둬야한다는 대가리는 돌아가지 않고 이 존더코만도들이 나중에 학살을 증언하는 것을 막기위해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이들을 따로 학살했다. 때문에 900여명이나 편성되었던(출처:Concentration Camps in Nazi Germany: The New Histories , p.73) 존더코만도는 오히려 생존자가 매우 적어서 해방될때는 겨우 14명만 남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존더코만도가 되어서 처음하는 일은 가스실에서 전임자의 시신을 치우는 일이었다. (출처:Auschwitz: A Doctor's Eyewitness Account)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öss) SS 보병중령은 존다 코만도들 덕분에 유대인들의 저항이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 일례로 존다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이 처음 입소할 때 즉시 살해대상과 노동대상을 분류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설마 같은 유대인들이 우리를 죽이겠냐며 안심했다고...(출처 루돌프 회스: 고백록)

분명 이들도 피해자인데 SS의 일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피해자들에게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수용자였던 미클로스 니즐리(Miklos Nyiszli)의 저서에 존다코만도(Sonderkommando)를 두고 같은 유대인들이 희생당할때 자신들은 SS에 빌붙어 혜택을 누리는 일종의 배신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존다코만도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학살을 도운게 아니었다 그들이 이것을 피할 방법은 자살밖에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연민을 보였다가는 정리하는 쪽에서 정리당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2] 하지만 진실과 별개로 존다코만도들도 이런 시선과 죄책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뒤져서도 도움이 안되는 나치

3.2 식사와 보급품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것은 노동의 혹독함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영양공급의 부재였다. 보통 하루 800~1,200칼로리가 공급되었는데, 아우슈비츠에서의 노동강도를 생각하면 살아남기조차 힘든 수준.[23]

식사 메뉴는 톱밥을 섞어 구운 돌덩이 같은 [24], 수용소 근무자들의 식사를 만들고 남은 상한 야채로 끓인 묽은 국[25][26], 그리고 커피였다. 말이 커피지 아우슈비츠의 커피는 썩은 양배추 뿌리와 완전히 버려지는 야채 부산물을 불태운 잿가루로 만든 '가짜 커피'였다. 당연하게도 칼로리는 거의 제로인 발암물질 덩어리(!)인데, 독일 및 점령지 거주자들도 저거보단 양질의 재료(볶은 치거리 등)를 쓰긴 했지만 한약맛에 가까운 대용 커피를 마시던 시절이니 제대로 된 커피를 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몇개 언급된다. 그중 한 이야기에 따르면, 묽은 국을 배급받을 때는 배급하는 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만 국자를 밑바닥까지 내려서 퍼온 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저 상한 야채국의 건더기조차 제대로 못 먹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이런 식사를 해서는 살아남기가 힘들었다.[27] 이런 식사를 하며 몇 주만 지내도 건강에 치명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달도 버티지 못 했다. 죽기 전에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지만, 너무나도 약해진 건강 때문에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이동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매주 3개비의 담배를 지급했다.[28] 노동자들은 이를 모아 빵으로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 담배 3개비면 하루분의 빵과 같았고, 숟가락도 하루치 빵의 절반에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말 성격이 독한 수용자는 이걸 150개까지 모아서(!) 보드카 1병과 바꾸기도 했는데 보드카는 주로 카포나 군인들에게 줄 뇌물로 이용되었다.[29] 또한 카포와 군인들의 신발은 가죽제였지만 수감자들의 신발은 나무로 만들어진 나막신이었다.

3.3 앞잡이

하지만 일부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카포였다. 이들은 수용된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나치의 앞잡이.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4 희생자 수

희생자 수는 학자마다 논란이 가장 큰 부분으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기록말살과 시신소각을 지시했다. 다만 시중에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6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학살당했다는 주장은 과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다만 마이다메크 트레블린가 수용소 같은 곳이나 게토에서 학살당한 숫자의 총합이 6백만 명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처음 가스실 희생자는 매장했으나 이후 다시 화장했는데 이때 집계된 시신이 17만 구였다.

그나마 남은 나치의 기록상 아우슈비츠 수용자는 20만이지만 그보단 더 많은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사망한 사망자는 더 큰 논쟁인데,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처음엔 200만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100만명으로 수정 집계 했으며, 전쟁 후 소련은 300만명을, 2005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국립 박물관은 최대 130만 명 정도가 수용되어 그중 110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렇게 인원에 대해 지금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한 것은 이 수용소의 수용 구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자 등록 이전에 분류하는 과정에서 수십  %는 반드시 죽었고, 가끔은 기차역에 도착한 인원 전부를 학살해버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학살당한 인원은 애초에 집계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치가 부여한 식별번호의 숫자로 수용인원이나 희생자 숫자는 파악하기 어려울 듯하며, 모든 인원이 번호를 받았을거라는 보장도 없기에 수용한 인원 파악은 더더욱 어렵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인 편차가 나오는 실정이다.

4 잊혀진 영웅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지옥과도 같은 아우슈비츠에 자진해서 들어간 사람이 있다. 폴란드의 장교였던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라는 사람인데 수용소 내부에서 저항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예상보다 참혹한 현실과 조건에 저항 조직으로 수용소를 탈환할 수는 없었지만 수용소 내부의 상황을 외부로 전하고 기밀 서류를 훔쳐내는 등 첩보 활동을 훌륭히 수행했다. 하지만 화물 열차 정권으로 위세를 떨쳤던 폴란드 공산당은 여기서 크나큰 병크를 터뜨리고 마는데… 폴란드 해방 후 그를 서쪽[30]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해버린 것이다. 오 마이 갓

소련군폴란드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 SS는 상당수의 입소자를 서쪽으로 이송시켰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탈환한 뒤 공산 폴란드 정권과 소련군은 서쪽으로 이송된 폴란드인의 명단을 그에게 요구했는데, 그는 그들이 겪을 고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명단 제공을 거부했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견뎌내었고 결국 바르샤바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뒤늦게 1963년 폴란드의 백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지만 드라마틱한 삶에 비해 지명도는 낮다.

5 탈출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지만 어디에나 능력자는 있는 법. 탈출에 성공한 사례도 몇몇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철저한 계획, 기발한 발상(예를 들면 결혼식 작전이라든가), 불굴의 정신력, 그리고 귀신 같은 체력이다. 3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뛰었단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기필코 살아남은 그들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그들 모두가 다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그뿐 아니라 눈부신 성과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탈출하기만 해도 영웅인데 싸워서 또 영웅이 되었다. 사실 저기서 탈출할 정도의 육체능력이면 싸웠을 때 무시무시할 것이다.

보통 그런 지옥을 경험하면 공포증이 생겨 나치 군복만 봐도 두려움에 떨 텐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영웅이 되었다.

6 해방

나치 독일은 후에 소련군이 다가오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다른 곳은 모두 폭파시켰지만 예상외로 소련군의 진격이 빨랐고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30%는 날렸으며 학살용 수용소라고 할 수 있는 제2 수용소는 거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7 관람팁

현재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오전 10시부터는 유료로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으나 한국어 가이드는 한국 여행사를 통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한국 관광객 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입장 시간은 일반적으로 점심시간 이후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관람 후에 식욕을 상실한다는 이유다. 따라서 12시경에 근방 식당에서 식사를 먼저 하고 박물관 입구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보이길 기다렸다가 입장할 때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으면 매우 유익하다. 가이드 성격에 따라 싫은 티 내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인 학생을 반겨주는 사람도 많다.

이곳 입구에 있는 화장실은 유료인데 비교적 깨끗하지만 사람도 많고 비싸다. 2010년 8월 기준 3인당 1유로를 받았다. 만약 용무가 급한 사람이 있다면 수용소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자. 무료다. 특히 가스실 옆에 있는 화장실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절정이라 한 번쯤 가보길 권한다. 참고로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는 가이드를 해 주지 않는다. 한국 패키지의 빡빡한 시간관계상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비수기에 운이 좋다면 비르케나우까지 설명을 해준다.

이곳의 첨탑에 걸려 있는 시계는 시간이 멈춰져 있는데 관리 소홀로 멈춰진 것이 아닌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한 바로 그 시각에 멈춰져 있다. 그러니 혹여나 시계가 멈춰 있다고 비웃지는 말자.

원하는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 둘러볼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약 10분 정도 걸린다. 여기 가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으로 나온,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면 나오는 철로를 볼 수 있다. 안쪽으로 쭉 걸어서 들어가면, 독일군이 시체를 화장한 다음 재를 뿌린 연못이 있다.(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물빛은 잿빛이다)

참고로 비르케나우에서 아우슈비츠로 돌아오는 버스는 5시까지만 운행한다(동절기 기준). 주위에 아무것도 없으므로(숙박시설은 커녕 심지어 가게도 없다.) 꼭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대개 동유럽쪽에서 넘어온다면 크라쿠프를 거쳐오는 경우가 많고 서유럽쪽에서 넘어온다면 카토비체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크라쿠프에서 넘어오는 사람들 중에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레일 패스가 있다면 구지 버스타지 말자. 오슈비엥침 까지 가는 열차가 대략 1시간에 한번꼴로는 있어서 이쪽이 훨씬 이득이다.

8 기타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잘 그린 작품으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유대인)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아트 슈피겔만(유대인)의 《》도 추천한다. 또한 아우슈비츠 소장이었던 회스 중령이 연합군에 체포된 뒤 감옥에서 쓴 자서전 성격의 진술서인 《헤스의 고백록》#(정확히는 '회'스가 옳은 표기. 루돌프 헤스와 혼동하지 말자.)도 있다. 참고로 그의 손자는 학창시절 홀로코스트 피해자로부터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조상 잘못으로 후손들만 죽어나가는 안습한 사례.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타데우쉬 보로프스키(Tadeusz Borowski)(폴란드인)의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도 읽어볼 만한 책으로, 아우슈비츠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회스 중령의 최후는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서 이루어졌는데, 전범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샤워실에 보내는 대신 교수형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화장터 옆, 수용소와 회스 중령 자신의 사무실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회스 중령만을 위한 특설 교수대가 설치된다. 그는 그렇게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처형 당시 과거 수용수들도 몇몇 참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언급으로는 회스 중령은 최후에 매우 담담하게,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찌질대던 아몬 괴트 소령과는 다르다[31] 회스의 교수대 근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곳이라 그럴 것이다. 밟아야 제 맛

비디오 시스템이 개발한 게임 스피널 브레이커라는 게임에서는 1스테이지가 독일 국방군 망령을 상대하는 스테이지인데 위의 아우슈비츠 정문같은 게 보인다. 이외에도 전국시대 등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넘나들면서 망령을 상대한다.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된 제2차 세계대전 FPS 온라인 게임 투워에선 아우슈비츠라는 맵이 있었다. 그곳에서 연합군과 추축군 유저들이 총격전을 벌였다. 투워를 계승한 BN1944에서는 수용소라는 이름의 맵으로 다시 등장했다. 맵의 형태는 투워의 아우슈비츠와 거의 같다.

가장 엄숙해야 할 이 공간에서 춤을 춘 용자도 있다. 정신나간 네오나치가 아니라, 실제 수감되었던 부부가 가족들을 데리고 글로리아 게이너의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논란이 되었는데, 당사자인 아담 콘 씨는 "나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닙니다!!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이겼어요!!"라며 자신의 행동이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일종의 승리 선언임을 밝혔다.

9 관련 항목

  1.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는 주요 사건,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 및 문학 작품 등과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1933~1945)이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증거이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범죄 행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 수용소는 자유로운 행동과 사상을 억압하고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시도에 끔찍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강한 인간 정신을 기념한다. 이 유적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차별 정책,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이다. 또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때에 관한 기억이 모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곳이자, 과격한 사상이나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의 장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이트 참고
  2. 사진이 깨짐을 방지하기 위해 이름은 주석으로 옮김
  3.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
  4.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
  5. Auschwitz Birkenau Camp allemand nazi de concentration et d'extermination (1940-1945)
  6.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7. 우리가 알고있는 그 아르바이트의 어원이다. 원래 아르바이트는 독일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영어의 work 혹은 job에 해당하는 단어다. 자세한 내용은 아르바이트 문서 참조.
  8. 불가리아 출신의 셰프 미카엘의 어머니가 이 곳이 고향이라고 한다.
  9. Agfa, BASF, Bayer, Hoechst 4개사와 나머지 독일의 이런저런 화학공업회사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기업집단으로 바이마르 시절부터 존재했었지만 나치가 집권하는데 물주 역할을 맡았고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협력했었다. 참고로 아그파는 2004년 필름사업을 분사시킨 뒤 파산시키는 식으로 접었고, Hochest사는 1999년 프랑스 롱프랑한테 잡아먹혀서(…) 아방티스사가 되었다가 2004년 사노피사에 또 잡아먹혔다(…)
  10. 위에서 언급한 4개사와 Degussa(현 Evonik), Degesch사를 말한다.
  11. <운명>에서 서술된 부분을 보면 "수감자들이 몰려들어 나이를 묻자, 우리는 각자 나이에 따라 14살, 13살 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안 된다는 손짓을 하며 저마다 "15살" 이라고 토를 달았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 하며 "좋아요, 그럼 난 이제 15살이에요." 하고 말했다. 의사 앞에 나갔을 때, 몇 살이냐고 묻자 "15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말에 의사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는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모스코비치에 이르렀을 때, 그는 "15살입니다. 일할 겁니다." 하고 계속 반복했으나 큼직한 손이 그를 다른 줄로 끌어냈다. (중략) 이후 쾨베시와 동료들은 다시는 모스코비치를 보지 못했다. 가스실로 끌려간 것이다.
  12. 그나마 찍던 사진도 초반에만 찍었다. 여기에서 생활하면 얼굴이 변형되어 사진으로 신분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13.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이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감독하던 한 SS하사가 반쯤 미쳐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볼 수 있다. 즤덜이 죽여놓고도 맨정신으로 못 버틸 정도로 끔찍했던 것이다.
  14. 무솔리니독일과 다르게 다문화 제국(…) 정책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 말에 고분고분 따르진 않겠다는 일종의 존심 표현도 있었다.
  15. 딴 사람들은 다 순혈 독일인인데 외할머니가 유대인이라서 잡혀온다든지 이렇게 혈통도 별로 안섞였어도 조금이라도 있으면 수용되었다.
  16. "난 이 유대 놈들 속에 있을 수 없소! 나도 독일인이란 말요! 난 황제한테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고요!" / "정말 그 사람이 독일인이었나요?" / "낸들 알겠니. 실제로 독일인도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군한테는 이 친구도 유대인이었지!" - 아트 슈피겔만, 中. 이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서 폭행당해 사망한다.
  17.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이에 대해서 몹시 씁쓸하고 슬픈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뉴욕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의 위령비에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수가 1,000만명으로 기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 내 유대인들의 강경한 반대와 압력으로 실제로 세워진 위령비에는 희생자가 600만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400만명이 바로 집시, 슬라브인, 공산주의자, 정신 이상자나 동성애자 등이었다. 이는 결국 유대인들 자신이 다른 희생자와 스스로를 구별하려 들었다는 것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면 희생자인 유대인들 자신이 유대인 문제를 제외한 영역에서는 나치의 끔찍한 행태와 같은 행동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18. 정치범, 동성애자, 반 사회자, 이주민 등이 포함되었다.
  19. 출처 : 존 캐리의《역사의 원전》146. 다카우 수용소의 의학 실험(1941~45)/ 프란츠 블라하
  20.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영향으로 서방 연합군이 해방한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다하우 수용소와 착각한 경우다.
  21. 여담으로 SS가 학살을 위해 따로 편성한 학살부대도 존더 코만도라고 불렀다
  22. 여담이지만 미클로스 니즐리는 유대인이었지만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제법 대우를 받았고, 나중에는 SS장교에게 뇌물을 바쳐 아내와 딸을 처형 수형소에서 노동 수형소로 이송시켜 살리는 등, 다른 희생자가 봤을 때는 존다코만도보다 더 배신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23. 예로 들면, 이 정도 칼로리는 책상에 앉아 데스크 워크만 하는 사람이라야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는 칼로리다. 그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지 원활한 체력을 가질 칼로리도 아니다. 체력이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이 정도의 칼로리만 섭취하다 보면 계단으로 10층도 한번에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는 정도가 된다.
  24. 임레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운명>에서 '지푸라기가 씹히는 묘한 빵' 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당시 독일의 열악한 군수사정 탓에 군납 빵에도 톱밥이 들어가는 판이었으니 수용소의 빵은 말할 것도 없었다.
  25. <운명>에 서술된 표현을 빌리자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 을 가졌다고 한다. 질도 개판, 맛도 개판, 아주 훌륭하다.
  26. 중략.. 가죽장이가 먼저 맛을 보았다. 야릇한 표정이었다. 수저를 받아 입에 넣는 순간.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구 토해 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중략..) " 이게 바로 그 말린 야채 수프라는 거지. " 그는 이전의 전쟁과 지금 진행중인 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것도 장교로써 말이다. "거기서 이 음식을 질리도록 먹어 볼 기회가 있었지. 우린 독일군과 함께 전선에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이런 걸 먹더라고" (중략..) (운명 - 임레 케르테스 중에서 발췌)
  27. <운명>에서 서술된 부분을 보자면,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수프를 먹었고, 그 이튿날에는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했다." (중략) "점심 식사는 수프였는데, 놀랄 정도로 이른 시간에 나왔다. 이어, 해거름까지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다가 점호 전에 빵과 마가린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자, 배고픔의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형편없는 식사조차도 간격을 매우 띄워서 굶주림의 고통을 극대화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는 곧 같이 수감된 사람들과 함께 부헨발트로 옮겨갔지만, 다른 수감자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이런 생활을 겪었을 것이다. 부헨발트도 강제 수용소라는 건 변함없지만, 이쪽은 주 목적이 학살보다는 강제 노동이었던지라, 곤궁하지만 아우슈비츠보다는 나은 수준의 식사가 배급되었다고 적고 있다.
  28. 의외겠지만 교도소에서 담배가 금지된것은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 심지어 현대 독일에서도 주마다 다르지만 상당수의 교도소에서 흡연을 허용하고 있다
  29.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서술된 내용이다
  30.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으로 망명해 연합국 측에서 싸운 폴란드 망명 정부를 가리킨다.
  31. 출처 - BBC 다큐: Auschwitz: The Nazis and the 'Final Solu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