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요시카타(三好義賢)로 잘못 알려진 무장에 대해서는 미요시 짓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미요시 마사야스(三好政康)로 잘못 알려진 무장에 대해서는 미요시 소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554년~1586년(서력 1587년) 十河存保
한때 일본 전국에서 위명을 떨치던 미요시 가문의 일문 미요시 짓큐의 차남. 아명은 소고 센마츠(十河千松)이며 가명(仮名)을 마고로쿠로(孫六郎)라 하였다.[1] 미요시/소고 양 가문의 최후의 당주.
1 소고 가문의 당주
미요시 요시오키의 죽음으로 시작된 일련의 후계자 문제 끝에 마사야스는 소고 가문의 당주가 되어 성년이 되자 이름을 마사야스(存康)라 바꾸어 소고 가문의 사람임을 알렸다. 1565년 6월에 법화종 니치렌슈(日蓮宗)의 니치코(日珖)에게 수법을 받았다.
노부나가 포위망이 형성되고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위시로 하는 반노부나가의 행동이 격화되자 마사야스는 노부나가에게 옛 미요시의 당주 미요시 요시츠구를 공격할 것을 제시하는 서장을 보냈다.[2] 1573년, 미요시 요시츠구가 전사하자 스스로 미요시 성으로 바꾸어 소고 마사야스 대신 미요시 마사야스(三好存康)라 칭하였다. 미요시 야스나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한 1575년 쯤에는 미요시 마사야스(三好存保)라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었다.
2 미요시의 당주로
1576년, 미요시 가문의 당주였던 나가하루가 상관 호소카와 사네유키와의 반목으로 인해 20대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에 미요시 가문과 깊은 갈등을 겪었던 모리 가문은 사누키로 침공해왔으며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시코쿠 평정을 노리며 아와로 침공해와 미요시 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모리 가문은 인질을 교환받고 사누키에서 철군, 모토치카는 아와 서부의 코쿠진들과 화의를 맺었기에 아와 사누키는 아주 잠시 전화의 피해를 회복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1568년이 되자 마사야스는 지금껏 자신이 거주하던 이즈미 사카이에서 아와로 내려와 미요시 세력의 총괄자가 되어 미요시 가문을 재흥시키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오다 세력과 극도의 갈등을 빚고 있던 모리 가문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번 마사야스의 하향에 축의를 보내왔기에 마사야스가 반노부나가 세력에 뜻을 두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사야스는 친노부나가 세력이자 시코쿠 평정을 노리는 모토치카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명백한 열세는 계속되었고 아와 사누키의 코쿠진들은 내통자와 투항자가 속출하는 등 미요시 세력은 혼란함만 가중되었다.[3] 마사야스는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에 새롭게 쇼즈이 성[4]을 쌓아 모토치카와의 최후의 결전도 고려해둔 상태였으나 내통자들과의 대립의 결과 사누키로 몸을 피신시키게 되었다. 그 사이 쇼즈이는 쵸소카베와 내통한 이치노미야 나리스케(一宮成助)가 장악했으나 오사카의 로닌들이 아와로 들어와 쇼즈이를 탈취하였고 쵸소카베 세력은 이들에게 공격받았으며 사이카슈의 사주로 인해 신가이 도젠(新開道善)의 봉기가 발생하는 등 아와는 극도의 혼란상태로 접어들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 꼴을 보고 가신이된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생존자 야스나가를 사누키에 파견하여 아와 사누키를 평정시킬 생각이었으나 야스나가의 평정은 실패로 끝났고 오다 - 쵸소카베의 동맹은 파탄나 시코쿠는 더욱더 깊은 혼돈으로 빠졌다.
사누키로 도피한 마사야스는 코쿠진들이 내통한 오다세력의 하시바 히데요시와 접신하였고 쿠로다 요시타카가 마사야스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게 되어 1581년 1월이 되서야 마사야스는 겨우겨우 쇼즈이로 귀환하였다. 히데요시는 마사야스에게 쇼즈이의 방비를 굳힐 것을 전하고 아와지의 센고쿠 히데히사의 지원을 더해주는 등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82년이 되자 노부나가는 직접 시코쿠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었고 2월에 야스나가를 시코쿠로 도해시켰다. 이어서 6월에 노부타카가 니와 나가히데 등의 중신들을 이끌고 도해준비를 마치면서 시코쿠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빠졌다. 노부나가는 사누키에 노부타카를, 아와에 야스나가를 배치할 생각이었기에 마사야스 또한 나름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횡사하였기에 시코쿠 정벌은 취소되었고 오다 세력은 시코쿠에서 철퇴하였다.
이렇게 오다의 군세는 물러갔지만 모토치카는 아와 사누키의 완전정복을 위해 다시 쇼즈이로 군사를 진군시켰다. 마사야스도 이를 격퇴하기 위해 양자는 요시노가와(吉野川)의 지류인 나카토미가와에서 대치해 전투를 벌였다(中富川の戦い). 1582년 8월 28일, 마사야스는 전투에서 패배해 쇼즈이 성으로 물러났다. 이후 쵸소카베의 군세가 옥죄어 오자 쇼즈이 성에서 농성의 움직임 없이 철퇴하여 9월 21일에 사누키로 도망쳤다. 쇼즈이 일대는 쵸소카베 세력에 의해 불타 한 줌의 재로 돌아갔으며 호소카와 - 미요시로 이어지는 아와의 전성기는 잠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누키로 도망친 마사야스는 소고 성(十河城)에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마사야스는 직접 이것저것 정무를 보며 사누키를 통치해나갔다. 키나이에서 야스나가가 히데요시의 조카 노부요시를 양자로 받고 사누키에 그 영향력을 뻗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요시 종가의 돌림자인 義(요시)를 사용해 미요시 요시카타(義堅)로 이름을 바꾸어 시코쿠 통치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모토치카에게 대항하기 위해 히데요시에겐 원조를 요청하였고 히데요시도 이에 응해 아예 아와지의 수군을 재편성해 마사야스를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쵸소카베 세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고 성이 낙성되어버렸고 마사야스는 동쪽의 토라마루 성(虎丸城)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미요시 세력은 사누키에서도 대부분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사야스는 최후의 항전으로 토라마루 성에서 농성을 개시했다. 쵸소카베 세력은 토라마루 성을 공격했으나 이를 뚫지 못하였고 사이카슈를 멸망시킨 히데요시가 드디어 시코쿠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에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상륙시켰다. 압도적인 하시바 올스타즈 앞에 모토치카는 1년도 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고 모토치카의 본거지 토사를 제외한 시코쿠의 영토는 시코쿠 정벌에 참여하였던 가신들에게 할양되었다. 마사야스 또한 시코쿠 정벌군에 참여했던지라 옛 영토였던 사누키를 되찾고 미요시 가문을 부활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다.[5]
3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이렇게 마사야스는 사누키로 돌아오는 것에 성공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오토모 소린에게 구원요청을 받은 히데요시에 의해 큐슈로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가히 최악의 편성으로. 다름이 아니라 이번 큐슈 선봉대의 총대장은 마사야스의 구원군으로 한껏 무능함을 펼친(...) 센고쿠 히데히사였고 동행하게 되는 군세는 자신의 영토를 헤집어놓은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대장으로 하는 토사군이었던 것이다... 이런 진절머리 나는 동료들과 함께 1586년, 마사야스는 큐슈 분고에 도착하여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 후나이 성(府内城)으로 입성하였다.
군세를 정비하자마자 히데히사는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세가 오토모의 군세보다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이라는 근거를 들어 포위되어있는 오토모 측의 성을 구원할 겸 시마즈의 군세와 정면으로 전투할 것을 제안했다. 이 말은 들은 모토치카 부자는 정색하며 히데히사의 작전을 극구 반대했으나 결국 히데히사는 돌격작전을 실행하기로 맘먹는다.[6]
결국 오토모와 시코쿠, 아와지의 군세를 이끄는 센고쿠 히데히사와 시마즈의 군세를 이끄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헤츠기가와(戸次川)에서 대치하게 되었고 히데히사는 수적 우세를 믿고 군대를 도하시켜 이에히사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 결과 히데히사의 군세는 문자 그대로 갈려나갔다.
돌격의 선봉을 맡았던 히데히사는 이에히사의 매복전술에 낚여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자 냅다 튀었으며(...) 이에 기세가 오른 시마즈의 군세는 노부치카와 마사야스의 군세마저 쓸어버려 이들의 총대장인 노부치카와 마사야스를 포함 수행원의 거의 전부가 그 자리서 전사하였다. 모토치카는 비교적 후진에 있었기에 돌격이 실패하고 난전에서 밀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후퇴를 시작하여 비교적 적은 피해로 토사로 귀환할 수 있었다. 전쟁이후 노부치카의 시신은 반환이 되었다고 쵸소카베의 사료는 말하고 있으나 마사야스는 그런 정황도 불분명한 상태로 약 33세의 나이에 타국의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4 미요시의 멸망
헤츠기가와에서의 실태로 센고쿠 히데히사는 영지가 몰수당하고 유배지로 쳐박혔으며 그 다음으로 사누키군의 총대장을 맡은 비토(尾藤) 가문[7] 또한 큐슈 정벌 중에 추태를 보여주었기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유배지로 쳐박혔다(...) 이 다음으로 사누키의 영지를 하사받은 가신이 이코마 치카마사.
마사야스는 죽었으나 아직 소고 가문의 적통은 남아있었다. 바로 그의 아들 소고 센마츠마루. 그러나 나이가 매우 어렸기에 히데요시에게 당장의 가독상속 허가를 받지 못하였고 치카마사의 보호로 자라나고 있었으나 돌연 독살당하여 성인식도 올리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마지막 적통이 사망한고로, 미요시 유키나가의 대두 이후 키나이와 시코쿠 동부에 위세를 떨치던 아와 미요시 가문과 사누키 소고 가문은 멸망을 맞이하게 되었다.
5 일화
나카토미가와의 패전 이후 마사야스가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쇼즈이 근방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비가 일주일 가까이 지속되어 쇼즈이 근방은 전부 강의 범람으로 인해 침수 되었고, 모토치카의 군세는 민가의 지붕 같은 높은 곳으로 피난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마사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은 배에 병사를 태워 보내 지붕위로 피난한 모토치카의 군사들을 차례차례 찔러 죽이거나 총, 활로 쏘아 죽였다. 이 쵸소카베의 군사를 찌르는 모양새가 아와 토리사시마이(鳥刺し舞)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6 기타
이름을 바꿀때는 요시츠구처럼 정치색을 강하게 투여했으며 요시츠구가 사망하고 나서부터는 소고 성을 미요시 성으로 고쳐 문서를 발급하였다.
사누키의 호족인 소고 가문을 이었기에 마사야스의 주된 활동지가 사누키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마사야스는 시코쿠로 돌아오기 전까지 이즈미의 사카이에 거처하고 있었고 형이 사망하고 나서야 시코쿠로 들어왔으며 미요시 가문의 당주가 되고서도 아와의 쇼즈이 관를 본거로 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누키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으로 한정된다.[8]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모토치카를 어느정도 격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노부나가가 남긴 서장이나 당시의 지배 계획을 보면 그가 노부나가에게 임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와와 사누키는 야스나가와 노부타카 부자에게 하사될 예정이었고 마사야스는 이미 반노부나가 세력으로 낙인찍혀 노부나가가 직접 아와와 사누키의 평정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를 파견한 적도 있는지라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벌이 완수됐어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의 포상과 별 다를바 없었거나 그보다 못했을 것이다. 반면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그를 지원해준 것을 보면 오다 세력의 산하로 들어가거나 종속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미요시 가문의 멸망을 막기 위해 정말 이것저것 노력한 흔적이 보이나 이 노력의 결과는 미요시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졌기에 아무에게도 관심을 못받고 재평가의 이야기 조차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역사상에서의 모토치카의 라이벌을 찾자면 마사야스와 토사의 호족들이 해당되겠으나 이들은 나오는 시간이 짧거나 인기가 없는고로(...) 주로 시코쿠 윗쪽에서 활약한 모토나리나 존재가 불분명한 측실이 모토치카의 라이벌로 나오는 실정이다...
많은 군키모노 들이 나가하루, 마사야스 형제의 모친을 코쇼쇼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면 사네유키와 모토치카와도 친척관계라는 말이 된다.- ↑ 미요시 요시츠구가 소고 가문의 후계자였을 때의 가명이 마사야스와 동일하기 때문에 마고로쿠로가 소고 가문 적통의 가명이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 ↑ 일본 위키백과는 서장에 소고 씨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것으로 마사야스가 아닌 다른 인물이 서장을 보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 대표적으로 카가와 유키카게의 경우에는 모토치카의 차남을 카가와 가문의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협의를 맺게 되어 치카카즈가 카가와 가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유키카게의 후계자가 되었다.
-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항상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로 나와 유명해져 아와 미요시 가문의 본성으로 알려진 쇼즈이 성(勝瑞城)은 바로 이때 마사야스가 급히 만들어낸 성이다.
- ↑ 하지만 사누키 대부분의 영토는 히데히사가 가져가 마사야스가 할양받은 영토는 정말 조금이었으며,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 아와는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할양받게 되어 그의 아들인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 ↑ 쵸소카베의 사료에서는 마사야스가 히데히사의 작전에 수긍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다른 사료에서는 모토치카와 함께 적극 반대했다는 이야기 또한 남아 있어 당시 마사야스의 입장은 불확실하다.
- ↑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당시 비토 토모노부(尾藤知宣)가 아와에서 군공을 올려 사누키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 ↑ 이는 그의 양부인 소고 카즈마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로 사누키를 어느정도 제압하자 곧바로 키나이로 진출하여 이즈미의 방위를 담당했으나 사누키에서 활약한 사누키 토착 무사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