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1527) ~ 1562년 三好実休
1 소개
미요시 모토나가의 차남이자 미요시 나가요시의 첫째 동생. 아명은 센미츠마루(千満丸)이며 짓큐라는 이름은 법호로 본명은 유키토라(之虎).
2 생애
가문의 적통이던 나가요시가 빠른 나이에 키나이에 진출함에 따라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 아와 전반을 통치하게 되었다. 나가요시가 키나이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짓큐도 이에 맞춰 사누키로 진격해 호족들을 포섭하여 시코쿠에서의 미요시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1546년에 나가요시가 우지츠나 세력에게 포위되었을때 부름을 받고 시코쿠에서 건너와 우지츠나 세력을 깨뜨리는 공을 세웠다. 짓큐는 이 상륙 후 1551년까지 키나이에 거처하게 되었으며 센 리큐같은 다도인들과 같이 수학하며 친분과 교양을 쌓아나갔다.
이후 짓큐는 시코쿠로 귀환하였고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모치타카(細川持隆)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을 옹립하는 등 시코쿠에서의 미요시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558년의 쇼군 가문과의 화친 후에는 서사누키의 카가와 가문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나가요시에 대하여 불쾌감과 적대감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당시 짓큐는 직접 출가하여 짓큐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로 나가요시를 안좋게 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미요시 야스나가의 중재에 힘업어 이 둘은 곧 화해하게 되었다.
1560년, 나가요시는 자신의 명령에 거스른 하타케야마 타카마사를 공격하기 위해 짓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짓큐는 시코쿠세를 이끌고 키나이에 상륙하여 카와치로 향하였다. 카와치에서 짓큐의 군대는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고 타카마사를 카와치에서 쫒아내며 카와치를 미요시 가문의 영토로 두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에 짓큐는 다시 한번 아와를 떠나 최전선에 해당하는 카와치 타카야 성에 입성하여 카와치를 감독하기 시작했다. 1561년, 점점더 강성해지는 미요시 가문을 대상으로 포위망이 형성되었고 짓큐도 이를 막기위해 카와치와 시코쿠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했다. 1562년, 짓큐는 남부전선인 이즈미에서 키이로 도망쳤던 타카마사와 전투를 하게 됐으나 네고로슈의 기습을 받아 쿠메다 전투(久米田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3 이름에 대해
보통 짓큐의 본명은 요시카타(義賢)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군키모노같은 창작물에서만 발견되는 이름이며 1차 사료에서는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다름 아닌 짓큐의 차남 소고 마사야스의 이름과 관련되어있다.
마사야스가 미요시 나가하루 사후 당주가 된지 얼마 지나지않아 중앙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던 미요시 야스나가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인해 히데요시의 조카를 양자로 받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히데요시의 조카는 이름을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로 바꾸고 야스나가의 가신단을 인계받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키나이 미요시 가문이 완전히 오다 - 토요토미 정권에 흡수당하는 것을 본 마사야스는 자신의 이름을 미요시 요시오키 때부터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돌림자가 된 요시(義)가 들어간 이름인 요시카타(義堅)로 바꾸어 자신이 미요시 가문의 정통인것을 주장하였고 이 이름으로 수많은 서장을 발급하였다.
문제는 이 이후에 일어났다. 짓큐와 마사야스는 본거지가 쇼즈이 관(勝瑞館)으로 같았고 자신들이 쓴 서장은 사누키의 호족 앞으로 보내진것이 많이 남아있었기에 그들의 사후에 혼동이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 서장의 화압(花押)에 표기된 堅마저 賢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오기되어 일부 가계도나 군키모노에서 그들의 이름은 미요시 요시카타와 소고 마사야스가 되었고 이 이름들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것이다.[1][2]
4 기타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형 다음으로 능력치가 좋다.
상기의 초상화말고 다른 초상화가 존재하는데 다른 사람마냥 천지차이로 그려져있다(...)
형, 동생들 못지않게 짓큐 또한 당대의 문화인이었다. 특히 다도가로 유명했으며 본인이 이즈미에 위치한 사카이에 들릴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센 리큐같은 다도가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최고의 다도인 중 한명이라는 말까지 들을정도로 나가요시와 후유야스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가지고있었다. 명품 차기나 자기도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작전 이후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하며 혼노지의 변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본거지 쇼즈이 관에서의 발굴조사로 인해 수량은 물론이고 보존상태까지 좋은 자기들이 발견되어 속속히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昔阿波物語)에서는 문화와는 거리가 먼 무장으로 설명되어있지만 위에 나와있는 설명과 곧바로 상충한다(...) 미요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는 미요시와 쵸소카베의 다음 가문인 하치스카 가문 시대에 작성되었고 당연히 옛 영주가 현 영주보다 위대하거나 그 시절이 더 좋았다고 공공연하게 작성하면 안되므로 인물의 성격에 대해 살짝 조정을 가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3]- ↑ 화압은 보통 자신의 이름이나 관위명으로 작성한는데 몇몇 무장들은 그냥 자신들만의 사인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화압은 흘려쓰기 때문에 판별하기도 어려운데 짓큐는 화압을 그림 그리듯 그려넣은데다 그 종류도 많았기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적잖은 혼동을 주었을것이다.
- ↑ 이런 혼동때문에 쇼즈이 성(勝瑞城)이 쇼즈이 관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되었으나 최근의 발굴조사로 쇼즈이 성은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침공으로 마사야스가 급히 쌓은 성이며 전투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 실제로 에도 시대 토쿠시마 번에서 시작되었다는 쪽 염료(藍)와 목재 교역은 호소카와 - 미요시 시대부터 활성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