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平忠吉
1580년 10월 18일 ~ 1607년 4월 1일
1580년 도토미국(遠江国)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이고노 츠보네[1]. 아명은 후쿠마쓰마루(福松丸)
1581년 도죠 마쓰다이라 가문[2]의 당주 마쓰다이라 이에타다가 병사하자, 이에타다의 양자가 되는 형식으로 도죠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독을 잇고 미카와국(三河国)의 도죠성(東条城)과 1만석의 영지를 받는다. 이때 이름을 후쿠마쓰마루(福松丸)에서 타다야스(忠康)[3]로 고친다.
1582년 스루가국(駿河国) 누마즈성(沼津城)의 4만석으로 전봉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이후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関東)로 전봉되면서, 1592년 간토(関東) 무사시국(武蔵国) 오시성(忍城)[4]의 성주가 된다. 겐푸쿠[5]를 치르고 이름을 타다요시(忠吉)로 개명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장인인 이이 나오마사의 후견 아래 첫 출진을 하고, 같은 동군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와는 서로 선진을 다투며 서군인 시마즈 토요히사의 군을 공격하여 패퇴시키는 등 공훈을 세우지만 타다요시도 전투 중 부상을 입는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측의 동군이 승리하고 이후 논공행상에서 타다요시는 오와리국(尾張国)와 미노국(美濃国)에 걸쳐 52만석의 영지와 키요스성(清洲城)을 받는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셋째형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 전장에 지참[6]하는 바람에 아버지 이에야스가 크게 진노하며 히데타다를 후계자 자리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울려고 했었고, 이때 타다요시와 둘째형 유키 히데야스가 새로운 후계자로 거론 됐었다.
1603년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게됨에 따라 타다요시의 영지는 자연스레 키요스번(清洲藩)이 된다.
1607년 에도(江戸)에서 병으로[7] 사망한다[8]. 향년 28세. 동복형제라곤 타다요시 밖에 없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또한 타다요시의 자식으로는 친아들이 한명 있었으나, 생후 16일 만에 죽었고 이후 다른 자식은 없었다.
타다요시는 자식이 없었기에 타다요시 사후 키요스번(清洲藩)에는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는 동생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들어오게 되는데, 요시나오는 기존의 키요스성(清洲藩)을 폐성처리하고 새로이 나고야성(名古屋城)을 축성하여 번청(藩庁)등을 옮겨 가게 된다. 이후 키요스번(清洲藩)은 오와리번(尾張藩)[9]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도쿠가와 고산케 중 하나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의 초대 당주와 오와리번(尾張藩)의 초대 번주가 된다.- ↑ 도쿠가와 히데타다와는 어머니가 같다.
- ↑ 종가인 미카와 마쓰다이라 가문의 분가
- ↑ 할아버지 히로타다의 "타다"와 아버지 이에야스의 "야스"를 한자씩 받아 지은 이름이다.
- ↑ 영화 "노보우의 성" 주요 무대
- ↑ 元服 - 일종의 성인식
- ↑ 전장에 늦게 도착하는 것으로 패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보통은 할복감이다.
- ↑ 악성종양 혹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도 한다.
- ↑ 이 해에 둘째형 유키 히데야스도 병사했는데, 타다요시는 히데야스보다 약 한달 먼저 사망했다.
- ↑ 혹은 오와리번의 거성(居城)인 나고야성(名古屋城)의 이름을 딴 나고야번(名古屋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