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대 장교 시절 | |
이름 |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
생물년 |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라인 주 졸링겐 |
사망지 | 이스라엘 라믈라 |
정당 |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배우자 | 베로니카 리블 |
나치당에서 열렬하게 활동할 시기의 사진
체포된 1960년의 아이히만
1 개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최종계급은 친위대 중령. 이자 상부에 지시 잘 따르기로 유명한 친구 상부 딸랑이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치하의 독일로 이주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및 학살 전문가로 통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접 지시를 받고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 때문에 아이히만이 평범한 공무원이며 나치에 명령에 충실히 따른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이히만은 언제나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을 전부 죽여야 한다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광적인 신념에 가득찬 나치당원이였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른 사람.
2 생애
2.1 초기 생애
아이히만은 독일의 서부도시인 졸링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린츠 지역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에 가족들은 오스트리아의 린츠로 이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아이히만은 안색이 검었기에 다른 아이들은 그에게 유대인같다며 놀려댔는데 여기에서 그의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아이히만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에 종군했다가 전후 다시 린츠에서 사업을 시작해 1920년에 가족들은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1925년에 아이히만은 기계공학을 공부하기위해 다시 오스트리아로 갔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여 학비가 떨어지자 대학을 중퇴한 후 린츠 지역 정유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위해 1930년에 다시 독일로 갔다. 아이히만은 야외집회에서 나치당과 처음 접하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훗날에도 자백했듯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유에 따라서 나치당에 가입할 생각을 하게 되어 1932년 다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26세때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다.
아이히만은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의 회원 번호 889895번을 받고 오스트리아 분기에 합류했고 그는 1932년 4월 1일에 나치당에 들어어간 아이히만은 1932년 11월에 나치 친위대 오스트리아 지부에 들어갔고 슈츠슈타펠의 회원 번호 45326를 받았다. 처음에 아이히만은 그닥 나치당에 엄청난 관심이 없었으나 아이히만은 곧 동료 예를 들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와 같은 나치당원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아이히만은 일반친위대의 임원으로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했으며, 1933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당을 불법화했지만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독일로 귀국했다. 독일로 귀국한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34년 베를린에 자리잡아 나치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SS의 멤버가 되어 정치범을 수용하던 강제수용소인 뮌헨 교외의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일하면서 친위대의 실력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목을 받았다. 주목할 점은 그가 린츠에서 독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보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아이히만은 1937년에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대량이주계획을 평가하기 위해서 헬베르트 하겐의 부관으로 팔레스타인으로 간 아이히만은 하이파에 도착했지만 비자를 받지못해 카이로로 향했다. 여기서 영국의 방해공작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입국을 거부당한 아이히만은 독일의 유대인 강제이주 정책은 모순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경제적인 이유를 덧 붙여서 유대인의 이주를 반대하는 입장을 보고서로 올렸다. 한마디로 이주가 아니라 학살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친위대 보안국의 유대인 추방을 떠맡았고, 그는 이때부터 이미 권력을 추구하며 냉혹한 나치당원으로 이름을 알렸다.
2.2 나치당에서의 학살행각
그 뒤 그는 친위대 소속 대대장으로 진급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국안전중앙부에서 유대인 수송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 추방과 수송의 전문가로서 단순히 하인리히 힘러처럼 서류에 작성만하는 고위층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하이드리히의 명령으로 각 차관급 인사들이 동맹국 헝가리의 고급주택지인 반제에 모여 이른바 "반제 회의"가 열렸는데 아이히만도 여기에 참석했다. 여기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이 결정되는 장소에는 아이히만 또한 관여하고 참석했다. 아이히만은 친위대 중령으로 승진해 국가안보부 제 5국 즉, 게슈타포의 유대인과의 과장으로 임명되어서 유럽각지에서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가 되었다. 아이히만은 "500만의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라며 자랑했는데 이 실적은 상부의 주목을 받아 1944년에 헝가리로 급파되었다. 그는 바로 유대인 수송 과정에 착수해서 현지 화살십자당의 지원을 받아 무려 40만명의 유대계 헝가리인들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다.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멸살을 결정했을 때 그는 그 집행을 위임받았는데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절멸 수용소와 학살의 현장을 확인하고 지도하면서 여러 학살 지역에 나타나서 학살을 지시했다. 한마디로 그는 유대인 대학살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관리자이자 조직가로써 유대인이라는 적을 말살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러한 업적(?)을 통해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다. 이때에 유대인들을 얼마나 열심히 쓸어냈는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였던 하인리히 뮐러는 "만약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1945년에 독일의 패색이 깊어지자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 학살중지령을 내렸지만 학살에 미쳤는지 아이히만은 이에 따르지않고 계속 헝가리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홀로코스트를 계속해서 수행했다.
아이히만은 소련군이 진군해오자 헝가리에서 탈출해 지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있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지만 친구였던 칼텐부르너는 아이히만이 자신과 똑같이[1]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연합군의 중범죄자라 책임 추궁이 무서워서 그와 만나기를 거절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패전이 가까워지자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어느날 자신의 사진이 찍히게 되자 그는 화를 내면서 카메라를 부셔서 사진 찍은 사람에게 카메라 값을 변상해준 적도 있었다.
2.3 전후
아이히만의 가짜 여권
1945년,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잠시 미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하면서 퇴역군인이라 주장해서 재판을 피했고 1946년 미군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옛 친위대 동료들과 가톨릭교회 및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도움을 받아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로 몰래 빠져나가 1950년 6월 17일에 독일을 떠나는 것에 성공했고 그는 7월 1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아이히만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탈출했을 때의 가명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건설사 직원, 물류업체 감독관 등으로 지내며 15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는 망명지인 아르헨티나에서조차 계속해서 나치 잔당과 모임을 가졌고 독일의 청년 세대에게 새로운 반유대주의 독일인의 사명을 부과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그는 1960년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로 활약하던 빌렘 사센(willem sasen)과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유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아이히만의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을 빌렘 사센에게 고백했다.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였다면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였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이에 불과한 놈일 겁니다. 나는 나치당원들과 함께 똑같이 생각했으며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우고 싶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2.4 체포와 사형
그렇게 자신은 죄가 없다며 유대인 학살을 후회하지 않은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으로 검거되었다.
사실 아이히만은 비교적 잘 숨은 편이었는데, 장남이 1957년 여자친구인 유대계 소녀 실비아 헤르만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럽에서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쓸데없이)자랑하다가 덜미가 잡혔다(...) 자식이 웬수 아니 자랑할 걸 자랑해야지. 누구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실비아의 아버지 로타어부터가 아이히만의 희생자로, 부모를 잃고 자기 역시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던 것. 그는 이스라엘 외무장관에게 즉시 신고했고, 그의 고발로 2년에 걸친 추적, 수사 끝에 모사드는 요원 7명으로 아이히만의 자택에서 그를 검거했다. 차에 태워진 아이히만은 체념한 듯 독일어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나. 모사드는 그의 신원을 확인한 뒤, '니 여기서 죽을래, 아니면 이스라엘에서 재판받고 죽을래? 편한 대로 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증거는 귀였다고 한다. 코나 입은 성형수술로 고치지만 귀까지 고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가방에 카메라를 숨겨서 촬영한 사진이 모사드가 그가 아이히만임을 확신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서 자신이 수행했던 능동적인 역할과 반유대주의 신념을 숨기고 단순히 자신은 국법과 체제에 따른 선량한 시민이자 공무원으로 행세했다. 결국 이와 같은 아이히만의 생애와 광적인 사악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법정 앞 자기변호와 거짓 진술에 의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한 일은 준법정신, 즉 그것만큼은 잘못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얻게 되었고, 그녀는 나치주의라는 광적인 신념을 가진 인간의 탈을 쓴 마귀인 아이히만을 단순한 명령에 따랐던 공무원으로 생각한 것이였다. 다만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의 무능'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생각의 무능이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기 때문에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고 이상주의자로서 나치 사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다. 라고 최종판단을 내렸다. 결국 아이히만은 1961년 4월 11일과 12월 15일 텔아비브의 공개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1962년 5월 31일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물론 이 인간 저지른 악행을 보면 교수형도 편안한 죽음이지만. 아래는 유언.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을 거요.”
아이히만을 추적하며 납치공작을 전두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직 모사드 간부 라피 에이탄의 회고에 따르면, 1962년 5월 31일 사형실을 방문했을 때 아이히만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대인 친구, 자네도 나를 따라서 죽게 되어 있어."[4]
- 고든 토마스 저, 『기드온의 스파이 1』, 「철가면을 쓴 스파이 - 유대인 학살의 원흉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라」, 2010. 09, 예스위캔, p.119
덧붙이자면, 아이히만의 재판은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확보는 이유야 어떻건 외국인의 불법 납치였기 때문. 아이히만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즉시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스라엘의 주권침해를 인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재판소는 불법납치에 의해 확보된 피의자에 대해서는 재판소의 관할권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아이히만측의 주장에 대해, 피의자의 확보수단은 재판관할권과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이는 불법납치를 통한 재판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국제법학계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3 기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지금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 발간)이라는 유명한 책을 내게 된다. 제대로 된 비판정신 없이 상부의 명령에 맹종하면 어떻게 된다는걸 보여준 중요한 표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아이히만이 보여준 악랄함 그리고 그의 사상들을 고려해 다시 평가했을 때 이 책을 재평가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있다. 그의 자세한 성격과 행동, 평가는 항목 참조.
그런데 아이히만이 유대인이라는 썰도 있다. 이스라엘 법정에서 왜 동족들을 배신하고 나치 편으로 들어가 대학살을 저질렀냐는 질문을 하자 거리낌없이 "내가 유대인이니까 유대인이 얼마나 위험한 종족인지 알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국내서적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심지어 90년대 중후반 군부대 정신교육 서적에서도 아이히만을 잡은 이스라엘을 두고 동족을 배신한 자에 대한 응징이라고 나오기까지 했다. 매국노! 하지만 친위대에 들어간 게 1932년인 걸로 보아 유대인 혈통은 아닐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면 만슈타인과 같은 이유 일수도 있을 확률도 있다. 그러나 이 소문은 충공깽스럽게도 아이히만이 퍼뜨린 소문이였다. 그는 텔아비브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히브리어에 능통하며 유대인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오히려 그 소문을 자신의 출세에 활용할 정도로 교활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서 소문을 계속 확산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한편으로는 유대인 사회에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시켰고[5]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서 전문가로써의[6] 지위와 인정을 강화했다.
이와 관련되서 국내 서적 중에서는 이 때 아이히만의 발언이 "나를 유대교로 개종시켜달라"였다고 한다. 재판관이 이유를 물어보자 말하기를 "그러면 유대인을 이 세상에서 하나 더 지울 수 있지 않느냐."라고 답했다고...
모사드는 요제프 멩겔레와 아이히만의 소재를 모두 파악해냈고 그중에서 누굴 먼저 잡을까 고심하다가 아이히만을 먼저 잡기로 결심했는데 멩겔레는 아이히만이 잡히는 것을 보고 다시 잠적해버려 멩겔레는 잡지 못했다는 낭설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멩겔레의 본거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죽은 뒤에나 간신히 그놈의 무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둘의 행선지를 실제로 파악했다면 둘다 체포조를 보내서 동시에 잡으면 되지 뭐하러 이놈 먼저 잡자 이놈은 나중에 잡자 하겠는가? 애초에 앞뒤가 안맞는다. 이러한 소문은 이스라엘에서 퍼뜨린 것으로 추측중이다. 다만 멩겔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히고 나서 더욱 더 조심해서 생활했고 그가 끝까지 잡히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2007년 아이히만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헝가리, 영국 합작으로 개봉되었다. 아이히만 역은 토마스 크레치만이 담당. 이번에도 나치 역이다...
<남편이자, 아버지자, 군인이자, 괴물>[7]
2015년 영국 BBC2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송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 드라마 '디 아이히만 쇼'가 방영되었다. 마틴 프리먼이 주인공 제작진 역을 맡았고, 부천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놈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남동생 하인츠 하이드리히랑 상당히 친했다. 하인츠가 자살했을때도 가장 슬퍼했다. 근데 어이없는 건 하인츠가 유태인 과 집시족을 몰래 구출시킨건 죽는 날까지 알지 못했다.
4 유사 인물
- ↑ 하지만 특히나 악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유명했기 때문에 그를 피했다.
- ↑ 런던대의 저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다비드 케사라니의 증언. 다만 증언은 조금씩 엇갈리는 편이다.
- ↑ 다만 죽음이 완전히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이츠하크 벤츠비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자신은 하수인일 뿐이라면서 교수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탄원한 편지를 보낸 것이 남아 있다. #
- ↑ 에이탄은 여기에 "그래.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아돌프. 지금은 아니라고."라고 맞받아쳤다고.
- ↑ 가장 악랄하다고 소문이 난 아이히만이 자신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시키기 위해서였다
- ↑ 자신이 유대인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유대인을 처리하는데 최고의 적임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 사진을 잘 보면 알겠지만, 바로 옆에 똑같은 구도의 얼굴로 전시된 액자 속 인물은 악마 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