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 황제의 사위.
서기 306년 공동황제 갈레리우스 황제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이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로마에 입성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1]
로마에서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세베루스가 공격해왔으나 아버지의 도움으로 이에 승리한 후 라벤나로 퇴각한 세베루스를 포로로 붙잡아 처형한다.
이후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지역을 통치했는데, 콘스탄티누스측의 악선전과는 달리 교양도 풍부했고, 사람을 이끄는 매력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며 군사적 지휘 능력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지만 이혼당한 처의 아들에 불과했던 반면, 막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적자였던 데다 또 다른 선임 아우구스투스인 갈레리우스의 사위였다.
내치에도 꽤 재주가 있었던 듯하며, 부친 밑에서 십수 년 넘게 근무했던 군인들을 불과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사람들로 만들 정도로 인덕이 대단했던 인물.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대놓고 콘스탄티누스를 찬양하는 데도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고, 중과세 탓에 벌어진 경제난으로 로마에서 자신을 욕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데도 무력을 써서 진압하지 않았다. 대단히 자제력이 뛰어나고 정치적인 감각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상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동양사의 인물로 비유할 경우 오히려 막센티우스가 유방에 가까운 인물이다. 반면 직접 전장에서 적들을 마구 베어죽이고 적장을 손수 죽이는 걸 즐겨했던 콘스탄티누스가 항우에 가깝다.
하지만 막센티우스에겐 불행히,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10대와 20대, 30대 초반을 보내면서 온갖 통치술을 다 배운데다가 개인적인 자제력이 대단했고 권모술수에도 뛰어났다. 반면 막센티우스는 질투심이 몹시 강한 부친이 오히려 콘스탄티누스편에 서서 온갖 악선전을 행했던지라 이탈리아 지역을 제외하면 여론전에서도 뒤져 있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의 대결 시점에서 아우구스투스보다 한 단계 아래라지만 어쨌든 4두 체제에서 공인 받은 바 있는 합법 카이사르였고, 다름아닌 바로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로 인정 받은 전력[2]도 있었다. 반면 막센티우스는 SPQR의 인정은 받았다지만 기존 4두 체제에선 불법으로 규정된 불법 아우구스투스고, 게다가 집권 과정에서 어쨌든 합법 아우구스투스였던 세베루스를 시해하고 황제가 된 바 있있기에 명분 면에서도 하자가 있었다.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무리하게 군대를 확충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중과세를 할 수밖에는 없게 된다. 방탕과 폭정을 일삼았다는 기록은 악선전이지만, 그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무리하게 과세해서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던 건 사실이며 기독교측의 악선전은 주로 여기에 근거를 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센티우스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도 그가 고른 지형은 후기 로마사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시오노 나나미의 지적과는 정반대로, 콘스탄티누스가 어떻게 해도 전술적인 묘수를 부릴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결국, 알아도 대비하기 어려운 콘스탄티누스측의 전투력 탓에 결과는 콘스탄티누스측의 대승으로 나타나고 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당대 로마인들이 몹시 기이하게 생각한 유형의 지휘관이었다. 쉽게 말해 삼국지연의의 여포나 관우 혹은 초한지의 항우와 매우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최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적 전열의 가장 강한 지점부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는 전술을 즐겨 썼는데[3], 이건 막센티우스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해결이 어려운 내용이었다.
유방이야 압도적인 전략적 이점과 여론전에서 앞서서 항우를 제압할 수 있었으나, 이 부분에선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측이 대단히 유리했던 것도 막센티우스측으로선 어쩌는 수가 없었던 상황.
콘스탄티누스는 언제나 그랬듯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무모한 돌격으로 막센티우스측의 최정예 보병 라인을 뭉갰고, 그 순간 막센티우스의 모든 대비책은 무효화되었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전쟁 중에 일단 후퇴하다가 밀비우스 다리에서 떨어져 익사하고 만다.
부친이 좀 더 상식적인 인물이었다면, 통치술을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배웠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해 결국 사후에서까지 기독교측의 악선전으로 이미지가 크게 망가진 안타까운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