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베 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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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숱 없는 동네 아저씨 같아 보이지만 그 실상은...

이름우베 젤러 (Uwe seeler)
생년월일1936년 11월 5일
국적독일
출신지함부르크
포지션스트라이커
신체조건169cm
유소년 팀함부르크 SV (1946~1953)
소속팀함부르크 SV (1953~1972)
국가대표72경기 43골
1960 Ballond'or
수상
루이스 수아레스
2위
페렌츠 푸스카스
3위
우베 젤러

1 개요

함부르크 SV 최고의 레전드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라스 선정 역대 2위 [1]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 중 한 명

함부르크 SV가 배출한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 프리츠 발터, 헬무트 란을 잇는 1960년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격수 계보를 이어 받았으며 70년대 그 바통을 터치받은 공격수가 바로 사신 게르트 뮐러다.

사실 국내에서는 게르트 뮐러라는 스트라이커계 최종보스의 존재,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가대표와 클럽 커리어 상의 차이 때문에 젤러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젤러 또한 당대 최고의 포스를 자랑했다. 169cm의 작은 키에도 공중볼 능력이 뛰어났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았으며 바이시클 킥도 구사할 정도이니 그야말로 온 몸이 무기 그 자체였다.

선수 시절 최고의 기량으로 세계 각지의 여러 빅클럽에게서 최고의 오퍼를 받았지만 고향팀에 대한 사랑으로 모두 거절하고 HSV 한 팀에서만 뛴, 진정한 원 클럽 맨이자 HSV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2 클럽

17세의 나이에 프로무대에 데뷔하였고 1954년 홀슈타인 킬과의 DFB-포칼 경기에서 네 골을 퍼붓는 괴력의 포스를 보여주었다.

그의 첫 타이틀은 59/60 독일 챔피언쉽 리그[2]우승이였고 그 다음 1960/61시즌 유러피언컵[3]에 출전하는데 바르셀로나와의 4강전에서 쿠발라의 마법에 의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사실 경기종료 1분을 남겨두고 2-0으로 이기고 있는 함부르크 선수들은 끝났다는 생각에 널널하게 플레이 했는데 그 찰나에 쿠발라의 크로스를 함부르크 수비진이 그대로 내버렸고 그 크로스를 코치시 샨도르가 골로 넣어버렸다.[4]

아쉬움을 뒤로하고 1962/63시즌 DFB포칼컵에 우승하며 두 번째 타이틀을 획득한 뒤 1963년 분데스리가가 출범하게 되고 비록 팀은 6위로 시즌을 마쳤으나 젤러는 이 시즌에 30골로 분데스리가 첫 득점왕에 오른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 15골을 넣은 것 외엔 별다른 활약을 못 보여주었고 팀 역시 중하위권 수준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다가 1967/68시즌 팀의 컵 위너스 컵 결승행을 도움과 동시에 득점왕을 차지하였고[5] 1968/69시즌 23골로 오랜만에 저력을 보여주지만 이 시기 게르트 뮐러라는 역대급 사기 공격수의 등장으로 그 빛이 바랬다. 다음 시즌 17골을 넣었지만 이 활약을 마지막으로 서른 줄이 넘은 나이에 아킬레스건 부상의 휴유증으로 예전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한 채 1971/7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다.

3 국가대표

1954년 18세의 나이에 벌써 대표팀에 발탁이 되었을 정도로 어린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아쉽게도 베른의 기적을 만든 월드컵 대표팀 엔트리에는 들지 못한다. 이후 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본격적으로 헬무트 란과 같이 팀의 공격의 중심이 되어서 팀을 4강까지 올려놓지만 개최국 스웨덴에게 패하였고, 3-4위 전에서도 쥐스트 퐁텐이 버틴 프랑스에 패하면서 4위로 마감한다.

62년 칠레월드컵에선 헬무트 란이 은퇴하면서 팀의 무게감이 떨어졌고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에 일격을 당한다.

그러나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선 설명이 불필요한 프란츠 베켄바우어, 슈넬링거[6], 헬무트 헬러[7] 등 스타 플레이어들의 등장으로 서독은 당시 우승후보였고, 30대에 접어들며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던 젤러는 스페인전에서 천금같은 역전골을 넣으며 팀의 결승행을 도왔으나 팀은 그 악명높은 홈 텃세를 누린[8]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 연장 끝에 아직까지도 골라인을 넘었는지 아니었는지 논란이 오가는 잉글랜드 제프 허스트의 골[9]로 인해 4-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후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34세의 나이에 출전을 해 3골을 넣는 등 진가를 발휘하지만 팀은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서 명승부를 펼친 끝에 3-4로 석패하였고, 젤러는 70년 월드컵을 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젤러는 월드컵 4개 대회 연속 득점을 기록한 세 명의 선수들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나머지 두 선수는 펠레클로제.

4 여담

독일의 유망주 미드필더 레빈 외츠투날리가 젤러의 외손자이다. 함부르크 유스팀에서도 뛰었으나 막상 레버쿠젠을 거친 뒤 현재는 HSV의 최대 라이벌 베르더 브레멘에서 뛰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
  1. 1위는 카이저
  2. 분데스리가의 기원.
  3. UCL의 전신.
  4. 이 당시는 원정 다득점이 없어서 1차전 바르샤의 1-0승리, 2차전 함부르크의 2-1승리로 인해 3차전이 열렸고 결국 3차전에서 1-0으로 패하면서 결승진출에 실패한다.
  5. 67/68 컵 위너스 컵 우승팀은 AC밀란
  6. 당시 AS로마와 AC밀란의 수비수로 명성을 날렸다.
  7. 당시 볼로냐의 플레이메이커로 볼로냐의 1964년 세리에A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이 후 유벤투스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8. 해당 대회에서의 잉글랜드의 홈 어드밴티지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의 항목에만 들어가도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알 것이다. 더 정확히 알고 싶다면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8강전 경기를 보라. 지금 같았으면 FIFA가 중징계를 때리고도 남을 정도의 추태를 보였으니...
  9.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독일 대 잉글랜드전에서 프랭크 램파드의 골라인을 넘어간 중거리슛이 골로 인정되지 않으면서 독일은 44년만에 허스트의 골에 대한 복수를 했다. 하지만 해당 경기는 램파드의 골이 들어갔든 아니었든 독일이 탈탈 턴 경기여서 복수라기에 임팩트는 좀 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