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Montgomary Bus Boycott, 1955

1 개요

At the bus stop on this site on December 1, 1955, Mrs. Rosa Parks refused to give up her seat to boarding whites. This brought about her arrest, conviction, and fine. The boycott began December 5, the day of Parks' trial, as a protest by African-Americans for unequal treatment they received on the bus line. Refusing to ride the buses, they maintained the boycott until the U.S. Supreme Court ordered integration of public transportation one year later. Dr. Martin Luther King Jr. led the boycott, the beginning of the modern Civil Right Movement. (the rest omitted)

1955년 12월 1일, 이 자리에 있던 버스 정류장에서, 로자 파크스 여사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벌금을 선고받았습니다[1]. 보이콧은 파크스 여사의 재판날인 12월 5일, 흑인들이 버스에서 받는 불공평한 대우에 대한 항의로서 시작되었습니다.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그들의 보이콧은 미국 대법원이 1년 후[2] 대중교통에서의 흑백 분리 금지를 명령할 때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보이콧을 이끌었고, 이는 현대 시민 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후략)
- 옛 클리블랜드 가 정류장[3] 위치에 세워져 있는 기념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1955년 로자 파크스 체포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운동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름이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인종 차별 폐지 운동에 불이 붙었다.

2 당시 상황

1950년대 미국은 21세기의 사람들이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기차, 학교, 병원, 음식점, 호텔, 미장원, 극장, 수돗가, 심지어는 교회나 신문 부고란, 장례식마저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었다. 특히 로자 파크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던 앨리배마는 미국 남부에 위치해 인종 차별의 최전선을 달리던 곳이었다. 대놓고 밤이면 KKK가 야간 행진을 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교회에 폭탄을 집어던질 정도였다[4]. 대부분의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1870년대, 그러니까 링컨이 노예 해방령을 내려 법적으로 흑인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된 직후부터 흑인의 선거권을 막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일부러 인두세를 올려 흑인들이 세금을 지불할 수 없게 하기도 하고, 선거권을 행사하려는 흑인들에게 읽기와 쓰기 시험을 치게 했다[5]. 심지어 어렵게 투표권을 행사한 흑인이 선거장 앞에서 공개적으로 암살당한 사건이 있었을 정도였다[6].
이러한 차별은 버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1900년 제정된 앨리배마 주 몽고메리의 도시 법령(City Ordinance)에 의거하면,

  • 36개의 버스 좌석[7]에서 앞의 10석은 백인석, 뒤의 10석은 흑인[8]석, 그리고 가운데의 16석은 아무나 앉을 수 있다. 그러나 빈 좌석이 없을 경우 흑인은 백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당연히 양보해야 한다.
  • 흑인은 버스 운전사가 될 수 없다. 운전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가관인데 더 기가 막힌 규칙이 있었다.

  •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경우 앞에서 뒤로 걸어가면 그 사이에 앉은 백인들의 심기를 거슬릴 수 있으므로[9] 앞문 쪽으로 가 다시 요금을 내고 내린 뒤 뒷문으로 다시 타야 한다[10].

이에 흑인들도 이런 기가 막힌 짓거리를 가만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는 KKK가 대놓고 날뛰던 시대였고, 그 누구도 흑인의 인권 따위를 고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끝이 없어 보이던 인종차별도 서서히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1954년 5월 17일,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s. Board of Education) 사건[11]의 최종 판결을 만장일치(9:0)로 선고했다.

공공 교육기관에서의 '차별론'은 인정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아이들은 피부색에 관계없이 같은 교육기관을 다녀야 한다.

이 판결은 반격의 서막이었다.

3 클로뎃 콜빈(Claudette Colvin) 사건

여기서 사람들은 로자 파크스를 대부분 기억하지만, 사실 로자 파크스 사건이 있기 몇 년 전, 클로뎃 콜빈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에게 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한 사건이 이미 있었다. 몽고메리의 흑인 지도자들은 그녀를 구심점으로 삼아 보이콧 운동을 벌이려고 했지만, 문제는 콜빈이 15살 미혼부였다는 것. 도덕적 면에서 고려했을 때 그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지도자들은 보이콧 운동을 조금 미루기로 계획하고 일단 후퇴했다.

4 로자 파크스 사건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약 오후 6시 무렵, 로자 파크스는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시내에 있는 클리블랜드 가(Cleveland Avenue)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그녀는 운임을 내고 11번째 줄, 그러니까 흑인석의 가장 첫 줄에 앉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많이 타더니 결국 버스가 만석이 되었다. 이후 백인들이 타자 운전수는 흑인석의 앞 줄부터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명령했다[12]. 당시 흑인석 앞좌리에는 파크스를 포함한 흑인 네 명이 앉아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운전사가 "너희 모두 자리를 비키는 게 좋을 거다(Y'all better make it light on yourselves and let me have those seats[13])."라고 협박했고,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파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14]

운전수: "Why don't you stand up?" (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거지?)

파크스: "I don't think I should have to stand up."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요.)
운전수: "Are you going to stand up?" (자리에서 일어날 거냐?)
파크스: "No, I'm not." (아니오.)
운전수: "'Well, if you don't stand up, I'm going to have to call the police and have you arrested." (글쎄, 일어나지 않는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널 체포할 거야."
파크스: "You may do that." (그럼 그렇게 하시죠.) [15]

그렇게 해서 파크스 여사는 체포되었다. 경찰이 그녀를 끌고 가는 동안, 그녀는 경찰관에게 물었다.

파크스: "Why do you push us around?" (왜 나를 체포하는 거죠?)

경찰관: "I don't know, but the law's the law, and you're under arrest." (나도 몰라. 하지만 법은 법이고, 너는 체포되었어.아이히만 2)

부보안관 D.H.래키(Lackey)가 그녀의 지문을 찍었고, 머그샷을 찍었다. 그녀의 죄수번호는 7053번이었다.

5 로자 파크스 재판

  1. 벌금으로 14달러가 책정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액수였다(1955년의 1달려=2016년의 8.86달러 정도). 특히 경제적으로 열약하던 흑인들에게는.
  2. 정확히는 381일동안 보이콧이 계속되었다.
  3. 로자 파크스가 자리 양보를 거부한 정류장. 현재는 정류장이 없어졌다.
  4. 실제로 킹 목사가 설교하던 교회에서 겪은 일이다. 당시 성가대원 4명이 숨졌다. 이 외에도 킹 목사 집에 누군가 폭탄을 던져 집 앞에 모인 백인 경찰과 흑인들 사이에서 흑-백 충돌이 터질 뻔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폭탄은 킹 목사의 집 문짝만 박살내고 끝냈고, 킹 목사가 직접 나타나 흑인들을 설득한 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경찰서장은 "킹 목사가 당시 나와 백인 경찰들의 목숨을 살렸다"라고 훗날 회고했다.
  5. 당연하지만 이 시험에서 합격한 흑인은 아무도 없었다
  6. 범인들은 대놓고 죄를 떠벌렸지만, 백인 판사나 백인 배심원들이나 그 누구도 이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작 13분의 재판 후에 이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약과였다. 남부에서는 한 흑인 소년이 백인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로 그날 밤 그 여자의 두 형제들에 의해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도 역시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7. 당시 몽고메리 버스의 좌석 개수는 36개였다
  8. 정확히는 흑백 혼혈(이른바 "컬러드(Colored)") 및 아시아계를 포함한 모든 유색인종
  9. 실제 공식 사유다!
  10. 이 과정에서 흑인이 내리면 버스 기사가 흑인을 태우지 않은 상태로 버스를 출발시키는 경우도 상당했다.
  11. 정식 명칭 '올리버 브라운 외 대 교육위원회 외(Oliver Brown, et al.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et al.). 사건번호 347 U.S. 483, 의장 얼 워렌(Earl Warren) 판사. 캔자스 주 토페카(Topeka)에 거주하던 흑인 올리버 브라운은 자신의 딸아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7블럭 떨어진 학교에 가지 못하고 21블럭이나 떨어진 흑인 학교에 가야 하는 것에 토페카 교육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고, 1952년 12월 9일 이들을 고소했다. 이것이 기각되자 1953년 12월 8일 법원에 상고를 했다.
  12. 당시 버스 운전수는 제임스 F. 블레이크(James F. Blake)였는데, 우연하게도 이 사람은 파크스와 악연이 있었다. 1943년, 버스를 타고 가던 파크스에게 당시에도 버스 기사였던 블레이크는 백인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명령했고, 파크스는 이를 거부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당시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파크스는 비를 맞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블레이크는 이 사건 당시 경찰 측 증인으로 섰고, 그 뒤에도 19년간 버스 운전을 계속하다 2002년 심장 마비로 숨졌다. 로자 파크스 사건에 관해 그는 '파크스라는 여자에게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은 없었지만 그녀가 한 일은 조례를 어긴 것이었고, 나는 그녀를 체포해야만 했다'아돌프 아이히만 드립라는 말을 남겼다.
  13. 직역하면 '똑똑하게 행동해. 자리를 양보하라고.' 정도.
  14. 훗날 파크스의 자서전(My Story)에 의하면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당시 42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그다지 피곤하거나 지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15. 출처: 파크스의 증언, Eyes on the Prize(1987,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관한 TV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