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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지 리바 (Luigi Riva) |
생년월일 | 1944년 11월 7일 |
국적 | 이탈리아 |
출신지 | 레지우노 |
신장 | 180cm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소속팀 | 레냐노(1962-1963) 칼리아리 칼치오(1963-1976) |
국가대표 | 42경기 35골 |
1969 Ballond'or | ||
수상 잔니 리베라 | 2위 루이지 리바 | 3위 게르트 뮐러 |
1970 Ballond'or | ||
수상 게르트 뮐러 | 2위 보비 무어 | 3위 루이지 리바 |
칼리아리 칼치오 영구결번 | |
No.11 |
1 소개
Rombo di Tuono(천둥 번개)
자타공인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공격수들이 몇년간 주전 자리를 독점하는 케이스가 적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보여줬던 스트라이커이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상위 호환격인 선수로 강력한 왼발 피니쉬가 주무기였다. 거기에 오른발도 못쓰는 편은 아니었고 몸싸움, 헤더 능력, 슈팅 테크닉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공격수였다. 거기에 주력까지 빠르니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 괜히 저런 별명을 가진게 아니다.
2 클럽
1962-63년 3부리그 소속의 레냐노에서 프로로 데뷔했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줘 1년만에 칼리아리 칼치오로 이적했다. 당시 2부리그 소속이었던 칼리아리에서 리바는 주전 공격수로 나서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고 세리에 A에서 첫 시즌 32경기 9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알렸다. 리바는 1975-76 시즌 은퇴하기 전까지 칼리아리에서만 활약했으며 비교적 약팀에 불과했던 칼리아리에서 득점왕을 3차례나 차지했다.
1968-69 시즌 리그에서만 20골을 작렬한 리바는 팀을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인 2위에 안착시켰다. 이어지는1969-70 시즌 21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리바와 30경기에서 11골만을 허용한 짠물 수비로 칼리아리는 구단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1970년 거함 유벤투스 FC가 리바의 영입을 원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1975-76 시즌 밀란과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칼리아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이 클럽이기 때문에 칼리아리에서만 헌신한 리바의 클럽 커리어 역시 다른 역대급 공격수들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1]
3 국가대표
1965년 헝가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으며 1974년 대표팀을 떠날 때까지 42경기 35골이라는 순도 높은 결정력을 보여주며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대표팀 사상 최다 득점자에 위치하고 있다.
유로 1968이 첫 메이저 대회 참가인데, 리바는 대회 베스트팀에 선정되는 활약을 보여주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70년 월드컵에는 도멘기니, 보닌세냐와 함께 공격진을 구성하며 이탈리아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1974년 월드컵이 마지맞 메이저 대회였으며. 대회 종료 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칼리아리의 경영진에 합류했고 2006년 월드컵때는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고문을 맡기도 했다.
5 트리비아
국가대표팀에서 터뜨린 35골 가운데 17골은 월드컵 지역 예선전 + 본선 무대에서 넣은 것으로, 전세계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또한 이탈리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3개의 다른 메이저 대회 예선전[2]에서 해트트릭(혹은 그 이상)을 작렬했다.
현역 시절 부상에 시달렸던 편인데, 1966년 월드컵 직전 포르투갈과의 친선전에서는 왼쪽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었고 1970년 월드컵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발목이 골절됐다.(...) 은퇴 사유 또한 1976년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입은 부상이 완쾌되는데 실패해서였다.
2005년 은퇴한지 30년이 지난 시점, 칼리아리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리바를 기리기 위해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11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