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전적인 의미
- 傲氣,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없는 거 보다야 있는게 훨씬 낫지만 상황 판단력과 능력도 없이 오기만 있으면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 ex)오기로 버티다.
- 誤記, 잘못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 자세한 사항은 오자 항목 참조.
2 포켓몬의 특성
상대에 의해 랭크가 하락하면 공격력이 크게 상승하는 특성. 상대가 자신을 약화시켰다는 것에 오기를 느껴서 대폭 강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6세대에는 특수공격 버전인 승기가 추가되었다.
3 동명이인
- 오기 아키라 - 야구 선수&감독, 해설가
- 불꽃의 미라주 - 오기 다카야, 오기 미야
- 아카기 ~어둠에 춤추듯 내려온 천재~ - 오기 타케시
- 파워프로군 포켓13 - 오기 야스코
- 이야기 시리즈 - 오시노 오기
4 吳起
BC 440~BC 381
손무와 쌍벽을 이루는 중국 역사상 3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한 병법가. 그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의 정치개혁가로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전국시대 명장이자 병법가, 또한 정치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전략전술의 귀재 중 한 명으로 1의 오기도 많았고,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차가운 냉혈한이었지만 병사들의 상처를 친히 입으로 빨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생각하면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 일생도 꽤나 드라마틱하다.
우연의 일치로 윗 항목에 있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뜻하는 동음이의어 오기의 뜻에 맞게 파란만장하고도 오기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기의 삶을 보면 진정한 오기란 이런것이다 싶을 정도. 오기의 독심과 비정함까진 배울 필욘 없어도. 여러차례 모함을 받으며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끈기와 포기하지 않고 오기있게 살았던 것만큼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의미심장하다.
오기가 오기있게 살았따.
4.1 젊은 시절
얼마나 오기가 쩔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렸을 적 자기보다 더 강한 깡패를 상대로 덤비다가 죽지않을 만큼 맞았다. 그런데 그는 다음날 다시 그 깡패를 찾아가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어 보자며 깡패를 도발했고, 그는 또 다시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그러나 오기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계속 그 깡패를 쫓아다니면서 덤볐고, 결국에 밑도 끝도 없는 오기(의 오기)에게 지친 깡패는 마지못해 싸움에서 져주었다.
별다른 수입 없이 백수생활을 하는 터라 벼슬을 구하려고 명망있는 사람들에 연줄을 대기 위하여 천금을 날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자, 홧김에 칼들고가서 평소에 비웃던 사람 30여명을 찾아내어 모두 살해했다. 이런 죄악을 저질렀으니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크게 꾸짖자, 어머니 만류에도 팔을 물어뜯어 피를 흘려 그 피로 재상이 되기 전까진 찾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맹세했다고 한다.
한때 공자 제자인 증삼의 아들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스승이 묻자 어머니와의 약속을 언급하며 자신을 변호했고[2], 효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가의 사상의 특징상 그는 증삼의 밑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었고, 때문에 쫓겨났다. 더불어 효를 중시하는 유가의 기준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피의 맹세를 했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모 장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야...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증자 선생[3]이 "저런 독한 놈은 차라리 멍청한 채로 남겨둬야 했는데 학문을 가르쳐줬으니 더 큰 일을 저지를 것이다."면서 한탄한다.
결국 오기는 유학을 버리고 병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는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는데, 마침 제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그런데 노나라 조정에선 오기의 재능을 알면서도 그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 선뜻 그를 장군으로 쓰기를 꺼려했다. 이를 들은 오기는 주저없이 아내의 목을 베고 대장군 자리에 오른 다음 노나라에 침입한 제나라를 상대로 하여 싸움에서 승리한다. - 오기는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죽여야 함을 깨닫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장군으로 승진한다고 하였다. 같이 고생한 나날이 오래되었던 터라 그의 아내도 기뻐하였다. 그가 "정말 내가 장군이 되면 좋겠소?" 하고 묻자, 아내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오기의 얼굴이 일순간 싸늘해지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소."하며 아내를 죽였다. 요코야마 미스테루의 사기에서는 그저 좋은 말로 타일러 친정집에 돌려보내고 만다. 그리고는 제나라 군대에서 사신이 오자 '처가의 나라인지라 싸우기는 껄끄러우니 적당히 협정하고 끝내자' 라며 안심시키고 기습하여 제나라 군대를 전멸시켜 버린다.- 비록 그는 제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큰 전공은 세웠으나 대장군에 기용되기 위하여 아내를 죽인 일이 빌미가 되어 노나라에서 쫓겨났고, 위나라 문후(文侯)를 만나 장수로 기용된다. - 이 부분이 바로 오자병법의 도입부다. 문후가 '난 평화를 사랑해서 그대는 필요없소'라고 말하자 오자가 '가죽 모아다가 갑옷을 만드는데 쓰고, 대장간마다 병장기 만드느라 분주한 것을 이미 다 보아 두었으니 거짓말은 마시오' 라고 하자 바로 문후는 할 말을 잃었다.
4.2 조작된 오기의 악행?
하지만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초년기 오기의 악행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위에서 언급된, 마을 친구 30명 싸그리 도륙내기, 엄마 장례 생까기, 마누라 목 한 방에 따 버리기 등의 일화가 모두 《사기史記》〈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있는 어떤 노나라 사람이 오기를 비방한 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에 들어서서 제기된 설이 아니라 20세기 중엽 곽말약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술오기(述吳起)'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아예 오기의 악행이 봉건 귀족들에 의해 조작, 왜곡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 바 있다.《사기》 외의 다른 문헌에서는 이와 같은 일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4] 오히려 《한비자韓非子》,《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에서는 오기를 권세와 재물에 초연한 현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한비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吳起之出愛妻, 文公之斬顚頡, 皆違其情者也。오기吳起가 사랑하던 아내를 쫓아내고 문공文公이 전힐顚頡[5] 벤 일[6]은, 모두 그들 인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故能使人彈疽者, 必其忍痛者也。그러므로 남에게 등창[7]을 보이고 따게끔 시키는 자는, 반드시 그 아픔을 견뎌 낼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이는 한비자에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 달라 했는데 '국정 허리띠 치수(...)'에 맞지 않아서 다시 짜 달라 하고 외출했는데, 아내는 "이미 날실을 넣고 짜서 고쳐 짤 수가 없ㅋ뜸ㅋ"하면서 그대로 짜 버리고는 내놓았다. 이 일 때문에 오기는 아내와 이혼했다. 증자 뺨 치는 이혼 사유 쫓겨난 아내가 친인척 중 하나에게 자신 대신 용서를 빌어달라 부탁을 했는데, 이 양반이 말하기를: "오기라는 친구는 법 지키는 사람이라서 법대로 하겠다는 거임. 그래서 왕에게까지 이르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거임. 자기 마누라한테부터 그렇게 함으로써 법을 실천하겠다는 거니까, 님 버스 떠남 ㅅㄱ." 또 다른 일화에서는,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 달라 했는데, 어쩐지 옛날에 짜 줬던 허리띠보다 잘 만들어졌다. 왜 잘 만들었냐고 아내한테 따지니(...) 이번엔 특히 정성 들여서 짰다고 대답이 왔다. 근데 오기 이 양반 왈: "난 저번 거랑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정성들여 잘 만들다니! 님이랑 이혼요 ㅅㄱ." 증자 씹어먹는 이혼 사유
한비자가 인용한 일화에서 오기는 법치의 실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내를 쫓아낸 철인 정도로 그려져 있다. 물론 한비자나 사마천이나 딱히 어느쪽에 지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적어도 사마천 《사기》의 험담이 꼭 사실에 부합함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건 딱히 사마천이 악감정을 품어서 오기의 이미지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할 무렵 오기에 대한 남은 기록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이를 취합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록간 모순이 생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8] 오히려 오기와 피터지게 싸워 오기를 진짜 원수로 여겼을 진나라 사람들이 쓴 여씨춘추에서도 오기는 이렇게 평가되고 있다.
숨은 낌새와 드러난 외양이 파악하기 쉽든 어렵든 성인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없지만 보통 사람들을 알아차릴 길이 없다. 알아차릴 길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은 "신기하다", "요행수다"라고 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도 요행수도 아니고, 그 이치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후성자와 오기는 성인에 가깝다.
어쨌든 오기는 상당히 오래 전 사람인만큼 기록에 남은 행적과 성격에서 모순점이 많이 발견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 점을 염두에 두는 부분이 필요하다.
4.3 명장으로서의 면모
오기는 진나라 침공을 막기 위한 요지 서하(西河)로 부임해 이곳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 고우영의 만화에선 일개 태수로 좌천시킨 것처럼 묘사하지만, 서하는 진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충지였다는 점과, 문후가 승하했을 때 오기가 사흘을 통곡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문후가 오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요충지로 보내어 그가 지닌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그리고 오기는 진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노려 침공을 개시하였고, 다섯 개의 성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오기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대치할 무렵 그가 세운 전적은 명실공히 불패였다. 덧붙이자면, 공을 세우지 못한 예비병들로 급조된 5만의 부대로 50만의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 오기는 수십만이 동원된 큰 전투만 76회 치른 결과 그중 64회를 승리로 이끌었고 나머지 12회는 무승부였다. 다만, 이 때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전국칠웅중 다른 여섯 국가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운 나라는 아니었다.
그가 위나라에서 밀려난 이유는 왕실과 인척이 되기 위한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아내 목을 친 그의 무자비한 면모나, 여자와 재물을 꺼리지 않았다는 악평이 자자했지만, 의외로 장수로서 병사를 통솔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병사가 등에 종기가 났다는 보고를 듣자 그 병졸을 찾아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준 이야기가 바로 그의 다른 면모였다.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남편도 오기의 그런 행동에 감동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는데, 이젠 아들마저 오기를 위해 싸우다 전사하게 생겼다며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해 이러한 오기의 인간적인 면모를 오기가 진심으로 병사를 아꼈다기 보다는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병사를 만들기 위한 용인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일은 요즘 군대에서조차 보기 힘든 일인데, 그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들이 받은 감동은 엄청났을 것이다. 더하여 오기는 병졸들과 똑같이 입었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행군을 할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같이 짐을 지고 걸었다고 한다. 군참에 병사가 우물을 다 파기 전까지는 장수은 목 마르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오기는 실로 현명한 통솔자였다.
이러한 일화는 군대에서 정훈교육 시간이나 지휘관이 훈화하는 시간 등에 단골로 언급되며, 같은 이야기가 육군 수양록에도 짤막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아내를 죽인 일화나 어머니의 죽음을 묻어둔채 무덤조차 찾아가지 않았던 사실들은 언급되지 않아서 오기를 그저 병사들에게 자애롭던 훌륭한 장군 정도로 알고 있던 군필자들은 나중에 오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놀라기도 한다.
여담으로 문후는 악양이란 장수도 등용했는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때 그곳에서 벼슬 살던 그의 아들이 고깃국이 되자, 거리낌 없이 그 국을 마셔버리고 공격을 계속한 일화로 유명하다. 훗날 제나라 전역을 유린한 연나라 명장 악의가 바로 악양의 손자다. 독하기로는 악양도 오기 못잖았던 셈인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후로 다시 중용되지 않았지만 오기는 위나라에서 꽤 오래 활동했다.
비록 군사는 아니지만 서문표 역시 문후 시대의 인물이었는데, 하백신앙 때문에 인신공양을 하던 마을을 개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당히 인재풀이 좋았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4.4 위나라를 떠나다
이후 문후가 승하하고 무후(武候)가 즉위했다. 오기는 문후의 뒤를 이어 무후도 섬겼다.
위 무후가 스스로 政事를 긍휼히 여겨 조정에서 나올 때마다 기쁜 빛을 띠었다. 이때 오기가 고했다. "이제껏 초 장왕의 얘기를 말해준 신하가 있었습니까?" 무후가 답했다. "모르오." 오기가 고했다. "초 장왕은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나랏일에 신하가 끼어들 틈이 없었으나, 매우 근심해 했습니다. 무신이라는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장왕이 말하기를 "은나라의 중훼가 이르기를 제후가 그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얻으면 왕자가 될만 하고, 좋은 벗이 될 만한 자를 얻으면 패자가 될만 하며, 의심을 풀어줄 자를 얻으면 유지할 만하나, 나서서 계획하나 신하가 감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망할 만하다" 했으니 나는 망할 운명인가보오..." 하였습니다." 오기가 다시금 고했다. "장왕은 그것을 근심하였는데 지금 주군은 그것을 기뻐하시는군요." 이에 무후가 몇 걸음 물러나 두 번 절하며 말했다. "하늘이 선생으로 하여금 과인을 깨우치게 하는구려!" |
하루는 무후가 뱃놀이를 나갔다가 주변 경치를 보며 '강산의 험난한 지세는 위나라의 보물이다'하고 감탄했다. 그러자 오기는 '하나라 은나라도 험난한 터에 나라를 세웠으나 결국 왕이 덕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형에 의지하지 말고 왕은 덕을 닦으십시오'하고 왕에게 간언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오기는 더하여 '덕을 쌓지 못한다면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왕의 적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라며 더 적극적인 간언을 해서 무후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나 무후는 오기에게 계속 서하를 맡겼다.
무후는 새로 재상 자리를 만들고 전문[10]을 앉혔다. 오기는 평소 자신의 공이 높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심 불복하고 전문을 찾아가 누가 더 잘났는지 따졌다. 비록 전문이 차분하게 타일러 데꿀멍했지만.
오기가 "성을 빼앗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있어 공이 낫소 내가 낫소?" 하니 전문은 "공이 더 낫소"하였다. 그리고 전문이 다시 묻기를 "왕이 어려 민심이 왕에게 없고 왕은 신하를 믿지 못하오. 왕 사이와 신하와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공이 낫소, 내가 낫소?"하였다. 그러자 오기는 조금 망설이더니 "공이 낫소."하며 물러났다.
훗날 전문이 죽고 부마 공숙좌가 그 자리를 이었는데, 오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공숙자는 오기를 몰아낼 꾀를 내고는 무후를 설득했다. '오기 같은 인재를 붙잡아 두려면 공주를 시집 보내야 한다. 만약 위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부마가 될 테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사양할 것이다.' 그리고는 공숙좌는 오기를 부르고는, 일부러 부인(공주)을 자극해서 개작살이 나는 추태를 연출한다. 이 광경을 본 오기는 식겁해서 부마 자리를 사양했고,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오기는 초나라로 떠나게 된다.
4.5 오기 가득한 최후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재상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머니와 피로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오자가 재상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묘를 찾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을 보면 끝까지 불효자식이었던 셈.
당시 초나라는 영토에 비해 국력은 약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바라 마지않던 재상 자리에 오른 오기는 나름대로 부국강병책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초나라 왕족과 귀족들이 이름값으로 받아먹던 녹봉을 몰수해서 국고로 환원시킨 것이다. 정확히는 촌수가 먼 왕족과 귀족들의 특권을 없앤 뒤 탄탄해진 재정 덕분에 초나라는 군사력을 불리며 오기의 지휘하에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졸지에 특권을 빼앗긴 높으신 분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도왕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귀족들이 작당하고 오기를 죽이려고 난을 일으켰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동귀어진의 꾀를 내어 죽은 도왕의 시신 위로 엎드린 다음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에 맞으면서 최후를 맞았다. 문제는 왕의 시신도 고슴도치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이는 사기의 기록이고 여씨춘추에는 오기의 최후 장면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죽은 후 귀족들이 오기를 죽이려 들었고, 귀족들이 오기에게 활을 쏘자 오기가 달아난 것은 사기와 같다. 그러자 오기는 귀족들에게 "내가 네놈들에게 군사 쓰는 방법을 보여주마"라고 호통치고 달아나다가 화살에 맞았다. 오기는 멈추지 않고 도왕의 시신이 있는 곳까지 달아나서 자기 몸에 꽃힌 화살을 뽑아 왕의 시신에 꽂고 "신하가 감히 왕을 침범했다!"라고 외친 후 귀족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초나라의 법을 따르자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는 자들은 사형이었고 물론 시신도 해당했다. 그 이유는 예전에 오자서가 초나라 평왕[11]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한 사건 때문이었다. 꼭 법이 아니더라도 당장 왕위를 계승한 숙왕(肅王)은 부왕의 시신을 훼손한 무리를 용납할 리가 없지만...[12] 결국 초나라 귀족 가문 중 무려 70여 세대[13]가 처형당했다고 한다. 흠좀무. 이에 대해 '오자는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했다'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날아간 머릿수만 보고 따지면 무승부는 커녕 아예 대승이다(...) 1대 500이니
물론 그가 시행한 정책들은 모조리 없어졌고 초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다시 특권을 회복해서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이처럼 국가 내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봉건성이 강했다는 것은 초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문제로 지적된다. 즉 오기의 개혁이 실패한 결과 초나라는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 자신은 최후를 맞았지만 개혁 조치는 후대까지 받아들여진 상앙과는 정반대다.
이 계략은 일찍이 초나라 성왕이 아들 상신의 반란[14]으로 최후를 맞게 되자 청웅탕[15][16]을 먹고 죽겠다 한 것과 제나라 민왕을 이용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던 소진[17]이 누군가에게 암살당해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역적이라 발표하고 저자거리에 효수하게 하여 범인을 잡은 것과 함께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권모술수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4.6 평가
위무후와 나눈 대화나 초나라 제도의 개혁, 평생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불패를 기록한 전적,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지혜를 짜내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는 등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량만 따진다면 중국사에 무수한 네임드 장수 가운데도 탑 클래스일 듯.[18]
병법가로서 명망이 높지만, 재상으로서 초나라의 정치 개혁을 실시한 것을 보면 상앙과 같은 법가적 정치가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조차 한낱 출세의 도구로 보는 비정한 행태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결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마천이나 고우영, 정비석도 오자를 비판했다. 어지간해서는 사견을 잘 안넣는 사마천도 그의 일화의 후에 그 비정함 때문에 몸을 망치니 슬픈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심지어 정비석은 자기 소설에서 오자가 손자한테 병법 배우러 왔다가 퇴짜맞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소설 손자병법에서 손자가 종기난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는건 실제로는 오자의 일화다.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오기의 행각이 굉장히 비열하고 잔인하게 묘사된다. 90년대 어느 부대에서 한국군 정신교육 시간에 오기의 이런 일화를 소개하던 중에 한 사병이 "오기는 이득을 위하여 이 나라 저 나라로 갔고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손수 목베어죽였습니다. 그런 자의 일화를 정신교육에 쓰자는 건 그다지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소대장이 심각하게 새겨듣더니 상부에 의견으로 보고한 실화도 있다. 그러나 위에 있듯이 오기의 그런 악행이 조작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노나라에서 위나라로, 위나라에서 초나라로 섬길 군주를 자주 바꿔온 것도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다. 하지만 춘추 전국시대에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할 사람을 찾기 위해 군주를 바꿨던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19][20]
그런데 정작 정쟁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부마가 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초나라 개혁을 위해 원한을 감수한 것도 그렇고 왕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특히 뱃놀이를 하던 무후에게 위에서 언급한 말을 했던 얘기도 있고, 무후가 어전회의를 하고나서 오기에게 어전회의중에 내 주장에 이의거는 사람 없었음. 나 천재인듯 이러며 자랑하자 "초장왕은 그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똑똑한 신하가 없으니 안타깝다며 한탄했기에 춘추오패가 될 수 있었다"며 자만하지 말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또한 한비자에는 이런 일화가 또 있는데, 오기가 하루는 옛 친구를 만나서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친구가 "그래. 근데 내가 좀 볼 일이 있어서 잠깐 일좀 보고 먹자"고 했고 오기는 "그래. 뭐 자네 돌아오면 먹지"라고 대답했는데, 저녁이 되도록 친구는 오지 않았고 오기는 끝까지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오기는 사람을 보내 옛 친구를 찾아오게 했고 친구가 오자 그때서야 함께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근데 이거 어떤 의미에서는 무섭다
4.7 오자병법
저서인 《오자병법》은 원래는 48편이었다 하나 무려!, 현재 전해지는 것은 6편 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오자병법》의 내용은 문후와 무후와의 대화 내용을 담은 것이라 한다.
오자병법은 손자병법과 달리(적어도 현재 남아있는 6편으로 미루어 볼때) 전략과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구체적인 용병술과 그 방법론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조직의 인화를 유지하고, 부대를 편제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아군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상대의 전투의지를 꺾고, 전투 역량을 살상하는 방법등을 서술해 놓았다.
《손자병법》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부분도 중요시하며 다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같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1] 위 무왕 조조가 병가를 논할 때 손오를 병칭한 예가 자주 있다.
손자병법이 주로 형이상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면, 오자병법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기 때문에 손자병법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오자병법을 읽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차이를 청동기에서 철기, 전차에서 기마로 전환된 것과 연관짓는 주장이 있다.
청동기와 전차가 주력인 시절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부담이 철기와 기마 시대보다 더 컸고, 주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이 농민병이 아니라 왕족과 경, 대부, 사를 비롯한 상위층의 명예 전쟁 비슷한 형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쓰인 손자병법은 가급적 전쟁으로 손해를 입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대량생산이 쉬워진 철기와 기마병이 주력이 된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전투를 통한 상대편의 전투의지 저해와 전투역량 살상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22]
오자병법은 조직내에서 조직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점술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점술은 전쟁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자는 반대로 점술을 '잘 이용하면' 조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 (양쪽 다 점술을 믿지 않는것은 같으나 활용가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냉정한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오자병법 내용중 상당수는 조직내에서 인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23]
심지어 '전장에서 패배한 자는 군법으로 엄히 처형하여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게 만들어라.'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나오던 것이 당시 병법서인데 오자 병법에는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자를 격려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라는 말까지 한다. 위에서 말한 그 냉혈한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
부국편에서는 5종류의 정예병을 만들면 크게 쓰일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다.
- 관직에 있다가 실책을 범해 관직에서 물러나 공명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
- 전장에서 도망친 과거가 있어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 사람
- 담력과 기백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
- 적극적으로 용맹과 충성심을 보이려는 자들로 한 부대
- 발빠르고 잘 달리는 사람으로 구성되는 부대
특히 1,2 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정예병으로 만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거라 주장했다. 그야말로 털끝만큼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훗날 이르길 장수의 명령에 불길로 직행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또한 정치의 중요성 역시 언급한다. 일단 왕과의 대화로 내용이 채워지다보니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문답도 언급되며 아군이 우리나라의 정치가 옳고 적국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믿게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명분 중심의 이론 또한 언급한다.
4.7.1 충무공 이순신과 오자
오자는 이순신 장군과 관계가 깊은데, 명량 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의 명연설로 유명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오자에서 인용한 것이다.[24] 그렇지만 오자 원문에 있는 표현과 이순신이 직접 한 말(정확히는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어놓은 표현)은 차이가 있다. 이 말의 정확한 출처는 오자 제3편의 <치병(治兵)> 제4장에 나오는 대목.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무릇 전쟁터란 한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이다.
또한 저 말 뒤에 있는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장판파도 오자의 말을 이순신 장군이 어레인지한 표현. 이 말은 오자의 6번째 장인 <여사(勵士)>편에 나오는 말로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일인투명 족구천부(一人投命 足懼千夫). 위무후가 오기에게 형벌과 상에 대해 물었을 때 오기가 다음과 같이 답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명량 해전 때의 유명한 두 표현이 오자가 출처였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 역시 오자를 탐독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왕께서 공이 없는 병사 5만을 출동시키면 신이 군사를 거느려 대응할 것인데, 만약 임금께서 이기지 못하면 제후에게 웃음거리를 사고 천하에서 권력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게 될 적 한 명을 넓은 들에 잠복시키면 천 명의 군사가 쫓되 매우 겁내고 두려워할 테니,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갑자기 뛰쳐나와 자신을 해할까봐 그럴 것입니다. 하여,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一人投命 足懼千夫).
오늘날 저 두 표현은 그저 간지용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강조하는 표현, 혹은 의지드립으로 자주 오용되곤 하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 두 표현의 원 출처는 병법이다. 이순신 장군도 분명히 '병법에 이르기를'이라고 말하고 있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군대 운영방식과 군사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병법에서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주장할 리가 없다. 저 표현들을 뽀대난다거나 정신력 강조용으로 쓰기 전에 오자에 나온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필사즉생 행생즉사'도 흔히 '전장에서는 닥치고 목숨 걸고 싸우라'는 의미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한 번 작전을 세운 후에 그 작전 때문에 죽지는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말고 주저없이 작전을 실행하라는 의미가 진짜 의미에 가깝다.
4.8 현대 매체에서의 오기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 한컷 나오면서 패러디 되었다. 오자마녀 도레미.
삼국지 12, 13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0부터 등장. 통솔, 지력, 정치는 90대, 무력, 매력은 70~60대이다. 즉 무력, 매력은 제외하면 90대인 S급 고대무장. 전형적인 야전사령관형 무장이지만 잔혹한 행적이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경력을 반영한 것인지 매력은 60~70대에 속한다.
삼국지 10에서는 99/74/96/96/70에 특기가 23개. 당연히 개사기 특기 군사를 가지고 있고, 천문도 있다! 능력치는 아주 좋은 S급무장이지만 명사가 없다는 점으로 특급 난이도에서 도적에게 털리고, 적대 도시에 못들어간다는 문제만 제외하면 그래도 S급 장수다.
삼국지 11에서는 97/70/95/96/67 특기는 귀모로 쓸만해 보이지만, 병과적성이 기병 빼고 올A에 S가 없는게 흠. 그래도 능력치과 병과적성 A는 어느정도 쓸만하고, 화계폭약없이 불함정을 활용할수 있다. 친애무장은 조조이다.
삼국지 DS 2에서는 능력치는 무력빼고 11과 동일하지만 그 무력이 80인지라 안그래도 강한 장수였는 데 더 강해졌다.
삼국지 12의 전법은 신화계. 능력치는 무력이 66으로 너프된 것 외에는 변동이 없다. 총합이 조조, 악의,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서 낮으나 이들보다 지력이 휠씬 높다. 특기는 상재, 경작, 병심, 연병, 변설, 수련, 공성, 군사, 귀모. 병종은 창병. 친애무장은 조조가 빠지고, 고증으로 초도왕과 친애무장이다. 그의 저서인 오자병법을 소지한다.
삼국지 13에서도 유감없이 등장. 능력치는 통무지정 94/66/95/96으로 전형적인 군사. 전수특기는 귀모에 중신특성도 신산귀모. 더 설명이 필요없다. 적성은 A/B/A로 기병을 제외한 남은 병종에서는 준특화. 전법도 종횡기략에 공격+방어+사기+기동저하+특공봉인을 해버리는 사악한 전법. 주로 궤주하는 적 부대 격파에 특화되어 있다. 특기도 상업3 / 문화3 / 훈련8 / 순찰5 / 설파7 / 교섭8 / 견수8 / 수영6 / 귀모8 로써 육전이든 해전이든 어디서든 다방면으로 활약가능하다. 언변 캐사기 캐릭터로 제갈량이나 방통같은 지력 최강의 무장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못 이긴다. 여담이지만 조조와 궁합이 좋아서 거의 대부분 조조에게 등용되는게 태반이다.영웅집결에서 곽가와 정욱이 재야로 등장하는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 다만 아래의 오류 항목이 있듯이 가려서 볼 여지가 있다.
- ↑ 사실 30명이나 죽였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형이 확정이다.
- ↑ 당대의 유명한 선생을 자라고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의 증자는 증삼의 아들이 옳다.
- ↑ 아래에 서술된 오기가 재상 전문田文을 털려다가 역으로 털린 일화 또한 《사기》에만 제시된다.
- ↑ 진 문공의 19년
거지 생활유랑길을 보좌한 10인의 신하 중 하나. - ↑ 진 문공은
거지 시절에조曹나라의 희부기僖負羈라는 사람의 후대를 받은 적이 있어서, 나중에 조나라를 침공할 때에 희부기에게만은 크게 예우를 하고 상까지 내렸다. 그런데 이때 10인의 신하 중 위주魏犨와 전힐이 질투 나서 고의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희부기의 집에 방화를 해서 희부기가 사망했다. 전힐은 방화하다가 실수로 자기도 타 죽었다고도 하고이 무슨 병크냐, 진 문공의 지엄한 명에 의해, 전투가 완전히 종료된 후에 처형되었다고도 한다.개자추介子推도 그렇고, 19년을 섬겼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 ↑ 저疽. 등에 나는 부스럼, 종기.
- ↑ 애초에 사마천 역시도 기록하면서 "카더라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는 수준으로 적은거라 나름 최선을 다하여 중립성을 지킨거라 할 수 있다.
- ↑ <<순자>> <요문>
- ↑ 田文. 맹상군의 이름과 한자까지 같아서 맹상군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른 사람이다. 맹상군은 제나라 사람이고 이 사람은 위나라의 대신으로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의 아들이다. 여씨춘추에는 상문(商文)이라고 적혀 있다.
- ↑ 도왕은 평왕의 5대손이다.
- ↑ 사실 초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일지라도 이 경우엔 짤없이 중형이다.
- ↑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선 약 5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화살들에 각 집안의 문양이 박힌 화살을 쏴댄 것(오기를 누가 먼저 죽이느냐에 따라 이후로 되찾을
종부세국고금을 더 가지자고 공로를 차지하고자 서로 누가 쐈는지 알게할 화살을 쏜 것)이 목을 매게 된 셈이다. - ↑ 원래 성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다는 상신을 태자로 삼지 말라는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신을 태자로 삼았었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상신을 내쫓고 다른 아들 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상신은 고모 강미를 분기시키고 진상을 알아낸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
- ↑ 곰 발바닥 요리를 말하는데 진흙에 싸서 굽고 약재에 한번 삶고 다시 진흙에 굽고 하는 식으로 3일은 굽고 쪄야 한다. 성왕은 반란을 일으킨 상신에게 곰발바닥을 먹고 죽게 해달라고 한 건 상신을 제압할 근왕 세력이 도달할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간파한 상신은 성왕에게 죽음을 강요해 결국 성왕은 목을 매어 눈을 부릅뜨고 최후를 맞았다. 상신은 목왕으로 즉위했고 목왕은 성왕이 정사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영왕(靈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을 때 눈을 감지 못하자 성왕을 추증했더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영왕이라는 시호는 성왕의 고손자 비위가 형제였던 공자 기질(평왕)에게 쫓겨나 자살한 다음 받게 된다. 참고로 일찍이 성왕은 정나라에 갔을때 정나라 문공에게 시집갔던 여동생 문미가 문공과 함께 딸들을 데리고 왕림했다. 문공은 정성을 다해 성왕을 대접했는데 초나라에 돌아갈때 문미의 두 딸, 즉 조카들을 데리고 가 버렸다.
자매덮밥이에 정나라의 한 대부는 성왕이 배은망덕하다면서 패권도 누리지 못하고 제명대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 - ↑ 참고로 상신은 이후 초 목왕이 되었고, 그 아들은 바로 춘추 오패중 하나, 초 장왕이다.
- ↑ 소진은 연나라 역왕의 어머니와 간통했는데 역왕은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두려워진 소진은 빠져나갈 목적으로 제나라에 자신을 보내주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어서 멸망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역왕이 허락하여 소진은 제나라에 가서 대륙판 도림이 되어 민왕에게 사치와 대규모 토목공사를 장려했다.
- ↑ 하지만 <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은 전술면에서 "손무가 짱임. 오기는 그만큼 안됨."이라며 그를 디스한다.
- ↑ 오히려 후대 통일왕조 시대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직과 프리랜서, 자기 PR이 춘추전국시대에서는 흔한 일이였다.
- ↑ 춘추 전국시대 대표적인 충신이자 협객으로 유명한 예양만 하더라도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해줄 주군을 만나기 위해 두번이나 주군을 바꾼 바 있다. 마지막에 모신 주군이 비로소 자신을 알아주었기에 최후까지 충절을 지킨 것이지, 그렇지도 않은 자들에게까지 그걸 지킨 것은 아니었다.
- ↑ 오죽하면 사마천이 "군사문제로 이빨 까는 놈들 집집마다 손자 오자 다 갖춰놓았으니, 자세한 건 이하생략"이라고 할 정도. 한비자 역시 집집마다 손오병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 ↑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 중심의 병법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전차가 주력이고 보병은 들러리 수준이었지만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의 비중이 더 커졌고, 그런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병졸들을 다루는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자병법에는 병졸들을 달래는 방법이나 제대하는 군인들을 다루는 방법, 전공이 많은 자와 없는자 양쪽 모두를 격려하는 방법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 ↑ 이에 대해서 오자가 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비록 증자에게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몸담았으니... 오기의 일대기에 대해 적은 책에서는 그가 문후를 만나러 갈 때에도 선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어서 병법가인지 선비인지 헷갈려했다고 하며 그의 병법서 곳곳에 유교의 영향이 보인다고 하였다.
- ↑ 하지만 오기의 인지도가 손무에 비해 낮아서 이순신 장군의 저 말이 병법서에서 인용했다는건 알면서도 오자병법에서 인용한 것이라는건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손자병법에 나온 말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