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수(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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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서울 生.

1 개요

대한민국의 테너이다.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로 남미와 유럽에서까지 주역 테너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20여 년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3백 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에서 주역의 자리를 지켜왔다.

2 생애

2.1 유년시절

1938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중앙대 법대에서 유학을 했고, 서울시청에서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요직을 거쳤으나, 너무나 청렴하여 자식들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했고 노래를 한 번 시작하면 트로트에서부터 이태리 민요, 오페라 아리아, 가곡에 이르기까지 계속 불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국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매우 알뜰했고, 음식 솜씨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네 살 되던 해에 서울 내수동에서 미아리로 이사를 했다. 그때는 미아리에 집이 몇 채 없었고, 산과 들, 논과 밭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고 한다. 미아리에 살면서 여름에는 붕어와 피라미를 잡으러 다니고,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 돈암초등학교에 진학한 후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소년지로 나오는 것들은 죄다 읽었고, 중학교 땐 세계 명작 시리즈를 거의 다 읽었다. 웬만한 명작 수준의 책들은 중학교 때 다 뗐다.

2.2 중고교시절

중학교에 입학을 한 뒤부터는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체조도 배웠다. 유도부터 수영에 이르기까지 안 배운 종목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싸움 꽤나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다. 그러다 싸움패인 ‘미아리 오형제파’를 결성했다. 친구들에 의해 두목으로 추대되었고, 싸움질을 일삼고 다니면서도, 마도로스가 되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꿈꾸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엘 다니기 시작했는데,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성가대를 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말 교회 목사로부터 성악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성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바로 음대에 진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다녔다. 그러면서 당시 대한민국의 3대 테너 중 하나였던 이화예고의 이우근 선생에게서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 그 덕분에 196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2.3 대학시절

대학 시절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과 김치가 전부였다. 특별한 날에는 어묵을 먹는 게 다였다. 그래서 봄, 가을 주말마다 중국집 결혼식 하객 행세를 하고 몰래 피로연장에 가서 고기를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하고 성악을 공부했다.

196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를 올릴 때에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아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였다.[1] 그런데 공연 당시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서 오페라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다. 서울 시내 일간지들이 일제히 혹평을 하였고, 결국 오페라 무대에 서자마자 한국 오페라계에서 매장이 돼버리고 말았다.

2.4 음악가로서의 성공

그 후 남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돈을 벌었으나, 그것마저 실패를 하였다. 결국 어렵게 친구의 도움을 받아 1968년 서울 시향과 협연으로 아내와 함께 부부 음악회를 열었는데, 다행히 좋은 평을 얻었다. 이후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고, 프리마 오페라단에서 올린 '사랑의 묘약'에서 ‘레모리노’ 역을 맡아 드디어 재기에 성공했다.

1969년에는 친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젊은 성악가들을 모아 ‘서울 오페라 아카데미’를 결성했다. '라 보엠'을 제작해 우리나라 최초로 원어로 불렀다. 그렇게 무대에 올린 오페라가 성공하니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작곡자들도 자기 작품을 노래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의 노래가 FM 전파를 타고 방송되기 시작했다.

마침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던 서울대 선배가 추천을 하여, 1969년 여름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1970년 5월 미국으로 진출하였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마스터 클래스 오디션에 합격하여,[2]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교육을 받았다. 생활비를 매달 받긴 했지만, 뉴욕의 집세를 감당하기엔 빠듯하여, 뉴욕의 한국 음식점에서 배달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1976년부터 미국 뉴 헤븐 오페라단(New Heaven Opera)과 버팔로 오페라단(Buffalo Opera)에서 '라 보엠'의 ‘로돌프’ 역을 했고, 캐나다 온타리오 더 쇼 페스티벌(Ontario the Show Festival)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 역을 했다. 1년에 반 이상은 미국 전역과 남미, 캐나다 등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그러다가 198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백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했다.

1989년에는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3]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러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공연 직후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면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년 후 시작된 KBS의 <열린 음악회>, 파바로티를 비롯한 3대 테너가 주도했던 성악계의 크로스오버 추세가 자리잡힌 것을 보면, 도리어 선견지명이었던 셈.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도 매년 50회에 가까운 국내외 공연을 소화하고 있다.
  1. 당시 국립오페라단 주역 테너는 안형일 선생과 이우근 선생이었는데, '마탄의 사수'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오페라인 반면, 두 사람 모두 리릭 테너여서 ‘막스’ 역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단장인 오현명이 ‘막스’ 역을 그에게 맡겼다.
  2. 1주일마다 공연을 하는 1년 유급 계약직이었는데, 뉴욕의 젊은 성악가들이 거의 모두 몰려와 경쟁률이 800대 1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한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3. 시인 정지용이 쓴 동명의 시에 가사를 붙인 작품.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가사로 유명하다.